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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대의를 위한 희생

협력의 공식3



코스타리카
정글은 온통 초록이다. 이 녹색의 천지에서 딸기독화살개구리는 유난히 눈에 띈다. 몸통은 새빨갛고 다리는 코발트 블루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은 천적의 눈을 피하고자 우중충한 보호색을 띠는 마당에, 이들은 무슨 배짱으로 강렬한 원색을 과시하는 걸까.

아니나다를까, 뱀이 몰래 다가온다. 개구리를 덥석 삼킨다. 어라, 이게 무슨 일이지? 다 삼키지 못하고 개구리를 도로 뱉어낸다. 뱀은 온몸을 격렬하게 비틀며 괴로워한다. 딸기독화살개구리가 뱀에게 물리면 피부의 분비샘에서 독이 흘러나온다. 지독한 맛에 놀란 뱀은 개구리를 바로 뱉는다. 뱀은 입안이 한동안 마비되는 등 고초를 겪는다. 이제 뱀은 다시는 딸기독화살개구리를 먹어선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학습했다.

한 가지 슬픈 사실이 있다. 뱀의 입안에 들어갔다가 다시 내뱉어진 개구리는 상처가 심해서 결국 죽고 만다. 어쨌든 개구리 한 마리의 죽음은 딸기독화살개구리 종이 살아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빨간색 먹이엔 독이 들어 있어서 맛이 지독하다고 뱀들에게 엄중히 경고함으로써 다른 딸기독화살개구리들이 안전하게 살게 해주는 것이다. 이상은 지난해 방영된 EBS다큐프라임 ‘진화의 신비, 독’에 제시된 설명이다.

그럴듯하다. 설마 EBS가 틀렸으려고? 그런데…, 조금 께름칙하다. 어떤 개구리 종이 맛있고 어떤 종이 끔찍한 맛인지 아직 모르는 초심자 뱀들을 학습시키기 위해서 딸기독화살개구리가 강렬한 원색과 피부의 독을 함께 진화시켰다는 설명이 맞다고 하자. 이때 조금이라도 눈에 덜 띄는 빛깔의 돌연변이 개구리가 생겨난다면 엄청난 이득을 볼 것이다. 웬만한 뱀들로부터는 안전하지만 초심자 뱀에겐 공격 당할지 모른다는, 남들 다 치르는 위험을 혼자서만 피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포식자에게 지독한 맛임을 경계색으로 알리는 형질이 종의 이득을 위해 진화했다는 설명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집단 선택과 개체 선택을 마구 섞어 쓰다

다윈은 기본적으로 개체 선택론자였고, 아주 드물게만 집단 선택에 기댔다고 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 피셔, 할데인, 라이트는 자연 선택이 (집단이 아니라) 개체의 번식 성공도를 높여줌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이상하게도, 20세기 전반의 생물학자들은 이러한 이론적 성취에 그냥 철저히 무관심했다. 이들은 엄밀한 고려 없이 집단 선택과 개체 선택을 마구 섞어 썼다. 대충 봐서 어떤 형질이 집단에 이로웠겠다 싶으면 집단 선택으로, 개체에 이로웠겠다 싶으면 개체 선택으로 설명하고 만족해하는 식이었다. 피셔, 할데인, 라이트의 논문들이 워낙 수식이 많고 복잡한 탓에 현장 생물학자들이 그 중요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필자는 추측한다.

예를 들어, 위대한 유전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는, 한 종 내에서 유전적 다양성이 보존되는 까닭은 그 종이 갑자기 낯선 환경에 처할 가능성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종이 마치 여러 주식에 골고루 분산투자해 손실을 줄이는 현명한 투자자 워런 버핏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생태학자 워더 앨리는, 나그네쥐(레밍)들이 종종 단체로 바다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는 행동은 개체군이 지나치게 급증해 다 같이 공멸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고 설명했다. 나그네쥐도 딸기독화살개구리 못지않게 의로운 동물인 셈이다.

종의 이득을 태연히 들먹이는 당시의 세태에 깊이 실망했던 젊은 학자들의 말을 들어 보자. 조지 윌리엄스는 키가 매우 크고 턱수염을 멋지게 길러서 언뜻 에이브러햄 링컨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박사학위를 갓 취득하고 1955년에 시카고대에서 연구하던 그는 저명한 생태학자 알프레드 에머슨의 강의를 듣게 됐다. 에머슨은 노화가, 늙고 병든 개체들을 무리에서 내치고 젊고 싱싱한 개체들로 그 빈자리를 채우게끔 집단 선택으로 진화한 적응이라고 설명했다. 종의 보존을 위해 이 한 몸 쇠약하게 만드는 유전자가 선택되었다고? 시쳇말로 멘붕에 빠진 윌리엄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이게 진화생물학의 전부라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게 낫겠어. 자동차 보험 같은 거?”

개체 선택론을 정립한 로널드 피셔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1950년대 케임브리지대 생물학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 학과의 학부생이었던 윌리엄 해밀턴은, 수업에 들어오는 교수들이 이타적 행동은 종을 보존하기 위해 진화했다고 거리낌 없이 가르치는 것에 경악했다. 이를테면, 해밀턴을 가르친 교수 중의 한 명인 곤충생리학자 빈센트 위글스워스가 1964년에 낸 ‘곤충의 일생’ 한 대목을 살펴보자.

곤충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들의 일생은 자기가 속한 종의 생존에 바쳐진다…… 이제 우리는 곤충의 일생이 지향하는……목적과 목표에 비로소 다다랐다. (해밀턴, 1996년, 22쪽에서 재인용).

집단 선택설이 활개를 치는 케임브리지 생물학과의 분위기에 크게 낙담한 이 학생은 혼자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진화이론을 독학하게 된다.
집단 선택설의 ‛끝판왕’이 등장하다

생물학적 적응을 설명할 때 별생각 없이 개체 선택과 집단 선택을 편리하게 오가던 생물학계는 1962년에 이르러 커다란 분수령을 맞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어느 조류학자가 집단 선택설을 왕좌에 올리는 653쪽짜리 대작을 출간한 것이다. 대작답게(?) 저자 이름도 길고 제목도 길었다. 베로 콥너 윈-에드워즈가 쓴 ‘사회적 행동에 관한 동물 분포’였다.

윈-에드워즈는 어느 섬의 해안에서 풀머갈매기 무리를 관찰했다. 번식기에 접어든 개체들의 3분의 1 정도만 짝짓기에 성공할 뿐, 나머지는 서식처에서 밀려나 홀로 숨을 거두곤 했다. 그는 감탄했다. “자원 고갈을 막는 참으로 기막힌 방책이군!” 게다가 풀머갈매기들은 번식기가 되면 모두 함께 모여서 노래했다. “전체 개체 수를 짐작해서 그에 따라 자원 소비량을 자율적으로 줄이기 위함이군!” 이런 식으로 윈-에드워즈는 동물들의 다양한 사회적 행동들은 자원 고갈을 방지해 개체군 크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적응이라고 해석했다.

예를 들어보자. 동물들은 자식을 좀 더 낳을 수 있을듯한 상황에서도 비교적 정해진 수의 자식들만 낳는다. 동물이 출생률을 조절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 어떤 동물도 무한정 자식만 낳진 않으니까 말이다. 일례로 괭이갈매기는 한 둥지당 약 2알, 쥐는 한 배에 4~7마리의 자식들을 낳는다. 문제는 동물이 출생률을 조절하는지가 아니라, 왜 출생률을 조절하는가이다.

윈-에드워즈는 동물들이 집단 전체의 이득을 위해 일부러 자식을 적게 낳는 이타적 행동을 하게끔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각자 출생률을 자율적으로 조절하는 착한 개체들로 구성된 집단이 있다고 하자. 이 집단은 구성원들이 마음껏 자식을 낳는 바람에 곧 자원이 고갈될 위기에 처한 다른 집단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크다. 결국, 세상에는 자기가 낳을 자식 수를 이타적으로 조절하는 개체들로 이뤄진 집단만이 남게 된다.

선택의 수준이 집단이 아니라 개체라는 대안적인 설명도 얼마든지 가능함에 유의하시라. 무조건 자식을 많이 낳는 게 능사가 아니라, 무사히 어른으로 자라나서 나에게 손주를 안겨줄 자식 수를 늘리는 게 중요하다. 따라서 동물들은 궁극적으로 손주의 수를 최대화해 줄 만큼의 자식들만 낳는다. 괭이갈매기의 경우, 10알을 낳아서 손주를 하나도 못 건지는 것보다는 2알을 낳아서 모두 어른까지 잘 길러내는 것이 더 유리했으리라는 설명이다.

두 설명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 쉽게 규명할 수 있다. 괭이갈매기들은 한 둥지에 평균 2알을 낳는다. 둥지들에서 알을 이리저리 꺼내 옮겨준다. 이렇게 알이 하나인 둥지들, 알이 둘인 둥지들, 알이 셋인 둥지들을 만든 다음에 각 집단에서 어른으로 무사히 성장하는 자식 수를 측정하면 된다. 어른으로 무사히 자라는 자식 수를 최대화하려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새들이 번식을 조절한다면, 알이 둘인 둥지에서 어미새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둘 것이다. 개체 입장에서는 알을 더 낳는 편이 낫지만 집단을 위해 이타적으로 번식을 자제한다면, 알이 셋인 둥지에서 어미 새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둘 것이다.

개체 선택설에 입각한 다른 대안적 설명은 윈-에드워즈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다윈 못지않은 새로운 혁명을 주도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찰스 다윈은 자연 선택이 개체의 이득을 늘린다고 주장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개체는 중요하지 않다. 개체의 소소한 이득은 종 전체의 생존이라는 위대한 이득에 언제나 밀려난다고 윈-에드워즈는 역설했다. 그의 책을 펼치면 진리를 전파한다는 사명감에 가득 찬 저자의 흥분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오디오북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대로 집단 선택설이 승리할 것인가

집단 선택설로 무게중심이 빠르게 기울던 시대에 자연 선택은 개체의 수준에 작용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한 삼총사 – 피셔, 할데인, 라이트 – 는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어쨌든 딸기독화살개구리 피부의 독처럼, 당사자에게는 손해만 끼치지만 집단 전체에게는 이득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타적 형질도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가.

삼총사도 이타성에 분명히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피셔는 포식자에게 끔찍한 맛을 선사하는 이타적 형질이 어떻게 자연 선택으로 진화했는지 그의 주저 ‘자연 선택의 유전학적 이론’에서 한 장(章)을 할애해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타성의 진화를 정교한 수식모델로써 본격적으로 탐구하지는 않았다. 혁명은 케임브리지대 도서관에서 혼자 피셔의 책을 붙잡고 씨름하던 학부생 해밀턴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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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일러스트

    황영진
  • 에디터

    윤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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