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포근한 겨울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진다. 누군가는 일광욕을 즐기고, 누군가는 간식으로 준비된 사과를 먹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천장에 걸린 그네를 타고 논다. 사람 얘기가 아니다. 11월 6일 전북 정읍시에 개소한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영장류자원지원센터의 사육실 모습이다. 신약개발, 난치질환 연구에 도움을 줄 원숭이 590마리가 생활하는 영장류자원지원센터를 개소 하루 전 직접 찾아가봤다.
“연구에 가장 많이 쓰이는 종들입니다. 연말에 500마리를 더 들여와서 내년에는 1090마리를 수용하고, 최종적으로는 3000마리까지 확보할 예정입니다.”
김지수 영장류자원지원센터장이 가리키는 사육동 안에는 긴꼬리원숭이과인 붉은털원숭이(Macaca mulatta) 10여 마리가 마치 놀이터에 온 듯 놀고 있었다. 사육사가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유리벽 가까이로 다가왔다. 몸길이 60㎝, 몸무게 5kg 가량에 얼굴엔 붉은털이 보송보송한 원숭이는 생후 몇 개월 된 아기 같았다.
원숭이의 사진을 흔들리지 않게 찍은 것은 이때가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벽을 타고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카메라 셔터도 쫓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영장류 3000마리 집단 생활 가능한 사육동
영장류자원지원센터에는 붉은털원숭이 160마리와 같은 과인 게잡이원숭이(Macaca fascicularis) 430마리 등 590마리 원숭이가 살고 있었다. 충북 오창에서 운영 중인 국가영장류센터가 영장류 400마리를 보유하고 있는 것에 비해 큰 규모다.
이곳에서는 영장류를 단체로 사육한다. 총면적이 9739㎡인 영장류자원지원센터 내에 영장류를 단체로 사육할 수 있는 사육동 10개를 갖췄다. 3000마리 영장류를 단체로 사육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서 영장류자원지원센터가 유일하다. 1~2동은 원숭이들의 행동인지연구, 3~6동은 뇌질환연구, 7~10동은 영장류 번식연구 장소로 사용할 계획이다.
단체 사육은 영장류의 사회성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야생 원숭이는 대장을 중심으로 무리 지어 산다. 따라서 사육실 안에서도 단체로 생활하면서 각자 서열을 정하고 관계를 맺는다. 좁은 케이지에 갇혀 있는 것보다 스트레스가 적고, 경쟁을 통해 먹이를 먹기 때문에 성장 속도도 더 빨라진다. 김 센터장은 “원숭이들이 단체 생활을 하면서 서로에게 질병을 옮기지 않도록 검진을 꼼꼼하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원숭이들이 단체 생활하는 사육실은 예상보다 아늑했다. 천장에는 기계체조 ‘링’과 같은 놀이기구가 매달려 있었고, 타일로 마감된 벽에는 여러 개의 선반이 각각 다른 높이로 설치돼 눈길을 끌었다. 김 센터장은 “우두머리 원숭이가 가장 높은 선반에 앉는다”고 귀띔했다. 바닥 일부에는 철망을 깔아 똥이나 오줌 같은 오물이 몸에 직접 닿지 않도록 설계했다.
사육실 바닥에는 온돌 시설이, 천장에는 히터 시설이 갖춰져 있어 내부는 후끈했다. 동남아시아가 원래 서식지인 원숭이들에게 적합한 온도와 습도 환경으로 맞춘 것이다. 기온이 16도 아래로 내려가면 원숭이들의 털이 빠지거나 건강상태가 나빠진다. 여름보다는 겨울을 잘 나는 것이 중요하다.
원숭이들은 아침저녁으로 사료를, 점심은 특식으로 과일을 먹는다고 했다. 김 센터장은 “개중에는 바나나를 안 좋아하는 녀석도, 사과는 껍질을 제거해야만 먹는 녀석도 있다”며 “폐쇄회로(CC)TV를 이용해 각각의 행동을 분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첨단 장비로 유전체, 대량번식 연구
영장류자원지원센터는 원숭이들이 특정 병원성 미생물에 감염되지 않은 상태, 즉 ‘SPF(Specific Pathogen Free)’ 상태로 건강하게 지내도록 사육동 옆 본관동 2층에 다양한 실험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임상병리실험실에 들어서자 혈액을 분석하는 자동혈구분석기가 보였다. 원숭이들의 혈액을 분석해 건강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검사하는 장치였다. 설명을 듣다보니 마치 사람이 건강검진을 받는 병원에 온 것 같았다.
옆방인 분자유전학실험실에는 유전자증폭시스템과 분광광도계 같은 영장류의 유전체를 연구할 수 있는 장비가 즐비했다. 고품질 영장류 자원의 분자마커를 개발해서 고품질 영장류를 표준화하는 연구가 이뤄질 예정이라고 했다.
마지막 분자번식생리실험실에서는 발생학적 기법을 활용해 영장류의 번식을 연구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향후에는 형질전환 동물도 생산할 수 있다. 실시간유전자증폭시스템, 세포융합기 등 장비가 갖춰져 있다.
실험용 영장류 확보, 갈수록 어려워져
실험동물로서 영장류의 중요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 예로 미국 농무부(USDA)가 올해 9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생물의학 연구에 사용된 원숭이 수는 사상 최고치인 7만6000마리를 기록했다. 한국도 최근 10년 동안 영장류 수입 두수가 7배가량 증가해 지난해에만 2403마리의 영장류를 연구에 사용했다.
이는 영장류를 이용한 실험이 쥐나 돼지를 이용한 실험보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깁스 미국 베일러의대 박사가 이끄는 국제공동연구팀이 2007년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붉은털원숭이와 인간은 평균 93.54%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doi:10.1126/science.1139247 체내 대사에 관여하는 체내 운반체와 수용체도 95% 가량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침팬지, 오랑우탄 등의 영장류는 인간과 유전자가 더 유사하지만 멸종위기종 등급이 높아 연구에 범용적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유전자가 유사한 원숭이들은 사람과 동일한 질병에 걸릴 수 있고, 이런 질병에 걸린 원숭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사람에게도 효과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부작용도 유사하게 일어난다.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회사들이 임상시험의 최종단계인 전임상시험에서 영장류를 이용해 실험을 하는 이유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영장류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검열 절차 등을 고려하면 최소 두 달 이상 기다려야 영장류를 수입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연구에 필요한 적절한 기회를 놓치거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 교역에 관한 국제협약(CITES)’ 등에 따라 외국에서 실험용 원숭이를 들여오기도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
수급 안정성도 문제다. 영장류 한 마리는 500만 원가량에 거래되는데, 최근 중국 등 원숭이를 수출하는 국가에서 영장류 수출량을 줄이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실험용 원숭이의 90%가 중국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한 국가가 영장류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할 경우 국가간 검역이나 대외 정책의 변화에 따라 물량 확보가 갑자기 어려워질 우려가 있다.
수입 대신 외국에 직접 나가서 영장류 시험을 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국내 기술로 개발한 신물질이나 천연물 유래 물질의 정보가 사전에 해외로 유출될 위험이 있다.
2022년 50마리 국내에 공급 목표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 영장류자원지원센터를 구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영장류를 국내에서 키워 수입 비용을 절감하고, 국내의 실험 수요에 안정적으로 영장류를 공급하자는 것이다. 2014년부터 4년간 총 185억 원을 투입해 사육동과 본관동, 검역동, 부대시설 등을 건설했다.
김장성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원장은 “영장류를 이용한 연구 기반을 확립해 노화와 뇌과학, 신약개발, 재생의학 등 전임상 연구를 지원할 수 있게 됐다”며 “국내 의생명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바이오산업을 활성화시켜 궁극적으로 국민 보건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연차별로 번식이 가능한 모체 영장류를 들여와 검역과 사육, 번식 기술을 확립하고, 실험에 필요한 영장류를 사육하기 위한 건강 모니터링 시스템부터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향후에는 자체 대량번식 체계도 구축할 계획이다.
김 센터장은 “자체 대량번식 체계를 구축하면 앞으로 영장류 자원을 더욱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며 “2022년에는 50마리를, 2025년에는 국내 수요의 50%를 공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만 현재까지는 연구용 영장류를 번식시키는 것과 관련한 국내 기준법이 없어 멸종위기종을 관리하는 환경부와 함께 법적 절차를 확립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국내외 연구기관과 연구 협력도 늘릴 예정이다. 실제로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선전, 항저우, 쑤저우, 광저우 등지에 영장류연구소를 세우면서 전세계 영장류 연구의 메카로 떠올랐다. 과학학술지 ‘네이처’는 2016년 4월 ‘원숭이 왕국(Monkey kingdom)’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중국의 영장류 연구를 대서특필했다.
인력 확보도 중요한 과제다. 현재 영장류자원지원센터에서 원숭이 590마리를 연구하고 관리하는 인력은 박사급 연구자 4명, 사육사 4명 등 총 8명뿐이다. 영장류 연구 선진국들이 영장류의 행동을 연구할 때 영장류와 연구자의 수를 1대 1로 유지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인력 부족 시엔 만일의 사고에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 기자가 방문한 다음 날인 6일 오후 3시쯤, 영장류자원지원센터에서 붉은털원숭이 한 마리가 달아나는 사고가 일어났다. 키가 60cm에 불과한 원숭이가 높이가 7m인 담을 넘은 것이다. 심지어 담의 꼭대기에는 1만2000V의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 원숭이는 19일 오전 10시경 13일 만에 겨우 생포됐다.
김 센터장은 “센터 내에 있는 원숭이는 엄격한 검역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원숭이에 의한 질병 감염 우려는 없다”며 “탈출한 동안 원숭이가 야생의 다른 동물들과 접촉했을 수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달 동안 검역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