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는 생체 내 환경에서 어떻게 전이될까. 138억 년 전 빅뱅 이후 우주가 진화하면서 형성된 거대구조는 은하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정부가 9년 만에 국가 연구용 슈퍼컴퓨터를 5호기로 새롭게 교체하면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국내 과학자들의 기대감도 한껏 높아졌다. 기존 슈퍼컴퓨터로는 사실상 연구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올해 9월 대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국가슈퍼컴퓨팅센터 복합지원동에는 468m2(약 140평) 규모의 농구장만 한 공간에 높이 2m, 폭 1.2m의 대형 컴퓨터 128대를 연결한 거대 병렬식 슈퍼컴퓨터가 들어섰다. 국가 연구용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이다.
무게는 133t(톤)으로 소형 항공기와 비슷하고, 시스템을 연결하는 케이블 길이는 무려 132km에 달한다. 조민수 KISTI 슈퍼컴퓨터서비스센터장은 “한 줄로 늘어뜨리면 서울~세종을 이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누리온의 연산속도는 25.7PF(페타플롭스·1PF는 초당 1000조 번의 실수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2009년 도입돼 운용되던 4호기 ‘타키온 II’(0.365PF)보다 70배 이상 향상됐다. 이는 개인용컴퓨터(PC) 2만 대와 맞먹는 수준이다. 사람 70억 명이 420년 동안 쉬지 않고 계산해야 하는 양을 1시간 만에 처리할 수 있다.
국내 최고 성능인 누리온은 올해 11월 기준 세계 슈퍼컴퓨터 랭킹 13위에 올랐다. 현재 시범 운영 중이며, 12월 3일부터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다.
100억 개 이상 입자로 암세포 모델링
가장 큰 변화는 타키온 II 에서 2, 3년 이상 걸리거나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대형 문제들을 풀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세포 모델링이다(아래 그림). 누리온을 활용하면 약 100조 개의 원자로 이뤄진 세포 1개를 3차원(3D)으로 구현하고, 세포막과 수용체가 세포 주변의 약물, 바이러스, 항원·항체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이는 신약 개발이나 질병 연구에 활용된다.
곽상규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는 “세포 간 상호작용을 보려면 세포 하나를 최소 100억 개 이상의 입자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하는데, 타키온 II로는 입자를 1억 개 이상 늘릴 수 없어 세포의 일부를 2차원으로 모사하는 데 그쳤다”고 말했다. 반면 누리온을 사용하면 암세포의 전이 과정 같은 생체 내 현상까지 연구할 수 있다.
여기에 fs(펨토초·1fs는 1000조분의 1초) 단위로 살아 있는 세포를 관찰할 수 있는 4세대 방사광가속기까지 활용하면 세포의 비밀에 다가가기가 훨씬 수월하다. 염민선 KISTI 계산과학응용센터장은 “가속기로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세포가 왜,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정확히 알아낼 수 없다”며 “누리온으로 미리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한 뒤 그 결과를 토대로 실험을 진행하면 실험의 성공 가능성과 효율이 확연히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입자 3조 개로 우주 진화 시뮬레이션
고등과학원은 누리온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우주 진화 시뮬레이션을 수행할 계획이다. 2조~3조 개 이상의 우주 입자에 중력과 암흑물질의 영향을 설명하는 물리법칙을 적용해 138억 년 전 빅뱅 직후 생성된 우주를 시간에 따라 진화시키는 것이다.
이를 활용하면 은하가 모여 형성된 은하단, 초은하단을 넘어선 3차원 우주의 거대구조를 연구할 수 있다. 수많은 은하가 길게 늘어선 ‘필라멘트 구조’와 벽 모양으로 은하가 밀집돼 있는 ‘거대 장벽’, 물질이 거의 없는 공간인 ‘보이드’ 등이 대표적이다.
김주한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연구교수는 “입자 수가 많을수록 더 넓은 시야로 우주를 볼 수 있고, 우주 거대구조가 은하의 생성과 진화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며 “우주론 검증과 우주탐사 위성 임무 설계 등에 활용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간 타키온 II로는 입자 5000억 개를 이용해 계산할 수 있었다. 지난해 스위스 취리히대 연구진은 미국의 슈퍼컴퓨터 ‘타이탄’(27.1PF)을 이용해 입자 2조 개로 우주 진화 시뮬레이션 기록을 세웠다. 김 교수는 “기록 경신을 위해 누리온으로 입자 수를 최대 3조 개까지 늘려 시뮬레이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천문연구원은 암흑물질에 양성자, 중성자 등 각종 중입자(바리온)까지 고려해 우주 진화 과정의 다양한 천문현상을 모사할 계획이다. 이 역시 세계 최대 규모를 계획하고 있다. 신지혜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빅뱅 이후 핵반응에 따른 별의 생성과 초신성 폭발, 은하의 생성과 진화 등을 모두 시뮬레이션에 담을 예정”이라며 “기존보다 27배 큰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우주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57만20개 코어, 연산 성능 세계 13위
누리온은 인공지능(AI) 개발과 해저로봇, 항공기의 동역학 연구, 태풍 등 자연재해 예측, 신소재 개발 등에도 활용할 수 있다. 연구 시간의 단축 효과도 클 것으로 예상된다. 가령 타키온 II로 2개월 이상 걸렸던 계산을 누리온이 수행하면 단 하루 만에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어떤 점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 우선 타키온 II는 중앙처리장치(CPU) 프로세서로만 이뤄진 반면, 누리온은 하나의 노드에 68개 코어가 집적돼 빅데이터 분할 연산에 용이한 ‘매니코어’ 프로세서가 98%를 차지한다. CPU 프로세서는 2% 수준이다.
코어 수도 타키온 II가 2만8672개였지만, 누리온은 57만20개로 20배 가까이 늘었다. 시스템 메모리 크기는 33.88PB(페타바이트·1PB는 100만GB)로 타키온 II 대비 400배 이상 커졌다. 대용량 정보를 불러오거나 저장할 때 발생하는 버퍼링을 줄여 줄 수 있는 초고속 저장장치 ‘버스트 버퍼’(1PB)도 적용됐다.
황순욱 KISTI 슈퍼컴퓨팅본부장은 “슈퍼컴퓨터는 최소 5년 단위로 교체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예산 부족으로 계획보다 누리온 도입이 늦어져 많은 연구가 선진국에 뒤처진 상황”이라며 “이번 누리온 도입으로 국내 과학자들의 연구가 다시 탄력을 받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올해 말 퇴역을 앞둔 타키온 II는 도입 당시 세계 14위였지만, 지난해 이미 500위 밖으로 밀려났다.
11월 12일(현지 시간)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2018 슈퍼컴퓨팅콘퍼런스(SC)’에서 발표된 ‘세계 슈퍼컴퓨터 톱 500’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는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의 ‘서밋’이다. 이는 정해진 연산 처리 프로그램을 돌렸을 때 측정되는 연산속도를 비교한 순위로, 매년 6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순위가 발표된다.
미국은 서밋 외에도 ‘시에라’(2위) ‘트리니티’(6위), ‘타이탄’(9위), ‘세콰이아’(10위) 등 세계 슈퍼컴퓨터 10위권 안에 5개나 이름을 올렸다. 미국과 선두를 다투는 중국은 우시 국립슈퍼컴퓨팅센터의 ‘타이후즈광’이 3위를 기록했다. 2013년 6월 이후 지난해까지 1위 자리를 지켰던 중국 광저우 국립슈퍼컴퓨팅센터의 ‘텐허2A’는 4위를 기록했다. 그 밖에 스위스(5위), 일본(7위), 독일(8위)의 슈퍼컴퓨터가 10위권에 들었다.
● Interview “1억 건 데이터와 ‘누리온’ 결합해 데이터 생태계 구축”
“국가 연구용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은 1988년 도입된 1호기와 비교하면 무려 1300만 배 높은 성능을 자랑합니다. 앞으로 누리온이 한국 과학기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최희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원장은 과학동아와의 인터뷰에서 12월 공식 개통되는 누리온에 대해 이처럼 밝혔다. 최 원장은 “누리온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기술인 빅데이터 분석과 인공지능(AI) 등에 다양하게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 원장은 슈퍼컴퓨터가 지난 30년 동안 산학연의 혁신을 촉진해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30년 전 도입 초기에는 슈퍼컴퓨터가 국산 자동차 설계와 제작에 사용돼 한국이 자동차 강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며 “액체로켓 엔진 시뮬레이션 등에도 활용됐다”고 밝혔다.
특히 4호기인 ‘타키온 II’의 경우 2011년부터 1만 여 명 이상의 연구자와 500여 개 이상의 기업이 활용해 신제품 개발비용과 시간을 크게 절감했다. 타키온 II를 활용한 연구가 과학논문인용색인(SCI)급 저널에 논문으로 게재된 건 1000편이 넘는다.
‘누리온’이라는 이름은 대국민 공모를 통해 선정됐다. 최 원장은 “누리온은 ‘우리가 다 함께 누리는 슈퍼컴퓨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이름에 걸맞게 국민 모두가 슈퍼컴퓨터의 혜택을 고루 누릴 수 있도록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누리온은 슈퍼컴퓨터 연산 능력의 한계로 연구에 제약이 있었던 대규모 연구는 물론이고 기업의 신제품 개발 및 시장분석, 자연재해, 교통문제 등 국가와 사회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도 활약할 예정이다. 최 원장은 “이를 위해 누리온의 경우 거대연구와 3인 이상의 집단연구, 국가전략 과제의 비중을 높였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그간 KISTI가 축적해 온 과학기술 정보와 연구 데이터는 1억 건이 넘는다”며 “이런 강점을 누리온과 연결해 산학연과 함께 데이터 생태계를 구축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슈퍼컴퓨터는 국가 전략 장비이자 AI 시대 핵심 인프라인 만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투자와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