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한 해가 저무는 12월입니다. 거리를 걷다보면 멋진 장식이 달린 크리스마스트리도 보이고 구세군 종소리도 들려옵니다. 이번 호에서는 연말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진공의 힘(under pressure)’을 보여줄 요리를 소개합니다.
주인공은 닭 가슴살 스테이크입니다. 여기에 감자 퓨레, 방울다다기양배추(브뤼셀 스프라우트), 대파, 피클 그리고 소스로 장식하니 맑은 날 정원에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는 한 폭의 수채화가 연상됩니다.
평소 닭 가슴살은 뻑뻑해서 소스 없이는 먹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이 요리는 다릅니다. 수비드(sous-vide) 조리법을 썼기 때문입니다. 수비드로 조리한 스테이크는 정말 촉촉하고 부드럽습니다. 감자 퓨레는 감자로 만든 것이 맞나 싶을 만큼 부드럽고, 피클은 아삭합니다.
공기 80% 제거하면 끓는점 60도로 낮아져
수비드는 고기나 채소 등 재료를 파우치에 넣고 진공 상태로 포장한 뒤 65~85도의 물이 담긴 수조나 스팀오븐에서 조리하는 방법입니다. 대개 가정이나 일반 식당에서는 음식을 가열할 때 100도의 물에서 끓이거나 그 이상의 온도에서 기름에 볶습니다. 튀김 요리는 180도까지 온도가 올라갑니다.
그런데 90도도 되지 않는 저온에서 어떻게 고기와 채소를 익히는 걸까요. 심지어 닭 가슴살의 경우 다른 방법으로 조리했을 때보다 살코기가 촉촉해집니다.
수비드 조리법의 첫 번째 비결은 음식이 담긴 파우치 내부의 공기를 전부 바깥으로 빨아내는 진공 과정입니다. 재료를 둘러싼 압력이 낮아지면서 파우치 내부의 진공도가 올라갑니다. 이때 파우치 내부의 진공도에 따라 재료 속 물 분자의 끓는점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파우치 내부의 공기를 80%까지 제거하면 재료 속 수분은 60도에서 끓습니다. 파우치 속 공기를 90%까지 제거해 진공도를 더욱 높이면 재료 속 수분은 40도에서 끓게 됩니다.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도 음식을 익힐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진공 덕분입니다.
현재 식품용으로 사용되는 진공 포장기 내부의 공기압력은 대개 5~10토르(Torr·1토르는 표준대기압의 760분의 1) 정도입니다. 수비드 조리법은 적절한 진공포장재를 선택해야 하는데, 일단 안전성이 입증되고 가스 차단성이 우수하며 산소투과율이 적어야 합니다. 외부 공기와 닿지 않아야 산소로 인한 산패를 방지하고, 혐기성 미생물이 생장해 식품이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류는 65도에서 1시간, 대파는 90도에서 10분
재료를 가열하는 온도가 높을수록 식품 속의 수분이 끓어올라 빠져나가기 쉽습니다. 프라이팬에 스테이크를 구울 때 육즙이 많이 새어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수비드 조리법을 쓸 때에는 재료의 종류와 데치거나 굽는 등 이전에 재료에 적용한 조리법, 파우치의 재질과 두께, 진공펌프의 용량, 진공 시간 등을 고려한 뒤 진공 포장을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진공 포장을 끝냈다면 이제는 알맞은 온도로 조절한 수조에 담급니다. 식품의 종류와 조직감, 구성 성분에 따라 온도와 조리 시간이 달라집니다. 스테이크의 경우 65도 전후에서 수비드를 한 뒤, 센 불에 달군 프라이팬에서 살짝 겉만 그을려주면(그릴링) 겉은 바삭하고 속에는 육즙이 가득하고 연한 스테이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직이 연한 생선이나 새우, 바닷가재 등은 50~55도에서 1시간 내외로 수비드해야 촉촉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비드 조리법을 쓰더라도 보통 채소는 고기보다 고온에서 빠르게 조리합니다. 닭 가슴살은 65도에서 1시간 조리하지만, 대파는 90도에서 10분이면 됩니다. 채소의 세포벽이 부서지기 전에 빨리 데워야하기 때문입니다. 고기는 저온에서 오랫동안 가열하면 콜라겐이 가수분해하면서 겔 상태가 됩니다. 이를 통해 고기가 부드러워지고 풍미도 보존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전남 지역의 전통 향토음식인 삭힌 홍어도 발효균주를 접종한 뒤 수비드 조리법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진공 파우치에서 홍어가 발효되기에 적합한 온도는 25~30도입니다. 최대 30시간 동안 수비드합니다. 이 때 진공 정도와 온도, 시간을 조절하면 홍어가 발효되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수비드 조리법이야 말로 식품물리학에 기반을 둔 조리과학의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