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현 시점에서 과기처장관의 자리는 결코 감투가 아니라, 민족사의 갈림길에서 우리의 숙원을 구현해야 할 무거운 십자가라고 생각됩니다. 현정권하에 과기처장관은 가장 빈번하게 경질돼 왔습니다. 아마도 권력은 이 자리를 정책상 하나의 카드쯤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어느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는 역량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창조력에 있어서 결코 서양인이나 가까운 일본인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에게는 고루 지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데카르트 이래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저마다의 국가, 사회에는 시대마다 고유의 무거운 칼이 씌여져 있고, 그것이 국민의 창조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기처장관의 사명은 하루빨리 이 칼을 벗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정권차원의 정책실현이나 과학적 지식의 구사가 아니라 위대한 철학정신이 요청된다고 하겠습니다. 맨처음 김장관이 하셔야 할 작업은 우리과학계의 현실파악입니다. 현재 UN에 가입되어 있는 나라는 1백60개국 정도라고 하지만, 그중에는 전국민이 몇십만에 불과한 나라도 있어서 제대로 국민국가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는 나라는 40개국 정도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과학계에서 세계적인 논문집에 발표된 연구결과는 60위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지난해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의 성적도 36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용면적에 대한 인구비율은 세계제일이고 기본적으로 무역입국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입국의 지표는 기술도입과 기술수출과의 비율에서 나타나는데, 실질적으로 그 비율은 거의 0이라는 암담한 실정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국제무역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다른 놈이 가져간다'는 속담 그대로입니다.
좀 더 심한 표현을 한다면,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아래 제법 물질적인 풍요를 맞이하긴 했지만 국토가 손상되고 공해가 만연된 가운데 국민 모두가 곰재주를 부리며 먹이를 얻어먹은 것 같습니다. 선진국에서야 산업사회가 완숙기를 넘어 과학기술의 지식을 위주로 하는 정보화사회가 된다고 하나, 우리의 지적수준은 매우 낮아 가히 원시상태나 다름없습니다. 곰재주가 '모방'이고 인간본연의 재주는 '창조'라고 한다면 우리의 처지는 안타깝습니다. 이런 실정을 시정해가는 일은 결코 겉보기에만 화려한 정책이나 구호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1백여년전 세계사가 도도하게 산업화로 흐르는 가운데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벼슬을 바라는 과거공부만 하여 과학기술이라는 개념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그토록 많은 외국유학생 가운데 과학도는 매우 적었습니다. 정치학박사가 판을 치는 풍조 때문에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을 뿐, 산업사회의 방향조차 못 잡았습니다. '박사'위에 '육사'가 있고 '육사'위에 '여사'가 실세였던 군사정권의 구조에서는 결국 근본적으로 과학수준이 높아질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한 과학입국은 과학자가 존중되는 분위기에서 가능합니다. 이는 결코 물질적인 대우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기술자가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M. 베버가 말한 천직(天職)의식이라 하겠습니다. 김장관이 과학자 출신이 아닌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당장 하셔야 할 일이 과학지식에 근거를 두는 것 보다는 철학정신의 구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비록 정권이 바뀌는 한이 있어도 과기처장관만은 초연하게 민족적인 요청을 구현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