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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 Fun] 다음 체중계

Science Fiction



돌아가시기 며칠 전,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신 외할머니가 자식들을 불러 손녀들의 몸무게를 물어보셨다. 그리고 은경에게 유품으로 체중계를 남기셨다.

“애지중지하시던 건가요?”

“아니, 창고에 처박혀 있던 건데.”

“그럼 이걸 왜 저한테 주신 거예요?”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받았으니 다른 수가 없었다. 집에 갖다놓고 쓰는 수밖에. 체중계 윗면에는 숫자 읽는 법이 붙어 있었다. 열두 개의 기호가 옆으로 쭉 나열되어 있고, 그 아래에 1부터 12까지 아라비아 숫자가 적혀 있는 표였다. 12진법 체중계라는 뜻이었다. 은경이 올라서자 윗줄에 나와 있는 기호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한참 시간을 들여 10진법으로 환산해 보니 1249라는 숫자였다.

‘곰이라는 거야 뭐야?’

대관절 무슨 단위를 쓰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킬로그램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외할머니의 죽음이 기억에서 사라질 때쯤 그 이상한 체중계 또한 은경의 관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이삼 일에 한 번씩은 그 위에 올라설 일이 생기곤 했는데, 순전히 집이 좁아터진 탓이었다. 은경은 유품을 처분하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공간을 차지하고 누워 있게 하는 것으로 외할머니에 대한 의리를 다했다.
그러다 무려 3년이 지난 뒤에 은경은 마침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발단은 늘 비슷한 범위를 오르내리던
12진법 화면이, 즉 은경의 체중이, 어느 날 큰 폭으로 치솟은 것이었다.

‘여행 떠나기도 전에 벌써 살이 쪘나.’

은경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고장이 난 건가. 배터리가 다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 집에 온 지 벌써 3년이니. 그 전에는 또 얼마나 썼을지 알 수 없지. 여행 갔다 와서 고쳐야겠다.’

바스크로 여행을 떠난 은경은 체중계의 경고를 망각한 채원 없이 먹어댔다. 핀초처럼 양 적은 음식을 여러 번에 나눠 먹는 식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매일 다섯 끼씩을 먹은 셈이었다.

‘2킬로는 쪘겠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체중계 위에 올라선 은경은 다시 한 번 당황스러운 기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체중계의 숫자가 여행 전 평균치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게 정상일 리는 없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은경은 체중계를 뒤집어 배터리 넣는 곳을 찾았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의 틈도 없이 완전히 밀봉되어 있는 구조였다.

‘기계장치를 어디로 집어넣었지? 그보다, 배터리는 어떻게 갈아 끼운 거야?’

엔지니어였던 외할머니는 분명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물어볼 수도 없게 되었지만.
은경은 외할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또 뭐 고장 냈어?” 전파사처럼, 정말로 뭔가를 고장 냈을 때만 먼저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것도 가능할까 싶은 것까지 외할머니는 망설임 없이 맡아서 고쳤다.

“그런데 할머니는 어떻게 이런 것도 고쳐요?”

“왜, 나이가 많아서?”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기계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내가 봐서 될 만한 것만 나한테 오니까 대충 뜯어보면 알아.”

그런데 그 기계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은경이 엔지니어가 아닌 탓도 있었지만, 누구를 데려온들 뜯어볼 방법이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굳이 엔지니어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공들여 마감을 했다는 건 더 이상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일 테니까.

일주일 뒤, 이제는 고칠 수도 없게 된 체중계 위에 다시 올라섰다. 저녁에 헬스장에서 잰 것과 마찬가지로 집에 있는 체중계의 수치 역시 거의 여행 전 체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집에 있는 체중계로 잰 무게와 밖에서 잰 체중 사이의 미세한 차이 같은 것들이.

기록을 시작했다. 약 두 달이 지났을 때 은경은 비로소 패턴을 발견했다. 매일 재지 않은 탓에 오래 걸리긴 했지만 눈이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패턴이었다. 외할머니의 체중계에서 몸무게가 아주 조금 늘어난 것으로 나온 날, 다른 10진법 체중계들은 은경의 체중이 아직 그대로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이틀 연속 두 가지 체중계 모두에서 체중을 잰 날, 10진법 체중계는 전날 12진법 체중계가 내놓은 숫자에 거의 정확하게 맞춰졌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날짜와 몸무게를 기록한 표를 나란히 놓고 보면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 하나가 보였다. 10진법 체중계가 하루의 시차를 두고 12진법 체중계를 정확히 따라간다는 사실이었다.

‘아니지, 이게 아니지. 이상한 결론이잖아. 보통 체중계들이 외할머니 체중계를 따라가다니. 그런 게 아니야. 외할머니 체중계가 다음날 체중을 예상하는 거지.’

그때서야 체중계에 표시되는 열두 개의 낯선 숫자가 한층 더 기이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데서도 저 비슷한 모양을 본 적이 있던가?’ 없었다.

소름이 돋아나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외할머니가 은경에게 남긴 물건은 말하자면 미래를 내다보는 기계인 셈이었다. 본가로 찾아가 엄마에게 물었다. 그 주 주말 저녁이었다.

“이것저것 다 고치셨지. 테레비에, 셋톱박스에, 카메라에, 컴퓨터에. 동네 사람들이 무슨 시골 사람들처럼 우리집으로 다 갖고 와서는, 느이 외할머니가 지저분하다고, 고쳐놓은 거 빨리 안 찾아가면 다 내다버린다고 야단하고 그러셨어. 그런데 왜?”

“아니, 그냥. 고치는 거 말고 뭐 만들기도 하셨나?”

“그럼. 제목이 길어서 엄마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얘. 엄마 요즘 어떤지 알어? 문화센터에서 바로 30분 전에 외운 영어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한참 동안 이러커고 멍하게 앉아 있었어. 커피도 맨날 타 놓고서는 그냥, 깜-빡해서 반도 못 마시고 다 버렸어. 엄마는 커피 식으면 맛이 없어서.”

“희한한 거 만드신 거야?”

“외할머니? 그럼. 어디 가서 살 수 있는 건 절대 안 만드셨으니까. 외할머니 성격에 아주, 질색을 하셨지. 남들이 더 잘 만들어놓은 거 왜 내가 만들어 쓰냐고.”

“얼마나 희한한 건데?”

“희한한 거? 돌 갈아서 화살촉 만드는 기계 같은 거 어릴 때 본 거 기억 안 나? 막내 이모는 화살촉을 실에 매달아서 목걸이로 매고 다니고 그랬어. 애들이 원시인 같다고 얼마나 놀리고 그랬는데. 쪼끄만 애가 그런 거 매고 다녀서 그런가.”

“기억 안 나. 그리고 또?”

“외국 사람들도 오고 그랬어. 라디오 들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국말 쪼끔 하는 뚱뚱한 아줌마 있었어. 땀을 뻘뻘 흘리고 와가지고는 에어컨 언제 사냐고 물어보고 그랬는데. 그 아줌마 한국말 하는 거 흉내 낸다고 외할머니한테 혼나고 그랬지.”

“라디오 고치러 왔다고?”

“그게 저거잖어. 미국에서 만든 라디오라서 한국에서는 고칠 수가 없대요. 근데 라디오를 얼-마나 험하게 썼는지 고치고 얼마 안 있어서 또 가져오고 또 좀 있으면 또 오고. 버리지도 않고 다른 데 가지도 않고 맨날 고장 나는 걸 맨날 가지고 찾아오더라.”

“안 수상했어?”

“엄마는 괜찮았지. 근데 그때 느네 사촌오빠가 여섯 살인가, 쪼끄만 애기였거던. 그런데 얘가 외국 사람만 보면 하도 울어서, 아주 기겁을 하고 구석에 숨어 들어가는 바람에 그 사람들 보기가 민망해서 혼났지. 그거 요즘으로 치면 그거, 제노포비아다. 아하하하하, 우스개로 하는 소리야. 애들은 원래 좀 그래. 낯선 사람 무서워해.”

아무래도, 수상하지 않았냐는 말을 무섭지 않았냐는 말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엄마는 남을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모는 달랐다.

“완전 이상했지. 꼭 어정쩡한 시간에만 와서 한 시간씩 있다 갔거든. 저녁 아홉 시 반, 열 시, 이런 때.”

전화기 너머로 이모에게 물었다.

“외할머니 전문이 뭐였지? 이상한 거였나? 왜 그런 사람들이 찾아온 거야?”

“전공은 로봇 팔 아닌가? 공장에서 쓰는 조립로봇. 그런데 전공 때문이 아니고, 젊었을 때 유학생 시절에
누굴 만났다나 봐.”

“누구?”

“뭐라더라. 이름이 이상했는데.”

“외국 이름이야?”

“글쎄, 외국인이라기보다는 거의 외계인 이름 같았을걸.”

이모가 이름 몇 개를 끄집어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원래 이름이 뭐였는지는 전혀 짐작이 안 됐지만, 이모가 어떤 느낌을 표현하려고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들어본 적도 142없고 아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이상한 어감. 적어도 이모가 아는 세상 안에서는 결코 음운으로 쓰이지 않는 낯선 소리들. 이모의 말에 체중계에 사용된 열두 개의 숫자가 떠올랐다. 은경이 아는 한 지구 어디에서도 사용된 흔적이 없는 기호였다. 인터넷도, 도서관도, 어디를 뒤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나 이 이야기 어디서 들은 것 같아. 어떤 여자가 외국에 공부하러 가서 외계인 만난 이야기. 그게 외할머니 본인 이야기였어?’


은경은 손가락이 여섯 개씩인 외계인을 상상했다. 아니면 촉수가 열두 개인 문어 같은 모양의 외계인을.

‘그런데 어떻게 미래를 예측하는 걸까. 완전히 막힌 구조잖아. 바깥을 내다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하는 장치가 하나도 없는데. 레이더 같은 게 들어있는 건가?’

어렸을 때였다. 여름방학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불을 꽁꽁 싸매고 외할머니 옆에 누워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겨울방학이었고, 아직 초저녁이었다. 외할머니도 아직 등이 굽어있지 않았다. 그만큼 오래된 기억이었다. 외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보다 오래된 것이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나라에 기계 팔을 만드는 여자가 살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 잠시 살러 온 이 여자는 매일 저녁 외딴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민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울창한 숲속에는 성이 아니라 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바람에 은경은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대학교는 원래 숲속에 있는 줄 알았다.

“은경이 벌써 자?”

“아니요. 계속 해 주세요.”

외할머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언제나 그렇듯 숲속 산책길을 걷고 있던 여자는 하늘 저편에서 낯선 불빛을 발견했다. 그쪽으로 가 볼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불빛이 여자가 있는 쪽으로 날아왔으므로 마주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은경이 잠이 들었다. 이야기 속의 여자가 아니라 방학을 맞아 외할머니 집에 놀러 간 은경이. 그래서 은경은 이야기의 결말을 알지 못했다.

‘그럼 그때 만난 게 귀신이 아니라 외계인이었나?’

은경은 머릿속으로 이런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외계에서 왔든 미래에서 왔든, 아무튼 현재 지구인보다 앞선 기술을 가진 누군가가 숲속을 거닐던 엔지니어를 만나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 친분이 깊어져서 마침내 자신들이 가진 기술 몇 개를 전수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외국의 누군가가 사람을 보내 외할머니와 접촉한다. 고쳐도 고쳐도 또 고장 나는 라디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졌을 질문. 무언가 내 놓을 게 없느냐는 취지의 설득이나 거래나 협박 같은 것들. 외할머니는 그 외국인들에게 협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외할머니라면 그냥 그랬을 것 같았다. 사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어쩌면 외국인들은 외할머니의 집을 뒤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닐지도 모른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들이 뭔가를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들은 미지의 기술을 원했을 것이다. 혹은 자신들의 기술 수준을 확 끌어올려 줄 단서가 될 만한 사소한 물건 하나만이라도. 예를 들면 미래를 예측하는 체중계 같은. 문득 감시당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그 뒤로 벌써 몇 년인데, 신기해 보였으면 벌써 가져갔을 거야. 이건 딱 봐도 신기해 보이니까. 특히 저 앞에 붙어있는 설명서는 누가 봐도 외할머니 스타일이고.’

다시 체중계를 들여다보았다. 파고들 틈 없는 천의무봉의 마감. 배터리 기술 하나만으로도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인 엔지니어 단 한 사람에게만 몰래 보여준 기술. 외할머니에게 그 체중계는 굉장한 트로피였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신뢰의 징표가 틀림없었다. 당신에게라면 우리의 비밀을 밝혀낼 단서를 흘려 두더라도 절대 배신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황제를 알현할 때 칼을 차고 있어도 좋다고 허락받는 것처럼, 그래도 그 칼을 황제에게 휘두르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는 듯, 절대적이고도 상징적인 기념품.

그렇다고 안전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분해할 수 없는 장치라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 강제로 침투할 경우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하는 장치라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에이, 그래도 폭발물은 아니겠지. 그냥 핵심부품을 태우는 정도였으면 좋겠는데.’ 물론 분해를 해볼 생각은 없었다. 외할머니가 그러지 않으셨다면 은경 또한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다만 은경은 그 체중계가 너무 체중계같이 생긴 게 마음에 걸렸다. 외계인이 쓰던 물건이라기에는 너무 지구 물건처럼 생긴 탓이었다.

‘미래의 지구에서 온 물건일까?’

그런데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굳이 12진법을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즉, 손가락이 열두 개인 외계인이 일부러 지구인들의 체중계를 본떠서 만든 물건이라는 의미였다.

‘잘 숨겨뒀다가 언젠가 요긴하게 쓰라는 뜻으로 준 걸까, 아니면 절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기념으로나 간직하고 있으라는 뜻으로 준 걸까?’

일단은 분해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연구를 계획했다. 실행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상자에 넣어서
빛을 차단해 보기도 하고 소리가 안 나게 옷으로 가득 찬 여행가방 안에 체중계를 쑤셔 넣고는 베란다 문 밖에 방치해 두기도 했다. 실험이라기보다는, 비밀을 간직한 말수 적은 누군가와 나누는 느릿한 대화 같은 일이었다.

방청객도 하나 들여놓았다. 현대 지구인들이 쓰는 평범한 10진법 체중계였다. 새로 밝혀낸 인과관계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측정이 쉬워진 만큼 실험 횟수가 눈에 띄게 늘기는 했다. 데이터가 빠르게 축적되었고, 데이터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동안 말로는 선뜻 표현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통찰이 생겨난 것도 같았다. 그러다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잠깐, 엄밀히 말하면 미래를 예측하는 게 아니잖아. 이 방의 미래를 다 예측하는 게 아니라 딱 한 가지 변수만 예측하는 거니까. 저 체중계는 내 몸무게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 다른 건 관심이 없는 거야.’

하지만 그 하나만큼은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하다는 점 또한 사실이었다.

‘내 미래를 알고 있는 걸까? 무게로 표현되는 내 인생을.’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언젠가 아이를 갖게 될까? 나는 모르지만 체중계는 알겠지? 그런데 물어볼 수가 없네.’

그렇다. 체중계는 점쟁이가 아니었다. 어느 시점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물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또한 예언자도 아니었다. 아무도 안 물어 봤는데, 스스로 특정 시간대를 언급해 가며 그 순간에 일어날 일을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 그거구나!’

은경은 비로소 제일 중요한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시간이었다. 기계가 예측하는 미래란 언제일까. 다음날, 한 시간 뒤, 1주일 후?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정해져있는 게 아니었다. 정답은 훨씬 단순했다. 일반 체중계를 하나들여놓는 것만으로도 측정이 훨씬 쉬워질 수 있었던 이유. 정답은, 체중계가 예측하는 시점은, 바로 은경 자신이 ‘다음번에 체중계에 올라설 때’였다.


‘저건 심지어 내가 언제 그 위에 올라서게 될지도 정확히 알고있어. 딱 그 순간의 체중을 보여주는 거니까.’

그것은 꽤나 두려운 발견이었다. 그래서 은경은 곧 운명론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계절이 바뀌면서 실험도 자연스럽게 점차 뜸해졌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올라설까 말까 망설이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져도 소용이 없었다. 체중계는 알고 있었다. 은경은 결국 결단을 내릴 것이고, 체중계가 예측하는 어느 시점에 체중계 위에 올라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체중계는 결과를 출력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셈이다. 은경에게 외할머니의 유품은 다름 아닌 운명론 그 자체였다. 외할머니는 그 비밀을 은경에게 알려준 것이다. 외계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우주의 비밀을! 은경은 그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받았다. 믿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많은 실험을 반복해도, 단 한 차례의 오차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귀납법의 오류를 따질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진리였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이나 엄연한 진리.
 


차라리 들여다보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위험한 가능성들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 제일 무서운 상상은 아무 생각 없이 체중계 위에 올랐다가 5킬로그램 정도가 줄어든 숫자를 보게 되는 일이었다. 5킬로그램이 줄어버린 신체.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은경은 깜짝 놀라 다시 한 번 체중계에 올라섰다. 마지막
두 자리 숫자가 2초쯤 어느 선 근처를 오르내리다가 조금 전과 정확히 같은 지점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체중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늘어 있었다. 그것도 15킬로그램 이상이나. 은경은 깜짝 놀라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일터로 가는 내내, 일거리를 처리하는 중간중간에,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문밖에 선 채로 대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서 체중계 위에 올라서면 그만이었다. 규칙이 망가져버리겠지만 그렇다고 체중계가 폭발하거나 우주가 붕괴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랬으면 좀 더 분명한 경고문이 붙어 있었을 테니까. 그 기계는 숙명 같은 게 아니었다. 애초에 숙명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은경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규칙을 깨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것은 순종 따위가 아니었다. 차라리 확신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혹은 순차적으로 다가오는 시간의 다음 페이지 같은 것이 아니라, 이미 펼쳐져버린 페이지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차례로 읽어 내려가다 보면 당연히 16쪽을 지나야 17쪽이 나오겠지만 그렇다고 16쪽 마지막 줄에 서 있는 사람이 17쪽의 내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12진법 체중계가 보여준 시간의 모습이었다. 은경은 그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했다. 결정된 인간의 비애. 가장 깊고 불확실한 고뇌조차도 이미 다 결정되어버린 사소한 존재의 좌표와 좌표계.

발걸음을 돌려 엄마 집으로 갔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창고처럼 되어버린, 어릴 때부터 쓰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전화기에 저장된 연락처를 뒤졌다.

‘그 몸무게쯤 되는 남자 중에 우리 집에 올 만 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저 무시무시한 체중계를 밖으로 가져가는 건 도저히 상상이 안 되니.’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외할머니가 외삼촌이나 이모들에게 손녀들의 몸무게를 물으셨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외할머니는 체중계가 보여준 마지막 숫자를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고는 창고에 처박아 두셨겠지. 내가 제일 두려워하던, 갑자기 몇 킬로가 빠져나간 몸무게였을 테니까.’

하지만 손녀들의 몸무게를 물어보시던 그 순간쯤에는 외할머니는 다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체중계가 알고 있는 운명이라는 게 꼭 자기 한 사람의 삶에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위안이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삶을 마감할 날을 눈앞에 둔 외할머니로서는. 그러나 은경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갈 수 있다 해도, 운명은 역시 운명이었다. 체중계가 하필 자신에게로 왔다는 사실만 놓고 봐도 그랬다. 체중계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은경이 새 주인이 되리라는 사실을. 체중계를 물려받은 은경이 그 체중계 위에 올라서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름 몇 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중 몇몇은 벌써 최근 사진을 찾아서 체형을 짐작해 보기까지 했다. 은경은 전화기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외할머니는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운명을 너무 믿으신 건가? 하지만 외할머니 본인은 전혀 운명론자가 아니었잖아. 그걸 꼭 대물림하셨어야 하는 거야?’

그냥 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 외할머니는 그런 분이었으니까. 그러나 방 안에 놓인 엄연한 현실이, 그 일을 도저히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 뭐, 따지고 보면 나쁜 일도 아니지. 남자가 생긴다는데. 좋은 일일 거야, 외할머니가 물려준 거면.’

세 명의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몸무게를 물었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꼭 맞는 사람 하나를 발견했지만 은경은 거기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이건 아닐 거야. 그래, 복수정답일 거야. 더 찾아보자.’

그 순간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날은 도저히 일찍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 날인 토요일은 점심시간을 넘기도록 늦잠을 잤다. 식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고구마를 먹고 있는데 엄마가 먼저 말을 걸었다.

“고민이 많아?”

“많아 보여? 나 원래 그렇게 생겼잖아.”

“그렇게 생기긴. 외할머니가 가시기 전날 그러셨다던데. 은경이가 너무 고민하면 안 될 텐데 하면서.”

“누가 그래?”

“외숙모가. ‘은경이가 너무 고민하면 안 될 텐데. 생각보다 훨씬 간단한 건데.’ 너 또 뭐 고장 내서 외할머니한테 물어봤어?”

“기억 안 나는데.”

“너도? 엄마도 깜빡했다가 3년 만에 기억이 났어. 너 그러커고 앉아 있는 거 보니까 외할머니 생각이 나서 그랬지요.”

노래처럼 끝나는 이상한 말투였다.

은경은 고구마를 식탁에 내려놓고 양철로 된 홍차 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목이 메었다. 외할머니의 말을 곱씹었다. 생각보다 간단한 해법이라는 말. 외할머니는 적어도 두 가지 답을 알고 있었다. 복잡한 답 하나와 그보다 훨씬 간단한 답. 은경이 고민 끝에 도달할 해법이 둘 중 더 복잡한 쪽이 될 것이라는 사실까지.

‘나, 사실 외계에서 온 기계가 아니어도 아무나 다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이었던 게 아닐까?’

외할머니가 그렇게 말했다면 은경이 갖고 있는 가설은 포기하는 게 옳았다. 두 길을 다 가 본 외할머니가, 아마도 은경이 들어선 길과 똑같은 길 위에서 한참을 헤매다, 마침내 원래 있던 곳까지 되돌아 나와 새 길을 찾아낸 이야기를 하신 거라면. 엄마 집을 나와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체중계 실험의 대전제로 돌아갔다. 미래를 예측하는 기계. 다음번 몸무게를 정확히 알아내는 장치. 기계가 가진 비현실성은 분명 실재했다. 그 비현실성을 설명하려면 아무래도 과감한 가설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과감한 가설이었다면? 미래를 예측하는 기계가 아니라면? 거기가 첫 번째 갈림길이었다. 언뜻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다른 길 하나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미래를 알아맞힌 건 맞는데, 그게 사실은 미래를 예측한 게 아니라 훨씬 더 단순하고 쉬운 속임수를 쓴 거란 말이지. 그런데 그게 뭘까.’

그 순간 반대편으로 뻗은 길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래의 반대편. 과거로 가는 길.

‘과거! 그래, 과거로 보낸 거야! 복잡하게 미래를 예측한 게 아니라 그냥 확실하게 측정한 숫자를 단순히 과거로 보내버린 거야. 시점도 그래. 저 기계는 내가 언제 다시 그 위에 올라설지 전혀 몰라. 알 필요도 없는 거지. 다만 과거 어느 시점에 올라섰는지만 정확히 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까 예측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냥 기록하면 되니까.’

그렇다. 완전히 봉인되어 있는 그 체중계의 핵심부품은, 배터리보다 조금 더 중요한 외계기술이란, 바로 타임머신이었다. 일방통행만 가능한 타임머신. 지구인도 모두 시간여행을 한다. 다만 미래 방면으로만 천천히 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기계는 정반대 방향으로 무언가를 배달한다. 화물은 아마도 무슨무슨 입자 같은 아주 작은 물건일 것이다. 간단한 숫자 정보를 담아 과거로 보낼 수 있는 최소한의 패키지. 수신자는 기계 자신, 수신 시간은 물론 ‘바로 전에 누군가가 올라선 시각’일 것이다.


은경은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책장에서 책 몇 권을 꺼내어 바닥에 쌓았다. 10진법 체중계가 옆에 놓여 있었지만 무게를 정확하게 달아보지는 않았다. 그냥 눈대중으로 대충 15킬로가 될 만큼 쌓아 올린 다음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12진법 체중계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일일이 잴 필요는 없는 거야, 그렇지? 타임머신이든 뭐든, 무게 재는 기계는 내가 아니라 너니까. 이렇게 대충 재면 네가 알아서 때려 맞추는 거야. 아니, 벌써 그렇게 했겠지. 이제 곧 할 거기도 하고. 아무튼 그게 네 운명이니까, 내 운명이 아니라.’

한 발, 또 한 발, 책을 안고 체중계 위에 올라섰다. 일부러 아래를 내려다보지는 않았다. 현재 무게는 이미 알고 있었고 다음 무게는 알고 싶지 않았다. 은경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자, 이제 이 숫자를 과거로 보내버려! 그래서 어제 아침의 김은경이 어쩔 줄 몰라서 끙끙대게 만들라고!’

그렇게 끝나는 이야기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무난히 일상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그런데 은경은 그 결말이 하나도 싱겁지 않았다. 체중계를 베란다 구석에 내놓으면서 은경은 외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뭔가 잘 안 풀려서 하시던 일은 그만 두고 동네에서 텔레비전이나 고치는 신세가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누군가를 만나 신뢰를 얻고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선물을 받아 죽는 날까지 조용히 간직한 사람. 그렇게 받은 선물을 창고에서 그냥 썩히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수수께끼를 그대로 풀어내어 짤막한 힌트와 함께 다음 사람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신 분.

‘나는 이제 자유야. 방학숙제를 다 끝냈으니까.’
 

그러나 사실 은경은 그날 밤에도 역시 편하게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책더미를 품에 안고 용감하게 체중계에 오른 순간, 그만 체중계에 표시된 숫자를 훔쳐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은경이를 죽인다더니.’

은경은 그때 본 숫자를 속으로 환산했다. 꽤 익숙한 작업이었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56425.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숫자였다. 그런 무게가 저 작은 체중계 위에 실리다니, 궁금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게 새벽까지 뒤척이던 은경은, 막 잠이 들려는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낡은 기계장치 돌아가는 소리에 도로 잠이 깨고 말았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 은경이 베란다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런데 거기에 무언가가 서 있었다. 은경은 너무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장르도 잊어버린 채 이렇게 외쳤다. “귀신이다!”

물론 그것은 귀신이 아니라, 어느날 숲속을 산책하던 외할머니 눈앞에 나타났던 바로 그 존재였다. 한쪽 모서리로 체중계를 밟고 삐딱하게 서 있는 파란색 공중전화부스, 아니, 그 비슷하게 생긴 문 달린 상자 같은 무언가.

문이 열렸다. 은경은 문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이 나왔다. 체중계 때문에 삐딱하게 선 상자에서 나와 삐딱하게 첫 걸음을 내딛고는 맥없이 바닥에 쓰러져버린 외계인. 시선이 저절로 손가락 쪽을 향했다. 다섯 개씩이었다. 여섯 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 마치 인간 여자처럼 생긴 그 존재가, 고개를 들어 은경의 얼빠진 얼굴을 확인하고는 벌떡 일어나 멋쩍게 씩 미소를 지었다. 당황스러운 침묵이 두 존재의 거리를 한층 좁혀 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존재가 입을 열어 생경한 목소리로 은경에게 말을 건넸다.

“네가 바로 은경이구나.”

“그런데 왜 반말이세요?”

그날 밤 은경은 숙제검사를 하러 온 외계인을 만나 삶과 우주에 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뒤를 이어, 외계문명과 직접 접촉하는 지구 측 교섭대리인이 되었다. 그렇게 새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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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배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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