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스쳐 지나간 사람에게서 익숙하면서도 묘한, 은근히 끌리는 향이 난다. 달달한 걸 보니 장미향일까. 살짝 시큼한 걸로 봐선 레몬향도 섞인 것 같다. 어쩌면 예상치 못했던 향이 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꽃이나 과일이 아닌, 동물 냄새 말이다.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향료는 꽃이나 잎, 풀, 열매 등에서 즙을 짜내 추출한 식물성 향료가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종류만 약 1500종이다. 식물은 토양과 물만으로도 재배가 가능해 식물성 향료를 대량 생산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반면 지금까지 발견된 동물성 향료는 다섯 가지뿐이다. 동물은 식물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성장 속도가 매우 느리고 자손의 수도 많지 않아 희귀하다. 그러나 특유의 깊고 풍부한 향기 덕분에 수많은 식물성 향료에 둘러싸여서도 매력을 뽐낸다.
전 세계 5종뿐인 동물성 향료
대부분의 향수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성분인 ‘무스콘(muscone)’은 사실 동물에서 처음 발견된 향 분자다. 다른 향기에 비해 오랫동안 남아 있고, 특유의 매력적인 향 덕분에 수백 년 전부터 사랑받아왔던 ‘머스크(사향)’에 들어 있다.
천연 머스크는 중국 서부와 티베트, 히말라야 산맥에서만 서식하는 사향노루의 ‘은밀한 부위’에서만 나온다. 태어난 지 10년 쯤 된 사향노루 수컷은 교미기가 다가오면 특유의 향을 분비해 짝짓기를 할 암컷을 유인한다. 생식선이 발달하면서 둥근 자루처럼 생긴 생식선낭 안에 빨간 젤리 같은 머스크가 만들어지는데, 여기가 향의 본거지다. 사향노루 한 마리에서 얻을 수 있는 머스크는 30~50g 정도에 불과하다.
‘루왁 커피’로 유명한 사향고양이는 수컷의 항문 근처에 있는 분비선에서 약 9일 간격으로 끈적거리는 분비물을 배출한다. 이것을 희석시키면 머스크와 비슷한듯 다른 ‘영묘향’이 난다. 이 향기는 고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했던 향으로도 유명하다.
비버의 생식선 옆에 있는 선낭에서 얻은 분비물에서 추출한 ‘해리향’, 향유고래가 오징어를 먹고 나서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채 바다에 뱉은 결석에서 얻은 ‘용연향’, 동일한 장소에만 변을 보는 습성이 있는 바위너구리 떼가 수백 년 동안 눈 소변이 굳어 생성된 돌에서 얻는 ‘히라세움’도 동물성 향료다.
분자량 350보다 작아야 냄새로 인식
하지만 동물성 향료의 원료가 처음부터 향기를 풍기는 건 아니다. 갓 잡은 사향노루나 사향고양이, 비버의 은밀한 부위와 분비물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난다. 향유고래의 결석도 여느 동물의 토사물과 마찬가지로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히라세움은 수백 년 동안 썩은 짐승의 오줌이니 외형부터 향기와는 거리가 멀다.
원재료에서 악취를 풍기던 ‘노폐물’이 황금보다 귀한 향료로 바뀌는 비결은 비율에 있다. 원료를 알코올 등 용매에 넣어 수백~수천 분의 1로 희석하는 게 핵심이다. 천연 향료 전문가인 김성문 강원대 환경융합학부 교수는 “원재료를 용매(알코올)에 넣으면 지방이나 단백질, 콜레스테롤처럼 알코올에 녹지 않는 불순물은 걸러지고, 무스콘을 비롯해 향을 내는 유기화합물만 용매에 남는다”고 말했다. 사향고양이 분비물의 경우 시베톤, 인돌, 스카톨, 이소카스토라민, 테트라메틸피라진 등의 유기화합물만 용매에 녹아 남는다.
향을 낼 수 있는 유기화합물에는 탄화수소계 화합물과 알코올, 알데하이드 류, 에테르 류, 아세탈 류, 케톤 류가 있다. 김 교수는 “이 가운데 분자량이 350보다 작은 것만 공기 중에 떠다니면서 코에 냄새로 인식된 다”고 설명했다.
조향사인 최연희 인센트랩 대표는 “향이 나는 유기화합물 중에서도 단 몇 가지 분자가 특유의 향을 만든다”며 “사향노루의 생식선낭에는 0.2% 정도에 불과한 무스콘이 머스크 향을 내고, 향유고래의 토사물에서도 0.3% 가량뿐인 세 종류의 분자가 용연향을 낸다”고 설명했다.
세 종류의 분자는 앰브레인과 앰브로시드, 앰브리놀을 가리킨다. 영묘향의 경우 시베톤이 향을 만드는 핵심 분자다.
무스콘에서 탄소 하나 빼면 시더우드향
현실적으로 향수 제조에 천연 동물성 향료를 쓰긴 쉽지 않다. 동물 한 마리에서 얻을 수 있는 원료가 수~수십 g으로 극소량인 만큼 자칫 인간의 향료 욕심에 동물이 멸종될 수 있다. 그래서 이미 1970년대부터 사향노루와 사향고향이 등 동물에서 향료를 채집하는 일은 야생동물보호법으로 금지돼 있다.
그 대신 전문가들은 화학적으로 분자를 합성해 인공 향을 만들어 향수에 넣는다. 천연 향료에 들어 있는 냄새 분자를 모두 찾아내 100% 동일하게 합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화학자들은 무스콘이나 시베톤 같은 주요 향 분자의 화학구조를 분석해, 그대로 또는 비슷한 구조로 합성한다. 이렇게 합성한 분자에서 원소를 빼거나 더해 새로운 향을 만들기도 한다.
가령 탄소가 14개인 무스콘 분자에서 탄소 하나를 빼면 ‘시더우드(소나무과에 속한 허브)’ 향이 만들어진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머스크의 무스콘 분자, 영묘향을 내는 시베톤과 인돌, 용연향을 내는 앰브리놀과 앰브레인을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머스크는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아 연간 1만t(톤) 이상 생산된다. 지금까지 밝혀진 합성법만 수백 가지, 합성 머스크(무스콘 화합물) 종류만 23종에 이른다.
게다가 합성 머스크는 꽃이나 열매 등 식물성 향료에도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약방의 감초’다. 향수나 화장품, 비누 등에 들어가는 향료에는 합성 머스크가 반드시 0.01% 정도 들어간다. 김 교수는 “머스크는 극미량으로도 풍부한 향을 낼 뿐만 아니라, 다른 향 분자가 공기 중에 날아가지 않도록 잡아두는 보류제 역할도 한다”고 설명했다.
‘가짜 향기’로부터 얻는 이점은 또 있다. 바로 안전성이다. 최 대표는 “천연 향료는 셀 수 없이 많은 성분으로 이뤄진 복합체이므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거나 발암 위험이 높은 성분, 신경 마비 물질 등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있을 수 있다”면서 “이에 비해 합성 향료는 제조 과정에서 유해한 성분을 제외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