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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량자고(懸梁刺股).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며 글을 읽었다는 중국의 성어다. 졸음을 쫓아가며 학업에 매진하는 열정을 뜻한다. 한국 토박이인 필자가 ‘제2의 인생’을 펼칠 장소로 중국을 선택한 것은 중국 젊은 과학자들의 현량자고 정신에 반했기 때문이다.

 

업무 차 처음 중국을 방문한 건 2011년이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비휘발성메모리기술 심포지엄(NVTMS)’에 초청돼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필자에게 중국의 이미지는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나라, 싼 제품을 만드는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는 나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술적으로도 한국보다 한참 뒤떨어진 나라라고 생각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내로라하는 기술 선진국에서 열렸던 학회들과 달리 2011년이 돼서야 중국에서 개최한 학회에 참석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심포지엄 참가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바꾼 계기가 됐다. 가장 놀라웠던 건 학회에 참석한 젊은 중국 과학기술자들의 태도였다.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자세로 강연에 집중하고, 강연을 마친 연사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타국에서 온 과학자에게 함께 사진 찍을 것을 청하는 등 ‘아이돌급 대우’를 해줬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과거의 향수를 자극했다. 젊은이들이 과학기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를 통해 자신의 비전을 세우고 노력하는 모습은 경제 발전기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일본의 기술자들이 한국에서 일하며 성장을 도왔던 것처럼, 현역에서 은퇴한 뒤 중국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내 미래의 모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 2018년 현재 베이징에 위치한 칭화대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계기다.

 

 

필자는 연세대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92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에 입사했다. 지금 보면 드라마 ‘응답하라’의 향수를 자극하는 옛날 기술이지만, 당시 국내 과학계의 도약은 눈부셨다. 이때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64MB(메가바이트) D램 메모리를 개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국내 메모리반도체 기술이 ‘국제적인 명품’으로 자리매김한 전환점이 되던 때다. 2013년 퇴직할때까지 상변화메모리(P램) 등 무수히 많은 세계 최초의 신(新) 메모리 제품을 개발했다. 입사 당시 2만 원 대였던 삼성전자의 주식은 퇴직할 때 150만 원 정도로, 75배 이상 훌쩍 뛰며 세월의 변화를 실감하게 했다. 8비트 컴퓨터 개발에 박수를 보내던 세상이 빅데이터, 슈퍼컴퓨터, 인공지능(AI)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이 됐다.

 

 

멤리스터 연구해 AI 칩 개발
필자는 칭화대 전자공학과 교수이자 인공지능센터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20여 년간 산업계 연구자로 일하며 과학적 원리나 이론보다는 실질적 제품 개발에 주력해왔다. 세계 1위의 기술력을 갖춘 프로젝트팀을 이끌었지만, 마음속엔 ‘진정으로 1등인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제품 개발에선 최고였지만, 그 근간이 되는 메커니즘이나 핵심 원리는 항상 유럽, 미국 등 해외 연구진의 몫이었다. 퇴직과 함께 마음 한 구석에 담아뒀던 연구에 대한 깊은 열망을 꺼냈다.

 

칭화대 인공지능센터는 생명과학, 컴퓨터공학, 반도체공학, 재료공학 등 7개 학과 교수들로 구성된 융합 연구센터다. 삼성전자에서 개발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메모리는 ‘멤리스터(이전의 상태를 모두 기억하는 메모리 소자)’의 일종이다. 멤리스터는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의 기능과 전류의 흐름을 조절하는 트랜지스터의 기능을 모두 갖춘 소자다.

 

최근엔 멤리스터가 AI의 기능을 구현하기 유리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다시 각광받고 있다. 멤리스터의 동작이 마치 인간의 뉴런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뉴런은 주어진 자극에 따라 다른 뉴런과 신호를 주고 받는다. 멤리스터끼리 연결해 전류를 보낼 수 있게 하면 뉴런과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 사물을 인식하고, 사물의 패턴을 찾아내 분별하는 AI의 업무가 가능해진다. 여기서도 필자는 멤리스터를 이용한 AI 소자 전문가로서 칭화대가 개발 중인 AI 칩인 ‘톈디(天地)’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현량자고 정신 때문일까. 6년이 흐른 지금 중국은 상하이에서 학회를 참석했던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진보를 이뤘다. 반도체를 제외한 상당수의 첨단 기술은 한국과 동일한 수준이거나 더 앞선다. 시장이 광대한데다 중국 정부가 새로운 산업을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과학자들에겐 중국이 기회의 땅이다. 가령, 한국은 인터넷 속도에선 최고지만 활용도는 중국에 뒤처진다. 이미 중국은 인터넷 기반 공유 경제와 이를 이용한 택시(DiDi), 공용자전거(ofo), 상거래 및 모바일 금융 등이 활성화됐다.

 

 

 

 

칭화대는 과학기술분야 중국 최고의 대학이다. 국제 사회에서의 명성과 영향력도 갖췄다. 중국의 빠른 발전을 이끈 핵심 기술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칭화대를 포함해 중국 과학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한중일 세 나라는 수천 년에 거쳐 이웃이자 애증의 관계를 형성해왔다. 앞으로도 경쟁과 협력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숙명 속에 중국의 과학기술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조심스러운 건 사실이다. 그래도 이곳 베이징에서 보고 들은 일들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연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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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정홍식 칭화대 전자공학과 교수
  • 기타

    [일러스트] 한성원
  • 에디터

    권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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