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현지 시간)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북동쪽으로 60㎞가량 떨어진 카다라쉬에 위치한 국제핵융합실험로(ITER·이터) 본부. 안전장비를 착용한 뒤 차에서 내려 10여 분을 걸어 들어가자 축구장 60개 규모(42만m2)의 건설 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체 저장탱크를 지나 본관으로 들어서자 지름 28m, 높이 24m에 이르는 초대형 핵융합로가 설치될 구조물 건설이 한창이었다. 핵융합로는 ‘땅 위의 인공태양’으로 불리는 핵융합 발전소의 핵심 시설이다. ITER는 자기장으로 플라스마(고온·고압에 의해 원자핵과 전자가 분리된 기체)를 가두는 방식의 핵융합로인 ‘토카막’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양형렬 ITER 토카막조립팀장은 “100만여 개의 크고 작은 부품들을 레고 블록처럼 차곡차곡 결합해 장치를 조립하고 있다”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인공 구조물”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인공태양’이 ITER의 프로토타입
핵융합은 수소(H)나 헬륨(He) 같이 가벼운 두 원자핵이 충돌해 에너지를 방출하며 원자핵이 되는 반응이다. 핵융합 발전은 이때 나오는 고에너지 중성자의 열을 이용해 발생시킨 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태양 중심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을 지상에서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장치여서 ‘땅 위의 인공태양’으로 불린다.
ITER는 2025년까지 핵융합로 핵심 시설을 완성해 첫 플라스마를 발생시키고, 2035년 완공해 본격적인 핵융합 실험에 돌입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8월 말 기준 전체 공정률은 57.4%를 넘어섰고, 현재는 월평균 0.7%씩 완성돼가고 있다.
1987년 처음 아이디어가 나온 ITER는 2007년 한국을 포함해 유럽연합(EU),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인도 등 7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지금의 형태로 모양새를 갖추고 본격적인 건설에 들어갔다. ITER 건설에 투입되는 예산은 현물을 포함해 EU가 45.46%, 나머지 6개국이 각각 9.09%씩 분담한다. 올해 한국은 785억 원을 투입했다.
한국은 ITER와 동일한 방식의 ‘한국형초전도핵융합장치(KSTAR)’를 통해 얻은 경험과 기술력 덕분에 ITER 건설에서 초전도 도체와 진공용기, 블랭킷(중성자·열 차폐물 및 삼중수소 증식재), 조립장비, 전원공급장치 등 핵심장치 제작을 주도하고 있다. KSTAR 개발을 이끈 이경수 전(前) 국가핵융합연구소장은 현재 ITER의 서열 2위인 기술총괄 사무차장으로 있다.
KSTAR는 국가핵융합연구소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세계 최초의 초전도핵융합장치다. 정기정 ITER 한국사업단장은 “처음 우리가 핵융합장치를 개발한다고 했을 때 ‘언제 한국이 핵융합을 연구했냐’며 무시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KSTAR를 ITER의 프로토타입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현곤 ITER 한국사업단 기술본부장은 “ITER 사업은 설계부터 제조 공정, 운영 방식에 이르기까지 KSTAR에서 축적된 데이터와 노하우를 바탕으로 추진되고 있다”며 “KSTAR는 ITER의 축소판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ITER는 KSTAR의 30배 크기다.
올해 1월 한국은 회원국 최초로 ITER 장치의 진공용기를 구성하는 세그먼트(블록)를 완성했다. 세그먼트 4개가 1개의 섹터를 구성하고, 이 섹터 9개가 모여 진공용기를 이룬다. ‘핵융합로의 꽃’으로 불리는 진공용기는 실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중성자와 열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게 차폐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한국은 9개 섹터 중 4개를 제작한다.
정 단장은 “처음에는 유럽연합이 7개 섹터를 제작하기로 했는데, 기술적인 문제로 일정을 맞추지 못하면서 한국에 2개 섹터에 대한 제작을 추가로 요청했다”며 “사업 분담금이 가장 높은 EU가 다른 회원국에 할당량을 넘기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진공용기 제조는 현대중공업이 전담하고 있다.
천장 높이가 60m에 이르는 메인 조립동 가장 안쪽에는 철탑처럼 생긴 진공용기 조립장비가 거대한 양 날개를 펼친 채 서 있었다. 높이 22m, 폭 20m에 이르는 이 장비는 한국 회사인 SFA가 제작했다. 거대 중장비임에도 불구하고 오차 범위 2mm 이하의 매우 정밀한 기계 제어가 가능해 회원국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연말에는 효성그룹이 제작한 세계 최고 성능의 변압기 2대가 ITER 전원빌딩에 설치됐다. 연말까지 이곳에는 총 32대의 변압기가 설치될 예정이다. 이 중 18대를 한국이 조달한다.
‘DEMO’ 지어 핵융합 발전 가능성 확인
ITER의 목표는 1억5000만 도 이상의 플라스마를 400초 이상 유지하는 것이다. 플라스마를 수백 초 동안 유지할 수 있으면 수십 년 간 꺼지지 않는 인공태양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한 셈이다. KSTAR는 1억 도 이상 플라스마로 300초 달성이 목표이며, 현재 7000만 도에서 72초까지 달성했다.
하지만 ITER를 핵융합발전기로 바로 사용할 수는 없다. 실제 발전용 장치를 장착한 핵융합실증로(DEMO·데모)를 지어 검증을 마쳐야 한다. ITER로 핵융합 발전의 가능성이 확인되면 이후 DEMO를 통해 핵융합 반응부터 전기 생산에 이르기까지 핵융합발전소 운영의 전 과정을 실증하는 셈이다.
DEMO는 소비전력 대비 40~50배 높은 전력 생산을 목표로 한다. 즉, 목표 에너지증폭률(Q)이 40~50으로 석탄화력발전소와 비슷하고 ITER(10)보다는 4~5배 높게 설계됐다. 규모는 ITER와 비슷하거나 약간 커질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ITER의 1.5~2배만 돼도 충분히 목표치 이상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 단장은 “규모가 크다고 무조건 전력 생산효율이 높은 것은 아니다”라며 “장치가 너무 크면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이 불필요하게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DEMO는 ITER와 달리 각 회원국이 개별적으로 구축하는 게 기본 계획이다.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2030년대부터 DEMO를 건설해 ITER 운영이 끝나는 2040년경부터 실증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은 ‘제3차 핵융합에너지개발 진흥기본계획(2017~2021년)’에 따라 ‘한국형핵융합실증로(K-DEMO)’ 구축을 위한 장치 설계 등 초기 연구를 하고 있다. 정 단장은 “ITER 운영의 성공 여부에 따라 각국의 DEMO 건설 계획이 결정될 것”이라며 “규모가 큰 만큼 2~3개 인근 국가 단위로 협력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INTERVIEW "LNG도 언젠가는 고갈될 자원"
_버나드 비고_ITER 사무총장
“천연가스도 화석연료처럼 언젠가는 고갈될 자원입니다. 에너지 부족 문제를 지연시킬 순 있겠지만 해결할 순 없을 겁니다.”
버나드 비고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사무총장(사진)은 10월 10일(현지 시간) 프랑스 카다라쉬 ITER 본부에서 열린 ‘2018 ITER 프레스 데이’에서 한국의 에너지전환정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국이 석탄화력 발전소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자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면서도 “신재생에너지나 액화천연가스(LNG)는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말 ‘재생에너지 2030 이행계획’과 이를 반영한 ‘제8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을 확정했다. 현재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석탄화력과 원자력 발전량은 2030년 각각 36.1%와 23.9%로 줄이고, 대신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2017년 6.9%에서 2030년 20%까지 3배가량 확대한다는 게 골자다. LNG의 비중도 16.9%에서 18.8%로 늘어난다.
비고 사무총장은 “전 세계 에너지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석유, 석탄 등 화석연료는 자원 고갈과 환경오염, 기후변화 대응 강화 등으로 더 이상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LNG가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그는 “LNG는 화석연료에 비해 오염물질 배출은 적을지 몰라도 여전히 탄소를 배출한다는 문제가 있다”며 “인류가 화석연료를 사용하며 겪어 왔던 일들을 또 다시 반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재생에너지의 경우 기존 에너지원을 대체하기에는 전력 생산효율이 너무 낮다고도 지적했다.
현재 핵융합에너지는 기술 검증에만 수십 년 이상 걸려 언제 완성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1억~2억5000만 도의 초고온 플라스마 상태를 안정적으로 수백 초 유지해야 한다는 기술적 난관이 불안감의 가장 큰 요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중국 등이 ITER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핵융합에너지의 가능성 때문이다.
핵융합에너지는 지구에 풍부한 수소를 연료로 활용한다. 중수소(D) 1g과 삼중수소(T) 1.5g이면 석탄 20t과 맞먹는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중수소는 지구 표면의 70%를 덮고 있는 바닷물에서 무한히 얻을 수 있다. 온실가스나 이산화황 등 대기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고, 원전과 달리 고준위 방사성 핵폐기물도 발생하지 않는다.
비고 사무총장은 “핵융합에너지가 아니더라도 미래를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대체 에너지 개발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2050년대에 누군가 반드시 핵융합에너지를 상용화 할 것이라고 믿는다”며 “핵융합에너지도 미래 에너지의 주요 선택지 중 하나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