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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빛 프리지아 부케를 아시나요

만년 조연으로 취급되던 프리지아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귀여운 노란 꽃이라는 선입관은 버리라며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현란한 색상과 모양으로 개성을 뽐내고 있는 프리지아 패밀리를 찾아가 보자.

 


순결 또는 순진한 마음.


노란 꽃잎과 상큼한 향기로 새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 프리지아의 꽃말이다. 장미나 백합처럼 화려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꽃들에 가려져 부케 한쪽에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는 프리지아를 보고 있노라면 딱 어울리는 꽃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리지아 몇 송이가 꽂혀 있는 작은 꽃병이 테이블 위에 놓인 레스토랑에서 주인의 감수성에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정작 프리지아는 불만이 많은가 보다. 우리가 프리지아라고 알고 있는 작고 노란 꽃은 프리지아 패밀리의 하나일 뿐이다. 장미만큼 붉고 백합만큼 희고 붓꽃만큼 파란 프리지아도 있고 꽃 하나가 아이 주먹만 한 종류도 있다. 꽃다발에서 만년 조연이라고 생각했던 프리지아가 최근 당당히 주연으로 등장하고 있다. 무지개색만큼이나 다채로운 프리지아의 진면목을 들여다보자.


 


건조한 남아프리카가 고향


“우리가 프리지아라고 알고 있는 이본느(Yvonne)는 네덜란드의 페닝이라는 화훼육종회사가 1988년 선보인 품종입니다. 여전히 국내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지요.”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 산하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하 과학원) 조해룡 연구사의 설명이다. 1996년부터 프리지아 품종을 연구해 온 조 연구사는 지금까지 20여 가지 신품종을 개발한 프리지아 전문가다. 수년 전부터 그가 개발한 품종들이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과학원 내 프리지아 하우스의 문을 연 순간 습한 공기와 함께 꽃향기가 확 밀려온다. 노란 꽃밭이 펼쳐져 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흰색에서 노랑, 빨강, 분홍, 자주, 보라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색상의 꽃들이 모자이크처럼 직조(織造)돼 있다.

“외국에서 개발한 품종과 현재 저희가 만들고 있는 신품종을 같이 재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꽃들은 전부 프리지아이지요.”

이게 정말 다 프리지아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자를 보며 조 연구사가 웃음 짓는다. 우리가 프리지아라고 부르는 식물은 남아프리카가 원산지다. 프리지아(freesia)란 이름은 찰스 다윈과 동시대인인 덴마크의 약제사이자 식물 수집가인 크리스티안 엑클론이 자신의 친구인 독일의 의사 프리드리히 프레제(Friedrich Freese)를 기념해 붙였다. 1830년 무렵 남아프리카를 탐사하던 엑클론은 이 식물을 발견했고, 1866년 프리지아는 이 식물의 속명으로 정식 등재됐다.

외떡잎식물로 붓꽃과에 속하는 프리지아는 11가지 종(식물분류학자에 따라 숫자는 다름)이 자생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리지아는 이들 원종(原種)을 수십 년간 서로 교배해 얻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선별한 품종들이다. 그래서 육종된 품종의 학명을 구별해 ‘잡종 프리지아’란 뜻의 ‘프리지아 하이브리다’(Freesia hybrida)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전에 남아프리카를 가봤는데 프리지아가 자라기에 딱 맞는 날씨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강수량이 우리나라 절반밖에 안 돼 여름이 건조하고 겨울도 그렇게 춥지 않습니다.”

붓꽃이나 튤립처럼 프리지아도 구근(알뿌리)식물이다. 프리지아는 거의 전부 절화(가지째 꺾은 꽃)로 판매되기 때문에 프리지아를 즐겨 사는 사람도 정작 구근은 못 봤을 것이다. 구근은 줄기와 뿌리가 만나는 지점이 양파처럼 부풀어 오른 조직으로 양분이 저장돼 있다. 프리지아의 경우 이른 봄 꽃대가 올라와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 뒤 잎이 지고 여름을 구근 상태로 난다. 가을이 오면 잎이 나오고 이듬해 봄 다시 꽃대가 올라와 꽃이 핀다.

“우리나라는 여름에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구근이 땅속에서 썩습니다. 번거롭더라도 구근을 캐 말려 보관해야 하는 이유죠.”


햇빛도 중요한 요소인데, 빛이 충분하지 못하면 꽃 빛깔이 선명하지 못하고 향도 약하다. 소박한 꽃치고는 재배조건이 까다로운 편이다.


 




프리지아 육종, 우리도 경쟁력 있어


장미나 국화처럼 수천 년의 품종개량 역사가 있는 꽃들과는 달리 프리지아 육종은 역사가 짧다. 1700년대 후반에야 남아프리카의 야생품종이 유럽에 소개됐고 그 뒤로도 소수의 애호가들만이 관심을 보였다. 화훼육종의 종가라고 할 수 있는 네덜란드에서조차 본격적인 프리지아 육종이 이뤄진 건 1900년대 후반에 들어서다. 향이 강한 편이고 짙은 노란색이 특징인 이본느가 시장에 나온 게 불과 21년 전이다.

“1990년대 중반 네덜란드를 방문해 그곳의 프리지아를 보고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개량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죠.”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꽃인 튤립의 경우는 50~60년 전에 이미 오늘날 사랑받는 품종이 다 나왔을 정도로 광범위한 육종이 이뤄졌다. 따라서 한국뿐 아니라 어떤 나라도 튤립을 갖고 뭘 해보겠다고 뛰어드는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프리지아는 네덜란드 사람들도 조금씩 관심을 보이는 상태였다. 조 연구사는 당시까지 개발된 프리지아 품종과 남아프리카의 야생종들을 모아 본격적인 품종개발에 나섰다. 식물의 품종개발, 즉 육종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지난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먼저 원하는 육종의 방향을 생각한 뒤 적당한 품종 두 가지를 고른다. 한 꽃의 꽃잎과 수술을 떼어내고 남은 암술머리에 다른 꽃 수술의 꽃가루를 묻혀 수분을 한다. 이렇게 얻은 씨를 뿌려 싹이 튼 식물의 꽃을 보고 원하는 특성을 띠는 개체를 선별한다. 이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품종을 만든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무척 고된 작업입니다. 꽃 품종을 만드는 일에 환상을 품고 왔다가 포기하고 떠나는 사람을 여럿 봤지요.”

사실 큰 키에 100kg이 넘을 것 같은 거구인 조 연구사를 보고 화훼육종가로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오히려 최적의 신체조건인 것 같다. 물론 조 연구사는 대학에서 원예학을 전공했다. 다만 보디빌딩 동아리 활동을 한 결과 지금처럼 건장한 체구가 됐다. 그렇다면 조 연구사가 추구하는 프리지아 육종의 방향은 무엇일까.


“꽃 한 송이를 보면서 100가지도 넘는 생각을 합니다. 대충 보고 넘어가면 몇 년의 세월을 날려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조 연구사가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부분은 초세다. 초세란 꽃과 꽃봉오리를 잔뜩 짊어진 꽃대의 자세다. 꽃대가 무게를 못 이겨 축 늘어지면 힘도 없어 보이고 시든 것 같아 소비자가 외면한다. 따라서 초세는 강하고 볼 일이다. 꽃대 하나에 달려 있는 꽃의 수도 중요하다. 마치 벼 이삭처럼 꽃대에 꽃봉오리가 연속돼 열리는 꽃을 ‘수상화서’라고 부르는데, 프리지아의 경우 10송이 내외가 달린다. 조 연구사는 꽃봉오리의 수가 많은 쪽을 선호한다.

꽃 크기나 구조도 중요하다. 꽃이 작으면 주인공이 되기 어렵다. 부케에서 이본느가 조연에 머무는 이유도 꽃이 작기 때문. 꽃을 풍성하게 보이게 하려면 크기뿐 아니라 꽃잎의 수도 중요하다. 보통 프리지아는 꽃잎이 6장으로 서로 거의 겹치지 않는 단엽인데, 교배를 하다 보면 수술이 꽃잎으로 변한 복엽 꽃이 나온다. 이 경우 꽃잎은 12장이나 된다. 네덜란드에서 1980년대에 복엽 프리지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는 꽃이 질 때 모습도 고려합니다. 이렇게 깔끔하게 지는 꽃이 있는 반면에 저렇게 추하게 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조 연구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꽃이 질 때 보라색 기운이 짙어지며 말라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연분홍 프리지아와 꽃이 누렇게 구겨져 시선을 외면하게 만드는 노란색 프리지아가 나란히 놓여 있다.




춤추는 불꽃일까, 우아한 귀부인일까


조 연구사의 첫 작품은 ‘샤이니골드’(Shiny Gold)로 2003년 품종으로 등록됐다. 샤이니골드의 가장 큰 특징은 탐스런 꽃 크기로 이본느의 두 배에 가깝다. 2006년부터 일본에도 수출되고 있는데, 매년 수출규모가 커지고 있다. 부케에서 중심화, 즉 주연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샤이니골드란 이름은 조 연구사가 직접 붙였다.

“솔직히 우리나라 시장만 바라보고 연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바로 옆에 시장 규모가 우리나라의 20배 가까이 되는 일본이 있기 때문에 프리지아 육종은 수출을 전제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품종에 영문 이름을 붙인다. 지금까지 조 연구사가 개발한 품종의 이름을 보면 꽃의 특징을 두 단어로 절묘하게 표현한 언어감각이 돋보인다. 2007년 등록한 ‘댄싱플레임’(Dancing Flame)이란 품종을 보자. 주황색 기운이 있는 짙은 붉은색 꽃이 무리를 지어 있는데, 꽃대를 살짝 건드리면 흔들거리는 모습이 ‘춤추는 불꽃’ 같다.


 

 


‘퍼플리본’(Purple Ribbon)도 인상적이다. 자주색 꽃이 10여 송이 연달아 피어 있는 모습이 마치 리본을 묶어 놓은 것 같다. 이 품종은 꽃 빛깔도 예쁘지만 여러 송이가 한꺼번에 피어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보통 프리지아를 보면 아래쪽의 꽃 몇 송이만 펴 있고 위쪽은 봉오리 진 채 매달려 있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제가 기대하고 있는 녀석입니다. 색이 정말 아름답죠?” 조 연구사가 가리키는 곳에는 이본느처럼 짙은 노란색이 아닌 마치 레몬 껍질이 연상되는 옅은 노란색의 탐스러운 프리지아가 활짝 펴 있다. 색이 고급스러워 우아한 귀부인 같다.


“‘샤이니레몬’(Shiny Lemon)입니다. 작년에 등록이 됐고 올해 처음 소량을 국내 시장에 선보였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꽃이 무척 예쁘다는 기자의 찬사에 자신감을 얻은 조 연구사가 말을 잇는다. 예전에는 짙은 색을 선호했지만 요즘은 이처럼 고급스런 색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그런데 이런 색을 내는 게 쉽지 않다. 조금만 더 옅어져도 색이 바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조 연구사는 샤이니 레몬이 일본에서도 호평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다.

“겉에서 보면 평화로운 정경이지만 사실 화훼 육종은 일종의 전쟁입니다. 좀 더 나은 품종이 나와 상품성이 떨어지면 바로 시장에서 외면받기 때문이지요.”



최근 미국의 바이어가 샤이니골드를 보고 국내가의 2~3배의 가격으로 수입하려 한다며 한층 고무된 조 연구사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털어놓았다. 뛰어난 프리지아 품종을 개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를 얼마나 잘 키우느냐가 상품성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환경은 프리지아가 자라는 데 최적의 조건이 아니라 재배할 때 주의할 점이 많은데, 적극적으로 관심을 쏟는 원예농가가 아직 흔치 않다. 특히 샤이니골드나 샤이니레몬 같은 화려한 품종은 이본느같이 소박한 종류보다 키우기가 더 까다롭다고.

“마침 저쪽에 ‘프리지아 알바’(Freesia alba)가 꽃을 피웠습니다. 가 볼까요?”


프리지아 야생종을 보고 싶다는 기자의 말에 조 연구사가 그 자리에서 소원을 들어줬다. 지금까지 봐온 1m에 육박하는 개량품종과는 달리 야생종인 프리지아 알바는 무릎 높이밖에 안 된다. 흰 꽃(학명의 알바는 ‘희다’라는 뜻이다)은 꽃잎도 작고 생김새도 단순하다. 6개의 꽃잎 가운데 하나만 노란 반점이 있는 것도 특이하다.

“프리지아 알바는 병충해에 무척 강합니다. 앞으로 이런 특성을 반영해 아름다우면서도 튼튼한 품종을 개발하고 싶습니다.”


무릎을 굽혀 프리지아 알바에 다가가자 저 멀리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의 향기로운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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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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