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과학자들은 인간의 몸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를 모으면 절반 이상이 미생물 세포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종류로 따지면 무려 99%가 미생물 유전자인데요. 그만큼 인간의 생존에 미생물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미생물의 97.4% 이상은 대부분 장에 존재합니다. 이들을 ‘장내미생물(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이라고 부릅니다.
그간 과학자들은 장내미생물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해왔습니다. 장내미생물 연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요. 장내미생물이 인간의 면역계 와 중추신경계에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인간의 외형이나 특성 등 각종 표현형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입니다. 오늘 소개할 논문은 마지막 연구주제인, 장내미생물이 인간의 표현형을 결정하는 현상을 처음으로 입증한 논문입니다.
미생물은 병 옮기는 병원균?
미생물이 실험동물이나 사람의 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과학적으로 제시한 최초의 연구는 1905년 탄저균, 결핵균 등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학상을 받은 로버트 코흐 박사의 연구였습니다. 독일의 시골 의사였던 코흐 박사는 4년간 사람 528명과 가축 5만 6000마리가 탄저병으로 사망하자, 탄저병의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의 연구에서 감염된 가축의 피 속에 막대기 모양의 미생물이 존재한다는 점이 확인됐고, 감염된 가축의 피를 다른 가축에게 주입하면 피부에 반점이 생기다가 사망에 이르며, 다른 가축에 질병이 옮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병은 나중에 탄저병으로 밝혀졌죠.
코흐 박사는 미생물과 질병과의 관계를 파악하기위해 막대기 모양의 미생물을 배양했고, 실험용 쥐에게 접종 실험을 반복했습니다. 접종한 쥐가 사망하고 사망한 쥐의 혈액에서 동일한 형태의 미생물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수십 차례에 걸쳐 확인한 결과, 그는 미생물(탄저균)과 질병(탄저병)의 인과관계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 연구를 계기로 한동안 미생물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병원균에 국한돼 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도 미생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한 연구도 있었습니다. 생물학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권위자였던 미국의 생물학자 테오도르 로즈버리 박사는 1969년 발표한 ‘인간 위의 생태계(Life on Man)’이라는 책에서 미생물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인체에 사는 미생물을 죽이려는 시도는 대체로 잘못된 것이다. 세균이 모두 더럽고 우리를 공격한다는 믿음은 우리를 해칠 수 있다.”
이처럼 로즈버리 박사를 포함해 일부 미생물학자들은 미생물이 아무 기능 없는 몸 속 거주자가 아니라 어떤 중요한 기능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시대를 지배하던 미생물에 대한 편견, 즉 미생물이 병을 옮기는 병원균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킬 만큼 획기적인 연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 계기로 미생물 인식 바뀌어
미생물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과학자들은 인간의 유전체 지도를 작성하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를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 기술은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되죠.
2001년 2월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결과가 발표되자, 미생물학자들은 인간의 미생물군을 대상으로
유전체 분석 사업을 시작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2000년 미국미생물학회장을 역임했던 줄리안 데이비스 박사는 2001년 3월 국제 학술지 ‘ 사이언스 ’에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우리는 인간 유전체에 각인된 3만 개의 유전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인간의 생명에는 그 외에도 200만~400만 개의 유전자가 더 사용된다. (중략) 인체에 상주하는 미생물과의 협동 관계를 밝혀내기 전까지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는 불완전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내 미생물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프리 고든 미국 워싱턴대 의대 교수는 무균 쥐를 대상으로 장내미생물과 장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고든 교수는 비만에 관련된 장내미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2005년 그는 굶주림을 억제하는 호르몬인 렙틴이 사라져, 정상 쥐에 비해 체중이 4배 가량 많이 나가는 유전자 변형 쥐와 정상 쥐의 장내미생물을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유전자 변형 쥐에서 피르미쿠테스(firmicutes) 문 세균의 비율이 높고, 박테로이데테스(bacteroidetes) 문 세균의 비율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장내미생물이 인체 비만 유발 최초 확인
연구팀은 이 연구 결과를 놓고, 소위 ‘비만 미생물’들이 비만의 결과인지, 아니면 비만의 원인인지 고민했습니다. 연구팀은 비만 쥐와 정상 쥐의 장내미생물의 유전자를 해독했습니다. 그 결과 녹말, 설탕, 갈락토오스 등 당을 분해하는 데 관여하는 유전자들이 비만 쥐의 장내미생물에 더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연구팀은 이를 토대로 비만 쥐의 장내미생물이 음식물로부터 더 많은 에너지를 흡수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비만 쥐의 분변에 포함된 열량이 정상 쥐 보다 더 적다는 점을 이 가설의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같은 양의 음식을 먹었는데, 분변의 열량이 더 적다는 것은 그만큼 체내에 많은 열량이 흡수됐다는 의미이니까요.
연구팀은 장내미생물이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무균 쥐를 두 그룹으로 나눈 뒤, 한쪽에는 비만 쥐의 장내미생물을, 다른 쪽에는 정상 쥐의 장내미생물을 주입했습니다. 실험 시작 당시 두 그룹에서 쥐의 체지방량과 초기 체중은 동일했고, 사료 섭취량도 동일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주 뒤 비만 쥐의 장내미생물을 주입한 그룹에서 체지방 증가량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로 동물이나 사람 자체의 유전자나 습관뿐 아니라 장내미생물 역시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습니다. 이 연구결과는 2006년 12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됐습니다.
코흐 박사의 실험이 특정한 병원균의 침입이 질환의 원인이 된다는 점을 증명한 연구였다면, 고든 교수의 실험은 인체에 공생하는 미생물의 생태계 변화가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밝혀낸 기념비적인 연구 입니다.
또 무균 실험동물에 미생물을 이식해 미생물의 역할을 입증한 연구 방법 또한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접근법이었죠. 실험 동물의 미생물 유전자를 분석한 것도 최초였고요.
연구가 발표된 이후 인체 장내미생물 프로젝트가 10년간 진행됐습니다. 이 결과를 토대로 장내미생물이 인간의 대사질환, 장염, 1형 당뇨, 대장암, 심장병 등 다양한 질병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나아가 건강한 장내미생물을 이식하는 치료 방법도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약물에 대한 인체 반응과 미생물의 연관성이 밝혀지면서 장내미생물의 차이를 이용한 맞춤의학까지 그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기현_kihyunee@gmail.com
서울대 세균학 및 생물정보학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뒤, 현재 중앙대 시스템미생물학연구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항생제 내성 세균의 유전체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