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정원이 65명입니다. 웬만한 단과대학보다도 큰 규모죠. 반도체, 통신, 컴퓨터공학 등 교수마다 연구 분야가 다양한 만큼 학생들의 진로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게 장점입니다.”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학부장을 맡고 있는 이병호 교수는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전기·정보공학부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 그 힘은 65명의 전임교수진에서 나온다. 전기·정보공학부는 서울대 공대 내에서 단일 학부 기준으로 교수가 가장 많다.
65명의 교수진은 반도체와 통신, 제어, 전자물리, 컴퓨터, 전기에너지시스템, 그리고 최근 뜨고 있는 바이오 전자공학까지 크게는 총 7개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22개 분야까지 나뉜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자율주행자동차 등의 연구 분야가 모두 포함된다.
이병호 학부장은 “전기·정보공학부에 입학한 학생들은 다양한 연구를 하는 교수진에게 배우면서 자신의 흥미와 강점에 맞춰 향후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교수진 AI, 자율주행차 등 22개 분야 연구
전기·정보공학부의 교수진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정평이나 있다. 이병호 학부장은 전자물리 분야 전문가다. 그 중에서도 광학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힌다. 3D 증강현실 안경과 홀로그램 연구에서는 독보적이다.
윤성로 교수팀은 최근 생명과학계의 ‘핫이슈’인 유전자 가위의 효율을 인공지능으로 예측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의사이기도 한 서종모 교수는 인공망막 분야에서 선도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이종호 교수는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에 쓰이는 3차원 반도체(벌크 핀펫)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주인공이다. 이 교수는 이 기술로 인텔 등 굴지의 글로벌 IT기업에서 기술료를 받고 있다.
정덕균 교수는 디지털회로 설계 분야의 권위자로, 고화질의 영상을 손상 없이 고속으로 전송하는 디지털 비디오 전송방식(DVI)을 개발해 국제 표준으로 인정받았다. 정 교수팀이 DVI를 발전시켜 개발한 고선명 멀티미디어 인터페이스(HDMI)는 현재 대부분의 디스플레이에 표준 인터페이스로 사용되고 있다.
차상균 교수는 독일의 소프트웨어 기업 SAP가 시가총액 기준 독일 최고 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차 교수팀이 개발한 데이터 분석 기술 ‘하나(HANA)’의 가치를 알아본 SAP가 이 기술을 이전받은 뒤 세계시장을 석권한 것이 원동력이었다. 하나는 데이터베이스(DB)를 하드디스크에 저장한 뒤 분석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메모리에서 저장과 분석을 동시에 진행해 데이터 분석 효율을 극대화한 기술이다. 이병호 학부장은 “국내 기업이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 해외에 이전할 수밖에 없었던 기술”이라며 “학부 내 여러 교수들이 자체 개발한 기술로 벤처를 설립하는 등 창업도 활발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바이오 전자공학 분야 전문가인 권성훈 교수는 자체 개발한 기술로 회사를 창업했다. 이 기술은 환자 맞춤형 항생제를 신속하게 찾아주는 게 핵심이다. 항생제 내성이 보건의료계의 큰 문제로 떠오른 가운데 이 기술은 항생제 오남용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현재 환자에게 적합한 항생제를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은 3~4일 정도인데, 권 교수팀이 보유한 기술로는 20시간이면 충분하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준이다.
교육 프로그램 글로벌 기업에서 인턴십
전기·정보공학부는 학생들에게 충분히 진로를 탐색할 수 있는 기회도 폭넓게 제공하고 있다. 신입생들은 1학년 2학기에 개설되는 ‘창의공학설계’라는 수업에서 아두이노 보드를 이용해 다양한 장치를 만드는 기회를 갖는다. 원하는 학생들은 ‘해동아이디어팩토리’에서 3D프린터로 원하는 디자인의 모형을 직접 만들 수도 있다.
학부 고학년에게는 국내외 산업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인턴십 기회도 충분히 제공한다. 3학점 강의인 ‘공학지식의 실무응용’을 수강하면 삼성전자, LG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굴지의 전자기업에서 6주간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산업 현장에서 실제로 어떤 연구를 진행하며, 현장이 요구하는 역량이 무엇인지 경험하면서 자신의 진로 설계에 도움을 받을 있다.
대학원생의 경우 자신의 연구 분야에 따라 방학 기간 중 글로벌 기업에서 인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이병호 학부장의 제자는 컴퓨터용 그래픽 처리 장치를 개발하는 글로벌 기업 엔비디아(NVIDIA)에서 인턴을 한 뒤 취업까지 했다. 다른 연구실의 연구원 중에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인턴을 한 경우도 있다.
이병호 학부장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등에서 전기·정보공학부 대학원 졸업자들을 채용하는 등 글로벌 기업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라며 “전기·정보공학부에서 학업을 마칠 경우 굳이 유학을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진로 지원 심리상담사와 선배 ‘튜터’의 전폭 지원
서울대는 학업 역량에서 국내 최고의 학생들이 진학하는 만큼 내부 경쟁이 치열하다. 고등학교에서 1등만 하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한 뒤 그간 경험해 보지 못한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경우가 꽤 많다.
전기·정보공학부는 학생들이 심리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국내 최초로 심리상담사가 학부생들을 전담해서 상담해 주는 학생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면밀히 관찰해 먼저 손을 내밀어 돕는다. 또 교과목별로 성적이 좋은 선배가 후배들을 가르치는 ‘튜터 제도’도 시행하고 있다. 튜터에게는 장학금이 지급된다.
이런 제도 덕분에 전기·정보공학부 입학 뒤에는 교육의 측면에서 대학 교과목을 선행한 영재고나 과학고 등 특목고 졸업생과 그렇지 않은 일반고 졸업생 사이의 차이가 사실상 없다. 이병호 학부장은 “교수들이 선행학습을 전제하지 않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친다”고 말했다.
인재상 소통하며 협업하는 연구자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가 원하는 인재상은 뭘까. 이병호학 부장은 “수학과 물리 분야의 기초가 튼튼한 학생들을 원한다”고 말했다.
수학과 물리는 전자공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인 만큼 매우 중요하다. 서울대 공대 입시에서 수학 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지원자 대부분이 수학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물리의 경우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전공 공부에서 기초가 되는 학문이어서 물리의 기초를 탄탄히 쌓는 게 중요하다.
이병호 학부장은 “바른 인성을 갖추는 일도 중요하다”며 “비록 입시에서 인성을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수학과 물리 실력만큼이나 인성이 좋은 학생이 입학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의 목표가 사회에 도움을 주는 리더를 길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문적인 부분에서 연구만 잘 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지금은 연구자들에게도 인성이 필수 덕목이라고 이병호 학부장은 강조했다. 단독으로 연구할 수 있는 주제가 거의 없고 협력, 융합 연구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동 연구자들이 서로 자신의 생각만 내세우거나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자신의 공로만 강조하다 보면 장기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이병호 학부장은 “의견을 조율하면서 협업할 수 있는 소통 능력이 연구자에게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언 자신의 흥미를 따라가라
이병호 학부장은 제자이자 후배들에게 “자신의 흥미에 따라서 오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그저 유행을 따라 진로와 직업을 선택하다 보면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병호 학부장 본인이 그랬다. 부모님은 의대 진학을 바랐지만 본인은 순수 학문인 물리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물리와 가까운 전자공학을 택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회로 설계를 배우면 잘 나갈 수 있다”는 교수님의 조언을 듣고 회로설계로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유학을 가면서 본래 가졌던 흥미에 따라 광학 분야로 방향을 바꿨다.
그때도 주변 동료들이 “왜 연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회로설계를 택하지 않았느냐”며 “잘못된 선택”이라고 만류 했다고. 하지만 이 학부장은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해 결국 광학 분야의 석학으로 꿈을 이뤘다. 이 학부장은 “부모님의 바람이나 남들이 말하는 직업의 안정성보다는 자신의 적성을 잘 살피면서 장기적으로 보고 진로를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