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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0월 부산에서 에이즈의 원인인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에 감염된 사실을 숨기고 성매매를 한 여성과 이를 알선한 남성이 체포됐다. ‘부산 에이즈 성매매 사건’으로 알려지며 온 나라가 들썩였다. 뜻밖에도 온라인 쇼핑몰에서 HIV 자가 검사 키트의 판매량이 급증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위험한 성관계를 갖고 있으며, HIV와 에이즈에 대해 추상적인 공포심을 갖고 있음을 시사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최근 의학의 발달로 HIV에 감염돼도 평생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이제는 HIV 감염을 예방하는 시대가 됐다.

 

 

에이즈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HIV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즉 에이즈를 동일시하는 데서 온다.

 

HIV는 몸 안에 들어와 면역세포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다. 감염 초기 면역체계가 파괴되지 않아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경우 ‘HIV 감염인’에 해당한다. 시간이 흘러 혈액 1mm3당 면역세포(CD4+ T세포) 수가 200개 미만이 되거나, 면역이 약해진 기회를 틈타 합병증이 생기면 ‘에이즈 환자’라고 분류한다.

 

항레트로바이러스제 치료했더니 커플 내 감염 ‘0’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HIV 감염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HIV 자체가 매우 약한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HIV는 공기나 물속에서 금방 활동성을 잃는다. 특히 수돗물이나 수영장 물 속에는 소독용 염소가 들어있기 때문에 HIV가 금방 죽는다. 일상생활에서는 감염되지 않는 셈이다.

 

HIV의 주요 전파 경로인 성접촉도 1회 노출시 감염 확률은 그리 크지 않다. 질 성교를 1회 했을 때 HIV가 옮을 확률은 0.01~0.1% 정도다. 물론 항문 성교 같은 소위 ‘고위험 성행위’는 감염 확률이 1.38%까지 높아진다. 수혈은 1회 노출시 감염 확률이 92.5%에 달하지만, 질병관리본부 통계에 따르면 혈액제제로 인한 감염은 1995년, 수혈로 인한 감염은 2006년 이후로 보고사례가 없다.

 

최준용 세브란스병원 감염내과 교수(에이즈연구소장)는 “최근엔 HIV에 감염되더라도 면역결핍, 즉 에이즈로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했다. HIV의 증식을 막는 약이 지금까지 30종 이상 개발됐고, 1990년대 약을 섞어 먹는 소위 ‘칵테일 요법’(고강도 항레트로 바이러스치료)이 도입돼 체내 HIV 수치를 아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한 채 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HIV에 감염되면 죽는다’는 건 그야말로 30년 전 얘기일 뿐이다.

 

심지어 항바이러스제를 꾸준히 먹어서 HIV 수치가 미미한 감염인은 콘돔 없이 성관계를 해도 비감염인에게 HIV를 옮기지 않는다고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9월 27일 공식 발표했다. 이 발표의 근거가 된 대표적인 연구가 지난해 미국의학협회지(JAMA)에 실렸다.

 

앨리슨 로저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감염및공중 보건연구부 박사를 비롯한 국제 공동 연구팀은 한 명만 HIV 감염인인 커플 1166쌍을 등록해 2010년 9월부터 2014년 5월까지 관찰했다. 추적 관찰 기간 동안 감염인은 처방대로 약을 잘 복용해 체내 HIV 수치가 미미하게 유지됐다. 이 기간 동안 여러 커플이 콘돔 없는 성관계를 여러 번 했다고 응답했다.

 

그 결과 비감염자였던 11명이 새롭게 HIV에 감염됐는데, 바이러스의 염기서열을 비교 분석한 결과 각자의 파트너로부터 옮은 게 아니었다. 즉, 커플 내HIV 전파는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doi:10.1001/jama.2016.5148).

 

최 교수는 “HIV 감염자도 아이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의학이 발전했다”면서도 “항바이러스제를 잘 먹어도 정액에서 HIV가 발견되므로, 성관계 시 콘돔을 사용하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고 말했다.

 

치료약 미리 먹어 HIV 감염 예방
최근에는 HIV 치료약이 ‘예방약’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HIV에 감염되지 않은 고위험군에게 감염 예방을 목적으로 HIV 치료제를 처방하는 것이다. 이를 노출 전 예방 요법(PrEP·pre-exposure prophylaxis), 일명 ‘프렙’이라고 부른다.

 

2010년 대규모 임상시험을 통해 HIV 치료를 위해 쓰는 항레트로바이러스제가 고위험 성행위자에서 HIV 감염률을 44% 낮춘다는 것이 증명됐다. 그 이후 프렙이 HIV 감염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여러 그룹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입증됐고, 2012년 7월 미국식품의약국(FDA)은 ‘트루바다(Truvada)’라는 HIV 치료약을 프렙 약제로 정식 승인했다.

 

트루바다는 HIV의 ‘역전사효소’를 억제한다. HIV는 숙주 세포에 침입해 자신의 RNA를 DNA로 역전사한 뒤 숙주 세포의 DNA에 끼어 들어가 증식한다. 우리 몸의 세포가 HIV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바뀌는 셈이다. 그런데 역전사효소를 억제하면 HIV가 증식할 수 없게 되고, 비감염인은 결과적으로 HIV에 감염되지 않는다.

 

프렙을 처방할 경우 HIV 감염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인식이 생겨 고위험 성행위가 증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프렙 처방을 많이 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실제 환자들을 대상으로 프렙을 처방하고 성행위를 조사했더니 고위험 성행위가 유의미하게 증가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왔다(doi:10.1007/s10461-015-1055-5).

 

최 교수는 “이런 사실이 최근 여러 연구에서 입증되고 있지만,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며 “한국도 서둘러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5년 세계보건기구(WHO)는 프렙을 전세계 에이즈 예방을 위한 중요 조치 중 하나로 제안하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대한에이즈학회 HIV 노출전 예방요법 지침 제정위원회는 올해 8월 ‘국내 HIV 노출 전 예방요법 권고안’을 발표했다.

 

 

의학의 발전으로 새롭게 HIV에 감염되는 인구는 매년 줄어드는 추세다. 유엔 에이즈합동계획(UNAIDS) 통계에 따르면 새로 신고된 인구는 성인 기준 2016년 170만 명으로 2010년 190만 명보다 11% 줄었다. 특히 유아 및 청소년은 2016년 16만 명으로 2010년 30만 명보다 47% 줄었다. 유병률이 높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국제기구의 치료제 보급 등으로 신규 진단자가 현저히 줄고 있다.

 

감염인 고령화 ‘비에이즈 합병증’ 문제
물론 HIV와 에이즈와 관련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체내 바이러스를 완전히 없애는 치료약이 없다.

 

이유는 ‘잠복감염’이다. 항레트로바이러스제로 혈장에 있는 바이러스를 완전히 없애도 특정 세포들 안에 바이러스가 숨어 있을 수 있다. HIV가 숨어든 세포를 ‘HIV 저장소’라고 부른다. 약을 끊으면 숨어 있던 바이러스가 다시 활동하고, 면역체계가 파괴돼 에이즈로 발전할 수 있다.

 

주로 기억T세포가 HIV 저장소가 된다. 최 교수는 “바이러스가 잠입한 세포가 활발하게 분열하는 등 활성화돼 있어야 세포 표면에 항원이 생기고 체내 면역체계가 이를 인지해 공격할 수 있다”며 “기억T세포는 증식을 활발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항원을 발현하지 않고, 따라서 바이러스가 장기간 남아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현재 많은 연구자들이 HIV 저장소의 특성을 밝히고, HIV가 항레트로바이러스제와 면역반응을 회피하며 잠복감염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자 노력하고 있다. HIV 저장소 재활성화, 유전자치료, 면역치료요법 등 새로운 치료 방법도 개발되고 있다.

 

최근 국내에 에이즈 공포가 확산하면서 HIV 자가 검사 키트의 판매가 급증했다. 구강 점막을 묻혀 시약에 넣으면 HIV 항체가 있는지, 즉 HIV에 감염됐는지 알려준다.

 

 

HIV 감염인이 고령화되면서 에이즈 환자가 아닌데도 합병증 위험이 높아진다는 문제도 있다. HIV로 인해 면역체계가 파괴되면, 정상 면역이었다면 걸리지 않았을 폐포자충 폐렴, 곰팡이 감염, 거대세포 바이러스 감염 등이 생긴다. 이를 ‘에이즈 정의질환’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당뇨병, 고지혈증, 동맥경화, 골다공증, 폐암, 직장암 등도 HIV 비감염인보다 HIV 감염인에서 발병 확률이 높다는 게 최근 드러나고 있다. 이런 질환을 ‘비에이즈 합병증’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을 HIV 감염으로 인한 만성염증을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컨대 HIV에 감염되면 혈액 내 면역수치를 정상으로 유지해도 장에 있는 면역세포는 파괴될 수 있다. 장 점막이 약해지면서 장내 나쁜 세균이 혈액으로 침투하고, 만성염증 상태가 된다. 이로 인해 동맥경화 같은 질환이 악화될 수 있다.

 

김신우 경북대 의학전문대학원 내과학교실 교수는 지난해 대한내과학회지 제90권 제6호에 발표한 ‘HIV 감염자에서 발생하는 비에이즈 합병증’이라는 논문에서 “HIV 감염인이 사망하는 원인으로 에이즈 연관 질환보다 비에이즈 합병증이 4배 더 많다”며 “생활 습관 변화, 약제 변경 등의 조치와, 장기 추적 관찰이 필요하다”고 밝혔다(doi:10.3904/kjm.2016.90.6.487).

 

 

HIV 검사에 대한 인식 바뀌어야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질병관리본부가 올해 8월 발표한 ‘2016년 HIV/AIDS 신고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신고는 1199명으로 2010년 837명에 비해 43.7% 증가했다. 이를 두고 ‘한국만 신규 감염인이 늘고 있다’는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통계를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HIV는 잠복기가 길어서 감염 시점과 진단 시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통계는 정확히 말하면 올해 ‘감염’된 사람이 아니라 올해 ‘진단’된 사람을 의미한다.

 

최 교수는 “한국의 HIV 유병률은 0.02% 미만으로 집계되는데, 실제 유병률은 몇 배 이상일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라며 “감염인 규모가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는 신규 신고 건수가 매년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나라보다 HIV 진단 시점이 늦다는 사실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낙인 때문에 고위험군조차 HIV 검사를 기피하고, 그 결과 면역결핍이 많이 진행된 후에야 진단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조기진단과 조기치료는 환자 개인에게 이득일 뿐만 아니라 성접촉을 통한 HIV 감염 전파를 예방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미국 CDC는 13~64세의 모든 사람은 HIV 검사를 적어도 한번은 받도록, 고위험군은 매년 1회 재검사를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최 교수는 “한국도 HIV에 대한 인식과 제도를 개선해 HIV 검사가 일상화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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