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아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세포 자멸(apoptosis)’ 현상은 언뜻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열심히 만들어 놓은 세포가 스스로 죽는다니요. 사실 우리 몸의 세포가 죽는 과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상처 등으로 세포가 손상되는 경우, 세포내 소기관들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세포막이 손실되면서 세포가 파열됩니다. 이를 ‘세포 괴사(necrosis)’라고 합니다. 세포의 수동적인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와 다르게 세포 자멸은 제 기능을 하지 못 하거나 발달 과정에서 더 이상 필요 없는 세포가 직접 죽음 기작을 작동시킵니다. 세포가 쭈글쭈글하게 줄어들면서 세포핵이 작아지고, 결국 우리 몸의 면역 세포가 이것을 잡아먹어 버립니다.
세포 자멸 주도하는 카스파제 단백질
이런 세포의 자멸 기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백질은 ‘카스파제(caspase)’입니다. 평소에는 비활성화 상태로 세포에 존재합니다. 그러다 세포의 자멸 신호를 받으면 카스파제의 일부가 잘려나가면서 활성을 띱니다. 활성화된 카스파제는 세포 내 여러 단백질들을 분해하고 결국 세포를 죽게 만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세포 자멸은 세포가 예정된 죽 음 을 맞는 ‘세포 예정사(programmed cell death)’와 완전히 같은 말이 아닙니다. 세포 자멸은 세포 예정사의 한 종류일 뿐, 최근에는 카스파제 없이도 발달 과정 중에 세포가 죽는 경우가 발견됐고, 이를 카스파제에 의존하지 않는 세포 예정사로 분류합니다.
발달 과정에서 세포 자멸 현상은 아주 흔히 일어납니다. 배아의 손에 있는 물갈퀴 세포를 비롯해 올챙이 꼬리 역시 세포 자멸을 통해 없어 집니다(아래 그림 ➊,➋). 또 심장 발달 과정에서도 세포 자멸이 일어납니다. 심장은 원래 하나의 튜브에서 시작해 두개의 심방(좌심방, 우심방)과 두개의 심실(좌심실, 우심실)을 만들어 냅니다. 이때 세포 자멸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완벽하게 따로 떨어진 심방과 심실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심장 외에도 세포 자멸이 꼭 필요한 기관 중 하나가 바로 뇌입니다. 신경세포는 다른 신경세포들로부터 자극을 받고 전달하기 위해 짧은 수상돌기(dendrites)와 긴 축삭돌기(axon)를 뻗어내는데요. 발달 과정 중에 필요 이상으로 많이 생기기 때문에 이를 가지를 치듯 잘라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 세포 자멸 기작이 작동합니다.
기관이나 조직을 형성하는 것 외에도 세포 자멸 기작이 하는 일은 다양합니다. 다른 세포들에 비해 느리게 분열하거나 약한 세포들은 자멸함으로써 배아 전체의 적합성( tness)을 강화하기도 합니다(아래 그림 ➌).
중요한 자멸 기작, 이중으로 보안
이쯤 되면 세포 자멸이 배아 발달 과정에 꼭 필요한 기작이라는 생각이 들죠? 과학자들은 직접 실험을 해봤습니다. 여러 모델 생물에서 세포 자멸에 필요한 유전자를 제거한 뒤 어떻게 발달하는지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쥐의 배아는 유전자를 없앤 뒤에도 온전히 발달해 성체로 자랐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요?
과학자들은 기작의 ‘중복성’으로 결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포 자멸이 워낙 중요한 기작이다보니 유전자 변이 등으로 한 요소가 제 기능을 못할 경우, 이를 대체할 수 있도록 여러 종류의 카스파제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더불어 카스파제 단백질을 활성화 시키는 데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최영은_yc709@georgetown.edu
미국 바드대에서 생물을 전공하고 하버드대에서 발생학 및 재생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외우는 과학이 아닌 질문하는 과학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과학교육에 발을 담그게 됐다. 현재 미국 조지타운대 생물학부에서 유전학, 발생학 등을 가르치며 새로운 대학 과학교육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생물학에서는 유전자 또는 기작이 내는 효과를 크게 둘로 분류합니다. 기준은 그것이 세포의 자율적인 효과(cell autonomous effect)인가, 비자율적인 효과(cell non-autonomous e ect)인가죠. 예를 들어 볼게요. 세포 A에 유전자 X가 발현돼 그 결과로 세포 A가 특정한 형질을 보이는 경우 이것은 세포의 자율적인 효과입니다. 유전자 발현의 효과가 세포 A 내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포 A에서 유전자 Y가 발현됐는데 이웃 세포 B의 형질이 변한 경우, 세포 B는 유전자 Y의 세포 비자율적 효과를 받은 셈이 됩니다. 이처럼 유전자가 발현되는 세포와 그 영향을 받는 세포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세포 비자율적 효과를 갖는 유전자나 기작들은 대부분 세포 밖으로 분비되는 단백질을 만들어 내고, 이것의 수용체를 갖고 있는 주변 다른 세포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멸하는 세포가 남긴 메시지
그렇다면 세포 자멸 기작은 세포의 자율적 효과일까요, 비자율적 효과일까요? 자멸 기작이 작동된 세포는 결국 죽기 때문에 쉽게 자율적 효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면서 세포의 자멸 기작이 다른 세포에 미치는 비자율적인 효과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과학자들은 초파리를 이용해 실험을 했습니다. 발달 과정에서 자멸될 예정인 세포 안에 카스파제(caspase) 단백질을 억제하는 단백질을 대량 발현시켜 죽지 못하도록 한 겁니다. 이 때문에 세포들은 자신들이 자멸할 것을 알고, 자멸 기작을 계속 작동시키면서도 유전자 변이로 인해 죽지 못했습니다.
이 실험에서 과학자들은 완전히 죽지 않은 세포(undead cells)의 주변 세포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완전히 죽지않은 세포가 세포 분열을 지시하는 단백질을 만들어 분비했고, 이에 주변 세포들이 반응해 분열을 거듭했던 겁니다.
실제로 발달 중인 초파리에 방사능을 쪼이면 많은 세포에서 세포 자멸 기작이 작동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파리는 정상적인 크기와 모양을 갖춘 성충으로 자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사능의 영향을 받은 세포들이 자멸하면서 주변 세포의 세포 분열을 유도했고, 그 결과 새로 분열된 정상 세포들이 자멸한 세포들의 빈자리를 채운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위 그림 ➊).
암과 세포 자멸의 이상한 연결 고리
이런 현상이 단지 초파리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속의 간(肝)은 놀라운 재생 능력을 가졌는데요. 일부를 잘라냈을 때 잘린 부분의 세포들이 자멸하면서 동시에 주변 세포들의 분열을 돕는 단백질을 분비하기 때문입니다. 카스파제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긴 쥐를 보면 간의 재생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죠.doi:10.1136/gut.2009.204354
세포가 무작위로 증식하는 병인 암(癌)도 세포 자멸의 비자율적 효과와 관련이 있습니다. 암의 높은 사망률과 세포 자멸의 상관관계는 오래 전부터 관찰이 돼왔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세포들이 알아서 자멸하는데, 동시에 다른 세포들은 무작위로 증식한다는 게 이상했으니까요.
하지만 앞서 언급한 연구결과를 보면 이 이상한 연결 고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멸하는 세포가 주변 세포의 증식을 돕기 때문에 자멸하는 세포들이 많을수록 암세포 증식이 더 활발한 거죠. 최근에는 항암 치료로 인해 자멸하는 세포가 주변의 세포 분열을 유도하는 단백질을 덜 생산하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doi:10.1038/nm.2385
세포 자멸의 비자율적 효과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세포 자멸은 다른 세포의 자멸을 유도하기도 합니다(위 그림 ➋). 배아가 발달하는 과정이나, 약한 세포의 수를 줄이는 과정에서는 세포 자멸 현상이 산발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몸 전체에서 한꺼번에 일어납니다. 세포 자멸이 유도됐기 때문입니다.
생명체를 온전하게 발달시키기 위해, 태어난 환경에 더 잘 적응시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세포들을 보고 있자니 짠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