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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또 ‘당했다.’ 소개글을 쓰려고 책을 펼쳐 들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한참 지나 있다. 업무는 뒷전이다. 밀린 일을 하려 허둥대며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책읽기 좋아하는 걸로는 남에게 빠지지 않는 편인데, 이렇게 내용 자체가 재밌어서 정신을 빼앗기고 독서를 한 게 얼마만이더라.
‘사이언스 소믈리에’라는 책이다. 전 과학전문기자인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의 최신작이다. 낯선 글은 아니다. 동아사이언스 포털에 수 년째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강석기의 과학 카페’에서 최신 글을 가려 모아 실었다. 초창기 글은 이 책의 1권 격인 ‘과학 한 잔 하실래요?’라는 책으로 이미 나왔다. 나오자마자 여러 곳에서 우수과학도서, 권장도서로 선정됐다. 이 책은 그 후속작이다.
연재될 때 한번씩 봤던 글임에도 한번 더 정신을 잃고 읽었다는 데 묘한 기쁨과 뿌듯함이 함께 인다. 똑같이 과학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국내에서 우리 말로 이 정도 글을 쓰는 과학 작가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과학책 애호가로, 또 신간 담당자로 일하면서 외국의 ‘글발 날리는’ 책을 많이 봐왔지만, 이 정도로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하면서 내용까지 깊은 과학책은 보기 힘들다. 대개 전문가의 에세이는 자신의 전공 한 분야에 머무르기 마련이고, 여러 분야를 소개하는 저널리스트의 글은 기발한 사례만 얕게 나열하다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과학자도 즐겨 읽을 정도로 주제를 철저히 파고들면서도, 분야까지 다양하다.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작년 한국 독서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책 중에 한병철 독일 조형예술대 교수의 ‘피로사회’가 있다. 모두가 이 책이 말하는 ‘소진’과 ‘규율사회’의 철학을 이야기할 때, 강 작가는 말미의 작은 주석에 주목했다. 거기에는 미국의 면역학자가 언급한 개념이 지나가는 말로 소개돼 있었다. “면역계는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는 게 아니라 우호적인 것과 위험한 것을 구분한다.” 강 작가는 그 면역학자에 대해 조사하고 이메일로 연락해,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독특한 이력을 가진 연구자를 소개하고, 이를 파란만장한 이야기로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면역학계의 판도를 바꾼 심오한 과학 지식이 드러난 것은 물론이다.
저자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을 ‘과학 에세이’라고 부른다. 과학자의 인간적인 뒷이야기, 연구 과정에 얽힌 에피소드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부터 소설가 섬머셋 몸의 단편소설, 물리학자 막스 페루츠의 책까지 종횡무진 등장하는 글은 확실히 딱딱한 기사보다는 부드러운 에세이에 가깝다. 와인처럼 달콤한 재미와 쌉싸름한 감동, 단단한 무게감이 공존한다.
이 책이 막 인쇄소에 넘어간 날, 우연히 트위터에서 담당 편집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마감하고 책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편집자에게, 괜히 뿌듯한 기분으로 “강 작가의 글은 국제적인 수준”이라며 팔불출처럼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지척에서 늘 공부하고 취재하며 과학자보다 앞서 좋은 연구를 발굴하고 소개하던 모습을 봐왔기에 한, 이유 있는 자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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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큰어머니는 몇 해 전부터 자투리 밭에 키위를 심기 시작하셨다. 어른 주먹만한 키위를 기자에게도 한 박스나 보내주셨는데, 돌멩이처럼 단단해서 칼로 자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남도 바람을 맞고 자란 새콤한 키위가 눈앞에 떡이라니…. 고민하다가 큰어머니가 알려 주신대로 잘 익은 사과와 함께 넣어뒀더니 정말 사과 옆에 있던 키위가 말랑말랑해졌다.
키위에 코가 달려 사과 냄새를 맡았는지, 눈이 달려 사과를 본 것인지 궁금증만 잔뜩 생겼는데, ‘식물은 알고 있다’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키위도 냄새를 맡는다. 잘 익은 사과에서 나온 에틸렌 가스 냄새를 맡은 것이다. 게다가 저자에 따르면 식물은 볼 수 있고, 기억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단다. 얼핏 식물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잘 큰다는 식의 ‘사이비 과학’인가 싶지만,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만나식물 생명과학센터 소장인 저자는 철저하게 과학적인 논문에 근거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해바라기는 사람처럼 눈도 없는데 태양의 방향을 귀신 같이 알고 고개를 돌린다. 빛이 적색광이냐, 청색광이냐에 따라 성장도 달라진다. 정말 식물은 빛을 보고 있다! 책에서는 다양한 식물의 감각을 매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얌전히 자리에 앉아 광합성만 하는 줄 알았더니 세상을 보고, 냄새 맡고, 느끼고 심지어 기억도 한다. 길가에 자리 잡은 풀잎이 달리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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