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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적정기술은 변신 중’

현미경+스마트폰으로 암진단까지


적정기술은 개발도상국을 위한 쉬운 기술, 수준 낮은 기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적정기술은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적합하게 이용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의미로, 첨단 기술도 포함될 수 있다. 최근에는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이 융합된 다양한 기술이 활용되고 있다.

현재 점점 많은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ICT와 스마트폰을 이용하고 있다. 미국의 퓨리서치센터는 2016년 2월, 지난 2년 동안 신흥국과 개발도상국들의 인터넷 사용자 수와 스마트폰 보급률이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의 인터넷 사용자는 2013년 45%에서 2015년 54%로, 스마트폰 보급률은 21%에서 37%로 늘었다. 이는 물론 한국을 포함한 경제선진국의 수치(인터넷 사용자 87%, 스마트폰 보급률 68%)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분명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개발도상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이 더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유선 인터넷망을 설치할 필요 없이 곧바로 무선 인터넷망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치웅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국제기술혁신협력센터 공적개발원조(ODA)사업단장은 “이런 상황에서 스마트폰과 첨단 ICT를 이용한 적정기술은 문제가 일어난 곳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연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와 같은 지역은 질병이 발생하는 곳과 의료진이 있는 병원이 멀리 떨어져 있다. 스마트폰은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환자와 의료진이 바로바로 소통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첨단 질병 진단기기와 만난 적정기술
ICT와 스마트폰은 특히 의료 분야의 적정기술, 그 중에서도 질병을 진단하는 기술에 활발하게 응용되고 있다. 질병을 치료할 때, 진단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단계다. 빠른 시일 내에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때를 놓치지 않고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진단기기는 매우 비싸고 무겁다. 조작 방법도 복잡해 개발도상국의 병원이나 보건소의 열악한 환경에서는 사용하기 어렵다. 연구자들은 ICT와 스마트폰을 활용해 값싸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적정기술 진단기기를 개발하고 있다. 영국 국제눈건강센터에서 개발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피크 비전(Peek Vision)’은 이런 점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시력 손상으로 고통 받는 전 세계 인구는 2억8000만 명이며, 이 중 90%는 저소득층이다. 또 이 가운데 80%는 제 때에 아주 간단한 검진만 받아도 치료가 가능하다. 피크 비전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비싼 검안기 대신 소위 ‘셀카렌즈’와 비슷한 ‘피크 레티나’를 스마트폰 카메라에 부착해 쉽게 눈의 상태를 검진할 수 있다. 시력과 색각 검사는 물론, 백내장 같은 중증 질환도 검사할 수 있다. 연구팀은 피크 비전을 이용해 케냐에서 성공적으로 환자들을 검진했다는 논문도 발표했다(doi:10.1001/jamaophthalmol.2015.4625).

한국에서도 이런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2016년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서울대에서 열린 적정 기술학회에서는 이와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이 발표됐다. 오비츠(OVITZ)사는 기존의 검안기 가격을 10분의 1로 줄인 휴대용 검안기를 개발했다. 1초 이내에 45가지 이상의 시각 정보를 측정할 수 있고, 원격 진료도 가능하다. 발표자로 나온 이성민 매니저는 “제한된 의료 인력과 시설을 가진 개발도상국에 효율적으로 활용될 것”이라며 “베트남의 학교 네곳에서 130명의 학생을 검진해 1차 시험을 마쳤다”고 말했다.

㈜힐세리온은 무겁고 비싼 초음파 기기를 대신할 휴대용 초음파 기기를 개발해 베트남, 몽골, 에티오피아 등에 보급하고 있다. 무게가 390g로 매우 가볍고, 무엇보다 무선으로 사용 가능해 사고 현장, 구급차 등 응급 상황에서도 초음파 진단이 가능하다. 초음파 영상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에 설치한 애플리케이션으로 볼 수 있다.

랩온어칩, 인공지능 등의 온갖 첨단기술이 결합된 차세대 말라리아 키트도 한국에서 개발 중이다. 노을(NOUL)의 이동영 대표는 “이 말라리아 키트를 사용하면 혈액 몇 방울만으로도 10~20분 사이에 자동으로 말라리아를 진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말라리아는 100년 동안 현미경으로 진단해왔는데, 확인할 샘플을 만들고 현미경으로 확인하는 과정에 시간이 많이 들고 숙련된 전문가가 필요했다. 말라리아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는 사실상 진단이 어려웠던 것이다. 이후 혈액과 용액만으로 진단하는 신속진단 방법이 도입됐지만 진단 정확도가 낮았다. 노을의 차세대 말라리아 진단 키트는 정확도 문제를 해결했고 2016년 6월 UN 과학기술혁신 포럼에서 ‘주목할 만한 15개의 이노베이터’로 선정되기도 했다.

‘백신 냉장고’에서 길을 찾다
질병 진단과 치료만큼 중요한 것이 예방이다. 제3세계 국가에서는 물과 음식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고 백신을 원활히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2015년 기준으로 프랑스와 미국 대한민국에서 홍역과 소아마비, B형 간염, DPT(디프테리아-백일해-파상풍)와 같은 질병의 백신 공급률은 90% 이상이다. 네팔과 인도, 모잠비크의 백신 공급률도 70% 이상으로 언뜻 선진국과의 차이가 크지 않다. 하지만 1000명당 소아 사망률은 선진국(4~6명)에 비해 네팔(36명), 인도(47명), 모잠비크(71명)가 10배 이상 높다.

안성훈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백신 보급률이 높은데도 사망률이 높은 것은 소용없는 백신을 맞았기 때문”이라며 “백신은 2~8°C의 저온으로 유지해야 하는데, 운반 단계에서 잘못취급해 효력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연구팀은 동남아국가 등에서 주요 운송 수단으로 많이 사용하는 오토바이로 백신을 이동시킬 방법을 고안했다. 오토바이의 동력으로 소형 냉장고를 돌려 이동 중에도 온도를 저온으로 안전하게 유지하자는 것이다. 백신냉장고 구동 원리의 핵심은 뚜껑에 장착된 열전소자에 있다. 전류가 흐르면 열전소자의 한쪽 면은 온도가 상승하고 반대편은 낮아진다. 뚜껑의 바깥쪽에는 온도가 올라가고 안쪽에는 온도를 낮추도록 설계하면 내부를 저온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의료적정기술,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
기존 대형 의료장비는 첨단 의료기술이 접목된 휴대용 초음파진단기나 말라리아 키트처럼 더 싸고 가볍게 진화를 거듭하는 중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적정기술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적정기술은 원래 어려운 나라 국민의 생활을 증진시키기 위해 기술적으로 도와주는 데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그 기술을 직접 생산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기반을 마련해, 스스로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진정한 목표다. 하지만 아직은 개발된 적정기술을 공급하고 관리까지 전적으로 해주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송치웅 단장은 “제3세계 국가에서 적정기술을 스스로 쓸 수 있는 지속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경제적으로 사업화해 이윤을 노리는 세력의 배만 불릴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첨단 의료기술과 적정기술의 접점을 찾고 있는 신희영 서울대 연구부총장은 “각각의 개발자가 기술을 상품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다만 이익을 재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3세계 국가에서 적정기술을 통해 얻은 이익을 다시 그 나라에 투자하는 선순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 부총장은 “아무 기반도 없는 국가에서 단번에 첨단과학을 누리게 할 방법은 없다”며 “중간다리를 놓고 다시 수선하는 게 적정기술의 현실적 방향”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 대학들은 라오스(서울대)와 탄자니아(연세대), 베트남(인하대) 등의 개발도상국에서 교육과 실습을 위한 최소한의 설비를 지원하고, 직접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선별해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의 경우 2010년도부터 라오스의 의사를 1년에 10명씩 초청해 교육하고 있다. 신 부총장은 “지난 197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과 비슷한 국가를 대상으로, 당시 어떤 의료기술이 필요했는지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소아백혈병의 경우 조혈모세포를 채취해 염색한 뒤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한다. 신 부총장은 “고가의 디지털 현미경 대신 일반 현미경에 스마트폰을 연결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해 공급했다”며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보내면 수시로 진단소견을 교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현재까지 6년간 70명의 소아암 환자를 진단했고 2명의 어린이가 완치 판정을 받았다.

신 부총장은 “스스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해도 의지가 부족한 경우도 많다”며 “설계 단계에서부터 국가별 문화와 국민의 의식을 고려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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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김진호 기자
  • 오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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