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8일 서울대 해양연구소에 한국통신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는 6월 30일 제주 성산포와 일본 본토의 남단을 잇는 한-일-홍콩 국제해저케이블(HJK케이블)의 통신 용도가 폐기되니 혹시 학술적으로 이 케이블을 활용할 가치가 있는가를 타진하는 전화였다. 국가 기간망으로서 역할을 다 마친 해저케이블이 해양측정장치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해양 연구의 어려움과 맛을 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었다.
HJK케이블은 1990년 5월 1일 개통한 이래 국제통신용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최근에 신설한 해저케이블에 본래의 임무를 넘긴 HJK케이블은 해수의 유동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매우 귀중한 장비가 돼 제주도 남쪽의 동중국해를 가로질러 북상하는 바닷물의 이동을 측정할 것이다.
동해뿐만 아니라 황해와 남해 등 한반도 주변의 해양 순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쿠로시오 난류의 일부가 북상하는 통로에 설치된 HJK케이블은 한국의 해양 연구가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설치한 바다 속의 안테나라 할 수 있다.
전자기유도 원리
해저케이블이 어떻게 바닷물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을까? 지구는 남극이 N극, 북극이 S극인 거대한 자석인 까닭에 지구 주변에는 자기장이 형성돼 있다. 나침반이 남북을 가리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 자기장 때문이다. 이 자기장 속에서 바닷물이 해협을 통과할 때 해협의 주변에는 어떤 전기적인 현상이 일어날까?
바닷물은 ${Na}^{+}$, ${K}^{+}$, ${Cl}^{-}$, ${SO₄}^{2-}$ 등 이온들이 일정비율로 녹아있는 도체의 전해질용액이다. 해저케이블과 바닷물은 코일과 같이 전기회로를 형성하고 이 회로가 바닷물의 이동으로 지구의 자기장 속을 움직이면 전기회로에는 마치 발전기처럼 전압이 유도된다. 패러데이 법칙에 따라 유도된 전압은 회로를 통과하는 자기장의 변화에 비례한다. 따라서 시간당 해협을 지나가는 바닷물의 흐름, 즉 물의 양이 변함에 따라 해협의 양쪽에 전압차가 발생한다. 해저케이블을 이용하면 이 유도전압의 측정이 가능한 것이다.
해저통신케이블을 이용한 바닷물 이동량의 측정 가능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발견됐다. 1946년 영국과 미국 간의 해저전화선 복구과정에서 조류에 따라 전자기력이 변화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1949년 영국인 롱궤-히긴스는 이 발견을 토대로 해저케이블의 전압을 측정하면 해협을 통한 바닷물의 이동량을 파악할 수 있다는 내용의 석사논문을 발표했다.
이어서 영국인 보우덴이 1953년 2월부터 1954년 6월까지 도버해협에서 해저 전화케이블을 이용해 측정한 전압에서 해수의 규칙적인 흐름인 조류성분을 확인함으로서 측정전압과 수송량 사이에 비례하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정성적으로 밝혔다.
이후 1956년부터 도버해협에서 해저케이블을 이용한 본격적인 관측이 시작됐다. 특히 미국해양대기청(NOAA)의 태평양해양환경연구소 라센 박사는 북대서양의 주요 해류인 플로리다 해류의 수송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1981년부터 플로리다해협을 가로지르는 해저케이블을 활용해 왔다.
1990년대 들어서는 전세계적으로 해저케이블을 활용한 해류 수송량 측정이 늘어나는 추세다.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는 통신회사 AT&T로부터 양도받아 1990년부터 학술목적으로 하와이와 피지를 연결하는 길이 1만5천여km의 COMPAC케이블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포함해 현재 동태평양 지역 7곳, 카리브해 지역 2곳, 대서양 지역 1곳, 서태평양 및 극동지역 11곳 등 약 20여개 지역에서 해저케이블을 이용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이웃 일본은 현재 괌과 일본 본토를 연결하는 케이블, 대만과 연계해 오키나와-대만을 연결하는 해저케이블, 쓰가루 해협과 러시아와 일본을 연결하는 동해의 해저 케이블, 그리고 대마도와 큐슈 사이의 케이블에서 전압을 측정하고 있다.
대한해협, 케이블과 난류 수송량 측정
우리나라에서도 해저케이블을 활용하는 연구가 1980년대부터 시작됐고, 1990년대 후반부터 부산과 일본 하마다 사이의 대한해협 2백65km를 잇는 국제해저케이블(JKC케이블)을 이미 활용해오고 있다.
한국과 일본간 통신용으로 쓰이던 JKC케이블은 1997년 7월 사용이 중단되면서 1997년 12월 한국통신과 일본 국제전화업체인 KDD로부터 서울대 해양연구소와 동경대 해양연구소에 학술목적으로 양도됐다. 1998년 3월 1일부터 부산 송정 해저중계국에서 전압을 측정하고 있으며, 현재 매 5분마다 측정된 유도전압 자료는 서울대 해양순환연구실 홈페이지(http://eastsea.snu. ac.kr)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개되고 있다.
해저케이블을 이용한 해수 수송량 관측은 학술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에서 다른 어떤 방법도 따를 수 없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전에는 부정기적으로 관측선을 타고 바다로 직접 나가 해수의 깊이 별로 수온과 염분을 관측하는 장비들을 바다에 내려 자료를 얻고, 이로부터 간접적으로 바닷물의 이동량을 추정했다. 또는 관측선에 부착하거나, 해저에 설치한 해류계를 이용해 직접 측정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대한해협을 통한 바닷물의 이동량은 여름철에 최대(2.13Sv)이고 겨울철에 최소(0.19Sv)이다. 때에 따라서는 여름철에 4.1Sv, 겨울철에 2.2Sv의 큰 값일 수도 있다. 또한 2개월 사이에 4.3Sv 정도의 변화폭이 관측되기도 했다. 이는 대한해협을 통과하는 대만난류의 수송량이 계절별, 연별, 그리고 2개월 규모의 짧은 시간에 상당히 변하는 것을 보여주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변동상은 알 수 없었다.
배를 이용한 연구는 연구선의 사용료만 연간 수십억원 이상이 소요되고 연구에 필요한 장비를 포함하면 수백억의 막대한 연구비가 필요하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관측은 1년 중 불과 수십일에 걸쳐 간헐적으로 실시되고 또한 기상상태가 악화되면 관측이 불가능한 관계로 불과 며칠 동안의 수송량을 얻을 뿐이었다.
그러나 해저케이블을 이용할 경우 기존에 이미 설치된 기간망을 사용하므로 매우 저렴한 유지 비용만으로도 기상상태와 무관하게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관측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해저케이블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획기적 연구방법으로, 해저케이블을 통한 관측이 시작되면서 대한해협에서의 바닷물 이동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개월이 아닌 불과 3일 내지 5일 사이에서 무려 2-3Sv의 변동이 있음이 밝혀졌다. 대만난류에 관한 연구 이래 처음으로 6년 이상의 연속적인 정밀자료가 축적되면서 계절적으로나 해에 따라 어떻게 수송량이 달라지는지가 정확하게 드러나게 됐다. 특히 동해안을 따라 포항앞바다에서 삼척 앞바다를 향해 거의 매년 지속적으로 북상하는 동한난류가 2000년 6-11월 사이에 사라진 원인을 분석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했다. 예년에 비해 이 기간동안 대한해협을 통해 동해로 유입하는 따뜻한 물의 유입양이 매우 적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해저케이블을 활용하면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동해의 새로운 모습이 알려지게 됐고, 미국 지구물리학회 등 국제저명 학술지와 국제 학술세미나에 연구결과가 발표되면서 그 연구 성과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연구를 주도적으로 수행해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상진 박사(34)는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연구원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다.
한국주변해역의 해저케이블
앞으로 서울대 해양연구소는 연구가 진행중인 대한해협 해저케이블과 7월에 시작할 HJK케이블 이외의 한반도 주변에 설치된 여러 해저케이블의 활용을 꿈꾸고 있다. 현재 통신용으로 사용중인 울릉도와 강원도 호산을 잇는 울릉-육지 해저케이블, 그리고 중국-한국 태안을 잇는CKC 국제해저케이블이 장차 학술목적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울릉-육지 해저케이블은 북쪽의 차가운 물이 남쪽에서 기원하는 따뜻한 물과 만나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동해의 해수순환을 좀더 정확하게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CKC 국제해저케이블은 황해를 횡단하는 케이블로 HJK케이블을 이용한 연구와 접목해 황해의 해수순환에 관한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동해의 입구인 대한해협뿐만 아니라 황해와 남해에서도 바닷물 흐름의 관측의 필요하다.
제주와 고흥을 잇는 해저케이블 구간은 중국 양자강으로부터 기원하는 저염의 물과 연중 제주도 부근의 해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제주난류가 이동하는 통로로 황해 및 남해의 해황변동을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구간이다. 그래서 이 구간의 수송량관측은 황해 및 남해의 해양환경, 해양생태계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다.
국가 기간망으로서 용도 폐기된 해저케이블의 성공적 활용을 위해서는 업체, 정부 그리고 지역민들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난 2000년 9월 서울대 해양연구소는 제주-고흥 간 제1해저 광케이블을 활용한 연구를 시작했으나, 불과 몇달 만에 해저케이블이 손상돼 연구를 중단했다.
또한 지역주민과 지자체의 협조가 필요한 해저케이블이 위치한 공유수면 점유 허가, 해저케이블의 안전 유지를 위해 해상에 설치된 표시부이의 사용에 따른 지역 항만청의 협조가 필요하다. 해저케이블을 활용한 연구결과는 학술적인 부분에 한정되지 않고 국가의 주요 정책결정 및 어족자원관리 등 사회·경제적 기여도가 크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를 이어줬던 해저통신케이블이 이제 인류와 지구, 인류와 해양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고 있다. 해저케이블을 통해 인류가 해양의 변화를 이해할 때,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해양은 인류에게 보다 많은 생명의 선물을 선사해줄 것이다. 물은 생명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기후조절자, 해양
지난 2월 영국의 유력일간지 가디언의 일요판인 ‘옵저버’ 는 미 국방부가 넉달 동안 대외공개를 꺼려오던 지구온난화 관련 비밀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세계 각국에서 식량과 물, 에너지자원 확보차원에서 처절한 생존투쟁이 일어난 가능성이 있으며 특히 네덜란드 헤이그 등 유럽의 주요 해안 도시들이 해수면 상승으로 물에 잠기고 영국은 2020년이면 시베리아성 기후가 될 것이라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해양에 주목하고 있다. 지구 기후는 태양에너지로부터 기원한다. 그런데 태양에너지는 위도에 따라 유입량의 차이가 커서 극지방은 적도에 비해 약 35% 정도 적다. 이런 불균형은 대기와 해양의 지구적 규모의 대순환에 의해 균형을 되찾고 있다. 덕분에 인류는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해양은 대기보다 3배 이상 열을 극지방으로 이동시킨다. 해양이 기후조절자로서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해가 세계 해양학자들로부터 큰 관심사를 받고 있다. 동해는 세계 대양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최고 수심이 대양의 평균수심과 유사한 4천m 정도이며 대양의 아열대, 아한대 순환형태와 유사한 상층 해수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동해 북부해역에서 겨울철에 형성된 심층수가 가라앉으며 동해 전해역으로 순환하는 형태는 북대서양의 노르웨이 해와 남극 주변에서 형성된 심층수가 전세계 대양으로 순환하는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심층수 순환 주기도 대양의 1/10 정도로 짧아 대양 순환을 연구하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