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피를 보내기 위해 열심히 심장을 움직이는 심장근육은 어떻게 생겼을까. 구불구불한 뇌 주름은 어떤 모양일까. 의학 지식을 설명하는 데 그림이 없다면 설명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난감할 것이다. 하물며 혈관의 생김새나 이름, 장기 부위별 크기와 움직임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의학 지식을 다루는 책이나 논문이라면 어떨까. 아무리 이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그림이 없다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지난 해 12월 초, 인천 연수구에 자리 잡은 인천가톨릭대 조형예술대학을 찾았다. 2016년 조형예술대학에는 아시아 최초로 ‘메디컬 일러스트(medical illustration)’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바이오메디컬아트 석사과정이 개설됐다. 이 과정을 이끄는 윤관현 교수와 2018년 1월 석사학위를 받은 1기 졸업생 4명을 만났다. 윤 교수는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의대에서 해부 및 세포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윤 교수는 “메디컬 일러스트는 의학적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사실에 기반해 그리는 그림”이라며 “의학 지식을 활용하는 의약계나 의료산업계는 물론, 건강 관련 지식을 쉽게 이해하려는 일반인에게도 유용하다”고 설명했다.
형태로 달려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과정을 필수로 거친다. 채수현 씨는 “인체 장기를 직접 보는 일이 두렵기도 했지만, 내부 구조를 직접 볼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며 “이전까지 그림으로 봤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고 회상했다.
메디컬 일러스트 한 점을 그리는 데에는 아무리 간단한 그림도 최소 3시간 이상 걸린다. 내용에 따라 한 달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어 경각을 다투는 수술실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스케치를 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수술실에서는 주로 연필을 이용해 초벌 스케치를 하고, 이후 ‘일러스트레이터’ ‘포토샵’ 등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색이나 명암, 질감 등을 실제와 비슷하게 그린다.
김나리 씨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작업할 때에도 붓에 물감을 묻혀 종이나 천에 그리듯 ‘브러시’ 기능을 이용해 색을 입힌다”며 “이미 칠한 부분을 지우거나 다시 생성하는 기능이 자유로운 만큼 작업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3차원, 증강현실 접목 시도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메디컬 일러스트가 생소하다. 국내 작가들이 그리는 일러스트는 대부분 어린이용 동화책에 쓰이며, 전문적인 메디컬 일러스트는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의학 분야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작가가 거의 없고, 일러스트 저작권에 대한 법률도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 작가가 의학적 지식을 충분히 이해해 세밀화로 표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도 걸림돌이다. 윤 교수는 “국내 메디컬 일러스트가 발전하고 시장이 커지려면, 하나의 전문 분야로 저작권이나 작업 환경에 대해 이해하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메디컬 일러스트가 발전한 나라는 미국과 일본이다. 의대로 유명한 미국 존스홉킨스대는 메디컬 일러스트의 필요성을 느껴 1950년대 세계 최초로 이 분야 전문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캐나다 토론토대, 미국 일리노이대, 조지아대에도 메디컬 일러스트 학과가 개설되면서 일러스트 스타일이 다양해졌고 활용 분야가 넓어졌다.
초기에 메디컬 일러스트는 의학 서적이나 연구 논문 등 전문적인 콘텐츠에 집중됐다. 하지만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발달하면서 표현 기법과 대상이 넓어졌다. 최근에는 3차원 기술을 접목해 실제와 흡사한 입체 구조를 표현하고, 증강현실(AR)을 활용해 어린이나 의대생을 위한 해부학 교육 자료도 개발됐다. ‘Human Anatomy Atlas 2018’ ‘Complete Anatomy’ 등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도 나와 있다.
윤 교수는 “미국, 일본 등과 비교해 한국은 메디컬 일러스트에서 후발주자”라며 “3차원 기술이나 증강현실 등을 활용해 의대생이나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러스트를 제작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학 서적을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에서 10여 년간 의학 일러스트를 꾸준히 그려온 오제훈 씨는 “새 학기부터 연세대 의대에서 해부학을 공부해 앞으로 더욱 심도 있는 일러스트를 그릴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