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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Issue] 경쟁하는 너? 스트레스 받는 나!


“픽미, 픽미, 픽미 업(pick me up)” 15살이나 됐을까 싶을 정도로 앳된 소녀들이 나와 자신을 뽑아달라는 노래를 부른다. 매력적인 101명의 걸그룹 지망생들의 성장 스토리는 감동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했지만, 한편으로는 영 석연치 않다. 아마도 소녀들의 과도한 경쟁과 비정한 탈락을 바라보면서도 웃고 있는 내 자신이 순간 ‘너무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갈수록 가혹해지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그리고 이에 열광하는 현대인의 정신은 과연 건강한 걸까.


제멋대로
입은 옷차림에, 반항기가 가득한 자세와 표정. 두 명의 젊은 래퍼는 최선을 다해 심사위원에게 자신의 랩 실력을 보여주기에 여념이 없다. 랩은 세상에 대한 비판과 저항으로 가득하고, 조금은 도를 넘는 ‘디스’와 욕설을 가리기 위한 ‘삐’소리로 이어진다. 그러나 배틀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손한 자세로 돌변한다. 반성적인 태도로, 굴욕적인 평가를 고분고분 받아들인다. 심지어는 ‘똘끼’가 부족했다는 지적에, 앞으로는 더모범적인 ‘똘끼’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힙합은 1970년대 뉴욕 빈민가에서 시작된 저항의 하위문화다. 랩이나 댄스, 불법적인 낙서(그래피티) 등으로 기성 질서에 대한 비판과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니 ‘저항’ 정신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굳은 자세로 순순히 ‘순응’하는 래퍼의 모습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걸까. 과도한 경쟁과 지나친 혹평, 그리고 비정한 탈락과 소수만의 승리라는 천편일률적인 도식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우리 사회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이스북의 ‘따봉충’이 진화의 산물?

인간을 다른 포유류와 구분해주는 특징에는 직립보행, 불이나 도구, 언어의 사용 등 다양한 것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징이 모두 ‘큰 뇌’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뇌는 단순히 크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열량의 무려 20%를 뇌가 소모한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예외적으로’ 큰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 했다.

찰스 다윈은 인류가 양 팔을 사용하면서 뇌가 점점 커졌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현재까지 뇌의 크기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격심한 기후변화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고, 임신기간의 변화와 연관 지어 설명하는 학자도 있다. 어쩌다 보니 비정상적으로 커졌는데, 덕분에 남는(?) 뇌로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서 그대로 남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른바 ‘사회적 뇌(Social Brain)’ 가설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즉, 인간사회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뇌도 따라서 커졌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 경쟁이란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제 ‘먹고 살’ 걱정이 없는 현대인이 여전히 경쟁에 몰두하는 것은, 마치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 꾸미기를 중단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이를 ‘달음박질 전략(Runaway strategy)’이라고 한다. 원래 우리가 아름다운 외모를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건강함과 풍족함 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분히 아름답다면, 말 그대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레이싱이 시작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기기 위한 경쟁에서는 ‘충분’한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건강을 해치는 무리한 다이어트나 불필요한 수술을 통해서라도 아름다워지려는 것은, 일단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삐 풀린 경쟁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관심이 라는 양분을 먹고 자란다. 진화정신의학자 폴 길버트에 따르면, 우리의 심리적 자존감은 이른바 ‘사회적 관심 확보능력(SAHP, Social Attention Holding Power)’에 의해서 좌우된다. 삶에 필요한 자원을 겨우 맞춰나가던 원시 시대에는 부족 내에서 충분한 사회적 관심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곧 생존, 그리고 짝짓기로 이어졌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숫자에 울고 웃는 현대인을 보면 과거의 행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건강을 해치는 다이어트가 본말이 전도된 병리적 현상인 것처럼, 필요 이상의 관심을 위해 경쟁하는 것 역시 다양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조작된 희소성은 무의미한 경쟁을 만든다

사회학자 필립 슬레이터는 “희소성이란 가짜다. 희소성의 결과로 나타난 불평등은 이제 인위적으로 희소성을 만들어내는 수준이 됐다. 구식문화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만족한다”고 한 바 있다. 종종 현대인의 삶은 생존경쟁의 연속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 사회는 이미 충분한 자원을 생산하기 때문에, 사실상 ‘생존경쟁’이란 없다. 경쟁에서 패배해도 원시 사회처럼 굶어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경쟁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희소한 사회적 관심’에 대한 경쟁일 뿐이다.

이런 경쟁적 상황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종종 여키스-도슨의 법칙을 들먹인다. 불안이 (어느 정도까지는)증가할수록, 더 높은 성취를 보이게 된다는 이론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이야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그 대가로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공연을 즐길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경쟁의 원칙이 온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경쟁적 환경에서 공부하고, 합격자 수가 정해진 시험을 치른다. 기업에서는 상시적인 경쟁을 통해서 ‘저성과자’를 탈락시킨다. 탈락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경쟁을 통해서 전체 사회가 보다 진보한다는 강력한 믿음이 퍼져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키스-도슨 법칙은 단순한 반복 작업에서 주로 통용될 뿐, 협력이 필요한 공동작업이나 창조성이 필요한 업무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남보다 앞서려고 노력하는 것과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뉴욕의 뒷골목에서 시작한 힙합은 누구나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문화였지만, 이제는 오디션 1등의 힙합만이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간주된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조작된 희소성과 강제적인 경쟁은 수많은 반칙과 저열한 갈등을 조장한다. 교육, 의료, 언론, 심지어는 과학연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회 영역이 이런 무의미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그리고 본질적 가치는 점점 희미해진다.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 정신을 특징으로 하는 힙합의 래퍼가 심사위원의 말 한마디에 안절부절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경쟁의 일상화 뒤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과도한 경쟁적 분위기는 사회경쟁적인 측면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예를 들어, 경쟁에 목매는 언론 환경이 불러일으킨 결과는 아주 치명적이다. 온통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가 넘쳐나고 일부 언론사는 허위기사도 서슴지 않는다. 심리학자 알피 콘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경쟁적인 미국의 여러 방송국과 사실상 경쟁이 없는 영국의 ‘훌륭한’ 공영방송 BBC를 비교하면서, 경쟁을 통해 보다 나은 성취를 이룬다는 믿음은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개인에게 미치는 심리적인 영향이다. 승리하려는 동기를 만들려면, 스스로 자신이 결핍된 상태며 위험에 처해있다고 믿어야 한다. “아직 충분하지 않아. 더 가져야 하고, 더 올라가야 해. 자칫하면 패배자로 남고 말 거야”와 같이 실재하지 않는 불안과 두려움을 주입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경쟁의 패배가 죽음을 의미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패배는 죽음에 대한 강력한 불안감을 일으킨다. 이런 지속적인 자존감의 결여는 결국 다양한 정신적 문제를 유발한다. 삶의 안도감은 승리를 경험하는 찰나의 순간에만 지속될 뿐이다. 경쟁에 대한 집착은 내적 ‘무능함’에 대한 불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난다.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어떨까. 운 좋게 경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만사 좋은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승리는 처벌에 대한 강력한 내적 (거세)불안을 유발한다. 완전한 승리일수록 보다 강력한 죄책감을 수반하는데, 실제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깊은 신경증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현대 사회의 경쟁 시스템은 그리 공정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은 소위 ‘사기꾼 증후군(Imposter syndrome)’을 경험하게 된다. 심리학자 파울린 클랜스 등이 주장한 이 개념은, 유명인들이 종종 자신의 명성이 사실 ‘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중이 알게 될까 두려워하는 현상을 잘 설명해준다.

승리자와 패배자뿐만이 아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 대중들은 각자 경연에서 승리한 사람, 혹은 패배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종종 엄격한 심사위원의 자리에 서보기도 한다. 살벌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왜곡된 경쟁과 가차없는 탈락의 비정함은 점점 일상화된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을 마치 치열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연장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쟁은 필연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진화해왔다. 그러나 인간의 뇌가 경쟁에 맞도록 이미 방향이 정해져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지닌 고도의 사회적 인지 능력이, 무제한의 경쟁이라는 결과를 낳을지 혹은 발전적 협력이라는 결과를 낳을지는 바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인류학자 마샬 살린스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생태적 제한이 진화의 방향을 결정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진화한 인간의 인지 능력이, 역으로 우리의 환경과 문화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안에는 경쟁의 본성도, 그리고 협력의 본성도 같이 자리잡고 있다. 무엇을 더 내세울 것인지는,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자신이 흘린 눈물바다에 홀딱 젖은 이상한 나라의 동물들은 다같이 코카스 경주를 한다. 규칙도 승리자도 없는 경주였다. 경주가 끝나자, 모두가 물었다.

“그러면 상은 누가 주는데?”

도도새는 앨리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아이가 줄거야.”

그러자 모든 동물들이 “상 줘! 상 줘!”하며 앨리스에게 몰려들었다. 앨리스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어 모두에게 사탕을 상으로 주었다.

사탕의 개수는 동물들의 수와 딱 맞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동물들은 무의미한 경쟁을 벌이지만, 승자는 없다. 인간을 상징하는 앨리스는 모두에게 상을 줬고, 이를 통해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 ‘앨리스’ 초판의 삽화에서는 이 장면을, 찰스 다윈을 상징하는 원숭이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우리 심성의 어두운 원시적 그림자를 보여준다. 비록 많은 시청자들이 심심풀이로 보는 가벼운 오락 프로그램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현대인에게 주는 시사점은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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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
  • 에디터

    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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