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신부의 엽산 섭취, 왜? 어떻게?
미국과 캐나다 등 전 세계 80개가 넘는 나라들은 시판 밀가루에 비타민B 중 하나인 엽산을 첨가하도록 법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엽산이 배아 발달 중 신경관 결함을 예방한다는 연구결과 때문인데요. 그렇다고 엽산을 강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시각차가 있습니다.
뇌와 척수는 감각기관에서 전해진 정보를 처리하고 판단한 뒤, 명령까지 내리는 우리 몸의 중추신경계입니다. 구조도 상당히 복잡하죠. 그런데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면 뇌와 척수는 아주 단순한, 하나의 관(tube)에서부터 발달합니다.
수정된 지 약 한 달이 지난 배아는 블루베리만 한 크기인데요. 이 배아를 잘 살펴보면 훗날 머리를 형성할 부분부터 엉덩이가 될 부분까지 이어진 관 모양의 구조가 보입니다. 이것을 ‘신경관’이라고 부릅니다.
신경관은 원래 평평한 한 층의 세포가 돌돌 말려서 생긴 구조입니다(2017년 6월호 참조). 종이의 양쪽 가장자리를 잡고 오므리면 종이의 가운데가 아래로 내려가고 평평했던 종이가 원통 모양이 되는 것처럼요.
그런데 배아 발달 중 신경관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오른쪽 그림). 이 경우 척수의 일부분이 외부로 노출돼 심한 경우 보행 장애, 배변 장애를 일으킵니다. 이렇게 신경관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생기는 질병은 배아의 선천성 결함 중 꽤 높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영국에서는 평균적으로 매일 약 두 명의 산모가 신경관 결함으로 인해 임신을 종결하고, 매주 두 명의 아이가 신경관 결함을 갖고 태어납니다.
신경관 결함 막는 엽산
다행히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엽산 보조제(folic acid)를 섭취한 여성의 경우, 신경관 결함이 있는 아이를 출산할 가능성이 기존의 6분의 1 정도로 현저히 감소한다는 연구결과가 1991년 발표됐습니다.doi: 10.1016/0140-6736(91)90133-A 엽산이 무엇이기에?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기죠.
엽산은 비타민B 중 하나입니다. 천연 엽산(folate)은 녹색 채소나 감자, 과일 등에 들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엽산 보조제는 합성 엽산으로 밀가루나 빵, 시리얼 등에 첨가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혹자는 평소에 녹색 채소나 과일 등을 잘 챙겨먹으면 임신 중 신경관 결함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천연 엽산은 조리를 하면 쉽게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음식만으로 1일 권장량인 0.4mg을 섭취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신경관이 닫히는 시기는 수정 후 약 한 달이 지났을 때인데,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때 임신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임신임을 확인한 뒤 엽산 보조제를 챙겨 먹어봐야 이미 늦은 셈입니다.
엽산 보조제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미국 정부는 가임기 여성에게 엽산 보조제를 복용하는 권고안을 발표했지만 크게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998년 좋은 수를 생각해 냅니다. 파스타나 빵 등의 주원료인 밀가루에 합성 엽산을 첨가하도록 법으로 제정한 겁니다.doi:10.3390/nu3030370
효과는 분명했습니다. 1999~2000년 미국에서 신경관 결함을 갖고 태어나는 아이의 수는 엽산 보조제를 권고하기만 했던 1995~1996년에 비해 27%나 줄었습니다. 이후 세계 여러 나라가 합성 엽산을 밀가루에 첨가하는 공중보건법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 10월을 기준으로, 전 세계 81개 국가가 엽산 섭취를 돕기 위해 밀가루에 엽산을 첨가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doi:10.1186/s40985-018-0079-6
“엽산 섭취 강제할 수 없다”는 시각도
물론 모든 나라가 엽산 섭취를 반강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 국가들이 대부분 강제하지 않고, 우리나라도 법으로 의무화하지 않았습니다. 법이 없어도 엽산을 충분히 많이 섭취하고 있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영국을 예로 들면 임신 전 엽산 보조제를 먹는 여성은 31%에 불과하고, 62%의 여성이 임신이 확정된 이후에야(이미 신경관은 닫힌 이후에야) 엽산을 섭취한다고 하니까요(2011~2012년 기준).doi:10.1371/journal.pone.0089354
니콜라스 왈드 영국 퀸메리 런던대 의·치과 교수팀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에서 곡물 제품에 엽산을 넣는 것이 의무화되지 않는 이유를 크게 3가지로 설명했습니다.doi:10.1186/s40985-018-0079-6 첫째는 몇몇 전문가 집단이 엽산 섭취를 신경관 결함의 위험 요인으로 명시할 뿐, 중요한 요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둘째는 공중보건의학이 개인에게 좀 더 적절한 생활 방식을 추천하는 것이지, 강제성을 갖지 않는다고 보는 사회적 인식을 꼽았습니다.
마지막은 엽산을 과다 섭취하는 것이 오히려 신경계 기능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 때문입니다. 최근 이 연구의 분석 방법이 잘못됐다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밀가루에 엽산을 첨가하는 법을 제정하는 쪽으로 힘이 실릴 듯 합니다.
영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점은 과학은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학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회가 어떤 연구를 활성화할지를 결정하기도 하고, 반대로 연구가 사회의 발전 방향을 정하기도 합니다. 사회에 관심을 쏟는 과학자, 과학에 관심을 쏟는 사회학자가 더 많아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2 염색체는 수컷, 발달은 암컷?
발달 중인 배아는 ATCGATCCTCGG… 이렇게 염색체에 빼곡하게 적힌 염기서열들을 꼼꼼히 읽어가며 유전자를 발현시킵니다. 하지만 유전 정보가 배아 발달의 전부는 아닙니다. 환경이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니까요.
양서류나 어류 중에는 성염색체가 아닌, 바깥 환경의 온도에 의해 성이 결정되는 종들이 있습니다(오른쪽 그래프). 한 예로 미국 남동부와 미시시피 강 연안이 원산지인 미시시피 악어의 경우 32~33도에서 알이 부화하는 경우에만 수컷이 되고, 그보다 낮거나 높은 온도에서 부화할 경우 암컷이 됩니다. 한때 애완용 거북이로 유명했던 붉은귀거북도 26~28도에서만 수컷이 되고, 그보다 온도가 높으면 수컷이 될 확률이 30%로 뚝 떨어집니다(붉은귀거북은 현재 생태교란종으로 지정돼 수입이 금지됐습니다).
기후변화로 사라지는 W염색체
아서 조지 호주 캔버라대 응용생태학연구소 교수팀은 호주에 서식하는 야생 턱수염도마뱀으로 환경에 의해 성이 결정되는 현상을 연구했습니다.doi:10.1038/nature14574
턱수염도마뱀은 Z, W 두 가지의 성염색체를 갖고 있는데요. Z염색체를 두 개 갖고 있으면 수컷(ZZ수컷), Z염색체와 W염색체를 하나씩 갖고 있으면 암컷(ZW암컷)이 됩니다. 이때 신기한 건 ZZ수컷의 알은 높은 온도에서 배양하면 암컷으로 발달합니다. 염색체 상으로는 수컷인데 온도에 의해 암컷이 되는 거죠. 이런 암컷을 ZZ암컷이라고 부릅니다.
조지 교수팀은 호주의 여러 지역에서 턱수염도마뱀을 잡아 살펴봤습니다. 그 결과 성별이 바뀐 ZZ암컷의 수가 2003년 전체의 6.7%에서 2011년에는 22.2%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온도가 염색체를 무효화 한 사례가 실제 야생에서 발견된 것은 이 연구가 처음이었죠.
온도에 의해 암컷이 된 ZZ암컷은 생식이 가능합니다. 심지어 ZZ암컷은 수컷(ZZ)과 교배했을 때 정상 암컷보다 더 많은 알을 낳습니다. 야생에서 ZW암컷은 점점 사라지고, W염색체를 가진 자손의 비율도 점차 줄어드는 겁니다. 기후변화로 지구의 온도가 더 높아진다면 언젠가는 턱수염도마뱀의 W염색체가 자취를 감출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아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건 온도뿐만이 아닙니다. 수업 시간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듣는 사례는 바로 빨간눈청개구리(Agalychnis callidryas) 이야깁니다.
빨간눈청개구리의 포식자는 초록앵무뱀(Leptophis ahaetulla)입니다. 그런데 빨간눈청개구리의 알은 포식자인 초록앵무뱀이 나타나 주변의 알을 먹기 시작하면 발달 속도를 정상적인 배아 발달 속도보다 30%가량 높입니다.doi:10.1016/j.anbehav.2004.09.019 발달 중인 배아가 초록앵무뱀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놀라운 일이죠.
비밀은 초록앵무뱀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진동’입니다. 빨간눈청개구리의 알들은 포식자가 만들어내는 진동을 느끼고 부화 속도를 빠르게 바꿨던 겁니다. 더 똑똑한 건 폭풍우로 인해 생기는 진동에는 반응하지 않고, 오직 포식자의 진동만 감지한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트라우마, 손자까지 간다
앞선 두 사례는 배아 발달 중에 생기는 환경 변화가 배아의 발달 방향을 정하는 경우였습니다. 이와 달리 배아가 생기기 훨씬 전 부모에게 생긴 일이 배아에 전해지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정자나 난자의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것도 아닌데 한 세대가 겪은 환경 변화나 질병 등이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세대 간 후성유전(transgenerational epigenetics)’이라고 부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생물학계에서 ‘핫’한, 앞으로도 많은 연구로 우리를 놀라게 할 분야입니다.
관련 연구를 하나 소개하자면, 2015년 이사벨 만수이 스위스 취리히대 의학부 교수팀이 발표한 트라우마 연구가 있습니다.doi:10.1038/ncomms6466
만수이 교수팀은 어릴 때 자라는 환경이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쥐 실험을 기획했습니다. 갓 태어난 수컷 쥐를 매일 3시간씩 엄마 쥐로부터 격리하고, 그동안 엄마 쥐에게도 스트레스를 줬습니다. 이런 실험을 2주 동안 반복했습니다.
이후 연구팀은 트라우마를 갖고 성장한 수컷 쥐를 정상적으로 자란 암컷 쥐와 교배시켰습니다. 그 결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란 쥐의 새끼는 정상 쥐의 새끼보다 위험에 덜 민감하고, 공포도 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신기하게도 이런 특성은 그 다음 세대, 즉 트라우마를 가진 쥐의 손자 세대까지도 이어졌습니다.
발생학을 공부했고, 가르치고 있지만 배아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유전자 속 염기서열 하나만 달라져도 발달을 멈추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온도, 진동, 심지어는 할아버지 세대의 환경 변화에도 일일이 귀 기울이며 발달 방향을 바꾸니까요.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은 것인 배아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