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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혈연이 아닌데 ‘혈연 선택’이라고?

전중환의 협력의 공식 ➓


‘유전자 끼리끼리’를 핵심으로 하는 유전적 근연도 이론을 확립한 윌리엄 해밀턴은 드디어 연구 성과를 집대성해 학술지에 발표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의 이론이 다른 사람에 의해, 탐탁치 않은 이름이 붙은 채 소개되고 있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유전적 근연도에 대해 알아봤다. 근연도는 개체군 평균보다 행위자와 수용자가 유전적으로 얼마나 더 유사한지 알려주는 척도다. 그리고 혈연관계는 근연도를 양수로 만드는 여러 요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했다. 잠깐, 뭔가 이상하다. 포괄 적합도로 사회성의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은 흔히 혈연 선택(kin selection) 이론이라 불린다. 그러면 해밀턴은 그토록 고생해서 이론을 만든 다음에 엉뚱한 이름을 갖다 붙였단 말일까? 사실 ‘혈연 선택’이라고 틀리게 작명한 당사자는 해밀턴이 아니다. 당시 이미 학계의 거물이었던 존 메이나드 스미스였다.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세운 이론에 메이나드 스미스가 붙인 이름은 왜 잘못됐을까.


해밀턴, 자기 이론을 빼앗겼다고 분노하다

해밀턴은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1963년, ‘이론 생물학 저널’에 마침내 그간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하는 긴 논문 ‘사회적 행동의 유전적 진화’를 투고한 뒤였다. 뭔가 새로운 전기가 필요했다. 브라질의 저명한 곤충학자 워윅 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실험실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지내면서 말벌의 행동을 연구하고 싶다고 부탁했다. 커로부터 긍정적인 답장이 돌아왔다. 브라질에서 해밀턴은 현장 연구를 하랴, 포르투갈어를 배우랴, ‘이론 생물학 저널’의 심사 결과에 따라 논문을 두 편으로 나누어 고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1년 뒤, 브라질에서 돌아온 해밀턴은 책상 앞에 앉아 그동안 챙겨 보지 못한 학술지들을 들춰봤다. 꽤 흥미로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모든 과학 분야를 다루는 최고의 학술지 ‘네이처’가 진화생물학을 한결 따사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네이처’는 1962년에 해밀턴이 투고한 소논문에 바로 퇴짜를 놓은 바 있다. 이타적 행동의 진화를 연구한 논문은 심리학이나 사회학 학술지로 보내라는 충고와 함께 말이다(6화 참조). 그런데 같은 해에 윈-에드워즈가 집단 선택설을 종합한 대작 ‘사회적 행동에 관한 동물 분포’를 출간하자, 네이처는 저자가 책의 내용을 직접 요약 소개하는 논문을 1963년에 실었다. 물론 해밀턴은 동물들이 집단 전체의 이득을 위해 희생한다는 윈-에드워즈의 집단 선택론은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네이처 편집장의 태도 변화는 반가운 징조였다.

사달이 난 것은 해밀턴의 손길이 1964년에 출간된 네이처 더미로 향했을 때였다. 1964년 3월에 출간된 네이처는 윈-에드워즈 논문에 대한 비평들과 그에 대한 윈-에드워즈의 반론을 실었다. 그 비평 중의 하나가 유독 해밀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메이나드 스미스가 쓴 ‘집단 선택과 혈연 선택’이었다. 이 글에서 메이나드 스미스는 동물들의 이타적 행동은 집단 선택이 아니라 혈연 선택으로 잘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웃의 생존을 돕는 형질을 진화시킬 수 있는 과정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나는 이들을 각각 혈연 선택과 집단 선택이라고 부르겠다. 혈연 선택은 할데인(1955)과 해밀턴(1963)에 의해 논의되었다…. 자식 돌보기의 진화는 혈연 선택으로 이뤄지지만…. 혈연 선택은 당사자의 동기(예컨대, 사회성 곤충의 불임성)나 더 먼 혈연을 도와줌으로써도 작동할 수 있다(메이나드 스미스, 1964년, 1,145쪽).


세상에나! 해밀턴은 분노했다. ‘이론 생물학 저널’에서 나올 그의 긴 논문은 아직 출간되기 전이었다(그해 7월에 나왔다). 해밀턴은 메이나드 스미스가 자기 논문을 심사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메이나드 스미스가 논문을 둘로 나누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1년 넘게 논문을 수정하고 재투고하느라 시간만 쓸데없이 허비했다고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그렇게 내 논문 출간을 최대한 늦추어 놓고, 자기는 내 아이디어에 이름만 덜렁 붙여서 마치 자기 이론인 양 최고의 학술지 네이처에 논문을 싣다니.

물론 메이나드 스미스는 네이처에서 거부당한 뒤 ‘아메리칸 내추럴리스트’에 안착한 해밀턴의 1963년
소논문을 인용했다. 그러나 해밀턴뿐만 아니라 1955년에 할데인이 발표한 논문에도 동등한 선취권을 부여했다(메이나드 스미스는 할데인의 수제자였다). 마치 포괄 적합도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할데인이고, 해밀턴은 그저 나중에 이를 발전시킨 후학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 충분했다! 사실, 오늘날에도 포괄 적합도 이론의 핵심은 1950년대에 할데인이 런던의 선술집에서 “형제 둘이나 사촌 여덟을 구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버릴 용의가 있소”라고 중얼거렸을 때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는 견해들이 많다. 할데인이 먼저인가, 해밀턴이 먼저인가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어쨌거나, 해밀턴은 자신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메이나드 스미스가 붙인 ‘혈연 선택’이라는 이름을 과연 마음에 들어 했을까.


근연도를 0보다 크게 만드는 세 가지 요인들

해밀턴은 메이나드 스미스가 아닌 다른 이가 ‘혈연선택’이란 이름을 제안했더라도 이를 거부했을 것
이다. 그는 이미 1964년 논문에서 혈연관계는 근연도를 양수로 만드는 여러 요인 중의 하나에 불과함
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협력자 ‘끼리끼리’, 즉 정적인 배열을 만드는 요인들로 ‘개체군 점성(population
viscosity)’, ‘혈연 식별’, 그리고 ‘녹색 수염 효과(greenbeard effect)’를 들 수 있다.

첫째, 개체군 점성이 협력자 ‘끼리끼리’를 만든다. 각 개체가 자라서 독립할 때는 대개 출생지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예컨대, 서울 사는 이경규 씨의 딸이 결혼해 서울에 정착할 확률은 코펜하겐에 정착할
확률보다 높다. 우리 강산에 피어난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날려 한국에 떨어질 확률은 태평양에 떨어
질 확률보다 높다. 결과적으로, 가까이에서 사는 이웃들은 개체군 평균보다 유전적으로 더 유사한 개체들끼리 모이게 된다.

이처럼 대부분의 개체들이 출생지 근처에 모여 살아서, 지역마다 유전적으로 유사한 개체들이 ‘끈적하게’ 뭉치는 현상을 개체군 점성이라 한다. 이 경우, 내유전적 혈연을 번거롭게 식별할 필요 없이, 주변 이웃 가운데 아무나 붙잡고 무차별적으로 도움을 주는 행동이 진화할 수 있다. 해밀턴은 “점성이 큰 개체군을 지닌 종에서는 도움 행동이 가장 흔하고 정교하게 나타나지만, 점성이 낮아 이주가 자유롭게 이뤄지는 종에서는 경쟁이 심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둘째, 혈연 식별이 협력자 ‘끼리끼리’를 만든다. 개체는 유전적 또는 환경적 단서를 활용해 자신과 족보를 통한 혈연관계를 맺은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내서 그 개체에만 선별적으로 도움을 베풀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해밀턴의 이론이라고 하면 바로 떠올리는, 피붙이에 대한 이타적 행동이다.

혈연 식별 기제를 통해서 혈연만 도와준다는 말이 반드시 돕기 전에 나와 상대방 사이의 유전적 근연도를 의식적으로 따져본다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어미 새가 환경적 단서를 통해 친자식을 식별하려면 다음의 간단한 지침을 따르면 된다. “둥지 안에서 꼬물대는 새끼 새라면 누구든지 먹이를 제공하라.” 새의 진화 역사를 통해서 자기 둥지 안에 있는 새끼 새는 어미 새의 친자식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셋째, 녹색 수염 효과가 협력자 ‘끼리끼리’를 만든다. 해밀턴은 족보에 의한 혈연관계 그 자체보다는 개체군 평균보다 더 높은 유전적 유사성이 핵심임을 일깨우기 위해 일종의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어떤 유전자가 ⑴개체로 하여금 겉으로 드러나는 형질을 갖게 하고 ⑵이 형질을 지닌 이웃을 만나면 그 이웃을 선별적으로 도와주게 하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낸다면, 그 유전자는 다른 개체의 몸 안에 들어 있는 자신의 복제본만 콕콕 집어서 도와주는 셈이므로 자연 선택될 수 있다. 1976년에 리처드 도킨스는 개체로 하여금 녹색 수염이 나게 하는 한편, 녹색 수염이 난 사람만 도와주는 가상의 유전자를 예로 들었다. 그 후 이 효과는 녹색 수염 효과로 불리게 되었다.

일단 녹색 수염 유전자가 퍼지면, 개체에겐 녹색수염을 달아 주면서 녹색 수염이 난 사람은 도와주지 않는 사기꾼이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녹색 수염 유전자는 없으리라고 한동안 여겨졌다. 그러나 세균에서 녹색 수염 유전자에 상응하는 실제 예가 발견되면서 오늘날에는 협력자 ‘끼리끼리’를 가능케 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제로 대접받고 있다. 요컨대, 족보에 의한 혈연관계는 이타적 행동을 통해 행위자의 포괄 적합도를 증가시키는 여러 경로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해밀턴이 찾아낸 자연선택 과정을 혈연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됐다.


엇나간 두 거인, 메이나드 스미스와 해밀턴

행여나 메이나드 스미스가 젊은 대학원생들의 성과를 무단으로 훔치는 욕심쟁이였다고 생각하지는 않길 바란다(아마도 해밀턴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일례로 도킨스는 메이나드 스미스가 “젊은 연구자들을 매혹시키고, 즐겁게 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꺼진 열정에 다시금 불을 붙여주는” 참된 석학이었다고 회고했다.

생전에 메이나드 스미스는 ‘혈연 선택’ 이론에 자신이 어느 정도 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질문을 받았다.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나는 그냥 이름을 제안했을 뿐입니다. 해밀턴의 업적에 난 어떤 지분도 없어요. 난 윈-에드워즈에 대한 비평이 해밀턴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소개하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죠.” 두 사람 사이에 사소한 오해와 불신이 쌓이면서, 두 거인 메이나드 스미스와 해밀턴은 평생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더 큰 갈등은 다음 회에 터진다.


 

2016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에디터

    윤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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