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학자 레너드 리드는 1958년 ‘나는 연필입니다(I, Pencil)’라는 논문을 썼다. 원료를 제공하는 곳과 생산수단이 따로 흩어져 있기 때문에 연필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도구를 만들어낼 능력과 자원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 지구에 더 이상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산업화와 전문화의 그늘을 지적한 연구였다.
그런데 여기, 이 결론에 도전한 사람이 있다. 서울 종로구 김영사 사옥에서 만난 영국 웨스트민스터대 생물학과 루이스 다트넬 교수는 뽀얀 기포가 점점이 박힌 투박한 유리판 하나를 내밀었다.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물건입니다. 직접 모래를 채취해 녹여서 입으로 불어 만든 거에요.”
그가 내민 유리판은 입으로 분 흔적이 남아 가운데가 옴폭 들어가 있었다. 지금도 오래된 건물의 유리창에는 이런 흔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유리는 과학사에서 없어선 안 될 물건”이라며 “과학의 기본은 측정인데, 단단하고 투명한 유리가 없었다면 온도계와 압력계, 현미경, 망원경 같은 측정도구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명 재건에 꼭 필요한 물건 제보하세요”
다트넬 교수는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면 운 좋게 생존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까’라는 발칙한 사고실험을 통해 인류 문명을 ‘재부팅’할 안내서 ‘지식’을 썼다. 불을 피우고 깨끗한 물을 얻는 법 등 당장 생존에 꼭 필요한 지식뿐만 아니라 인류가 쌓은 과학문명을 재건할 방법까지 담았다.
그는 “과학을 공부하는 것과 실제 삶 사이에 괴리가 크다고 느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했다. 항공사 엔지니어로 늘 무언가를 손으로 만졌던 아버지와 달리, 그는 어렸을 때부터 책에만 파묻힌 공부벌레였다. “과학기술이 삶을 어떻게 지배하는지 직접 보이고 싶었다”는 그는 유리판을 만든 것처럼 다양한 과학기술을 직접 손으로 재현하며 책을 썼다.
“솔직히 이 책은 종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말하고 싶었던 건, 현대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활과 화살을 들고 직접 사냥하지 않아도 배불리 먹을 수 있죠.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숨은 공로자들 말이에요.”
물론 한정된 지면에 모든 과학기술을 정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빠진 내용을 모아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독자들과 토론할 수 있는 게시판도 열었다. “여기에 실리지 않았지만, 문명 재건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내 웹사이트에 글을 남겨달라”는 문구를 책에 써 뒀다. 독자와 소통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재직 중인 대학에서 최근 과학소통 담당 교수로 승진했다더니,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기자는 문명 재건에 필요한 또 다른 물건으로 콘돔을 떠올렸다. 종말 후 빨리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압박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기를 낳아 기르기에 적절치 않은 환경일 수도 있다. 다트넬 교수는 “맞다. 웹사이트에 누군가가 이미 콘돔 이야기를 썼다”며 “콘돔은 특히 잘 늘어나니까 물을 보관하기에도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학동아에서 콘돔의 신축성에 대해 읽은 한 어린이 독자가 엄마에게 콘돔에 물을 담아보자고 졸랐다는 일화도 떠올랐다. 다트넬 교수의 얼굴에서 호기심 많은 소년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그는 본업인 우주생물학 연구를 이어가면서 다음 책도 준비중이다. “과학과 문화가 서로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귀띔했다. “우주생물학을 공부하고 문명에 대한 책을 쓰는 등, 인생의 큰 선택을 할 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내 안의 호기심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과연 인류의 과학문명에 또 어떤 질문을 던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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