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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부산항에서 밀입국하려던 신원미상의 남자를 적발했다. 그의 소지품에서 저농축 우라늄 펠릿(원기둥 모양의 작은 제품) 수십 봉지가 쏟아져 나왔다. 같은 시각, 강원도 삼척의 해수욕장에서는 정체불명의 상자가 발견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과학수사대는 상자에서 방사선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런 사건이 없었지만, 무대를 유럽으로 돌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방사성 물질의 유출 및 불법거래 사례가 199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에서 핵물질들이 불법으로 거래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1993년부터 2014년까지 범죄를 목적으로 핵물질을 불법소지하다 적발된 건수는 442건에 달한다. 핵물질 도난 및 분실사건도 714건이나 일어났다.

불법 거래되는 핵물질은 대부분 핵무기에 쓸 수 있을 만큼 고도로 농축되진 않았다. 하지만 테러에 쓸 수는 있다. 폭로 전문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는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더러운 폭탄(dirty bomb)’을 이용해 서방에서 테러할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고 2011년 공개했다. 더러운 폭탄은 핵물질을 넣은 재래식 폭탄을 일컫는다. 폭발력은 일반 폭탄과 비슷하지만, 핵물질을 광범위하게 퍼뜨려 도시 전체를 공황상태에 빠뜨릴 수 있다.

핵물질 불법거래가 늘자 IAEA는 1992년부터 핵감식(Nuclear forensics)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핵감식은 압수된 미지의 핵물질을 분석해 생산시기와 장소, 이동경로를 밝히는 기술이다. 불법 거래를 원천봉쇄하기 위해서다. 1996년엔 국제핵감식 전문가그룹(ITWG)이 결성됐다. 핵감식 기술을 개발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세계기구다. 현재 한국을 포함해 국가 또는 기관 28군데가 속해있다.
 


핵물질 원산지 추적 훈련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유일하게 2012년부터 핵감식 연구를 하고 있다. 한선호 원자력화학연구부 책임연구원이 2012년 독일에 있는 유럽연합 초우라늄원소연구소(ITU)에 1년간 머물며 관련기술을 경험한 것이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원자력화학연구부의 송규석·이치규 책임연구원, 임상호 선임연구원 등 8명이 함께 연구를 하고 있다.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작년 9월 30일부터 두 달간 ITWG가 주최하고 16개국이 참여한 제4차 핵감식훈련(CMX-4)에도 참여했다.

핵감식훈련은 정체불명의 핵물질을 발견했다고 가정하고, 그 핵물질의 원산지 등 범죄수사에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는 훈련이다. ITWG가 나눠주는 핵물질 시료를 분석해 결과를 보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1차에서 3차까지는 플루토늄이나 고농축우라늄을 이용해 단순 측정훈련을
했고, 작년 4차 훈련에서 처음으로 저농축우라늄을 사용해 모의훈련을 했다. 훈련은 세 단계에 걸쳐 차례대로 진행된다. 시료를 받고 24시간, 일주일, 두 달 안에 정체를 분석해야 하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핵감식이 실제 어떤 과정으로 이뤄졌는지, CMX-4 훈련상황을 따라가 보자(긴장감 있는 진행을 위해 일부 내용을 각색했다).

 


 

24시간 내에 농도를 측정하라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 국제공항. 사복경찰이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던 한 독일인을 체포했다. 그의 가방에는 검은색 분말형태의 물질(ES1)이 작은 통에 담긴 채 들어있었고, 여행가방에는 펠릿 형태의 물질(ES2)이 담겨있는 비닐봉지가 있었다.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로 검색해보니 방사능이 측정됐다. 핵물질을 이동시킬 때는 관련서류가 필요한데, 이 독일인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불법소지로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무조건 체포할 수는 없다. 법에서 정한 기준이 있다. 달라스 공항에서는 우라늄-235가 2%(질량기준) 이상 포함된 핵물질 4g 이상을 가지고 있을 때 불법이다. 일단 시료의 양은 4g을 넘는다. 우라늄-235의 농도를 24시간 이내에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핵감식팀에 떨어졌다. 방사선 관리구역에서 X선 형광분석기를 이용해 시료를 측정한 결과, 농도 2% 이상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이제 소지자를 체포할 수 있다.

[우라늄-235( U)
천연 우라늄 광석에는 질량이 서로 다른 세 가지 동위원소(234U, 235U, 238U)가 섞여있다. 이 중에서 열중성자와 부딪쳐 핵이 쪼개지는 동위원소는 235U뿐이다. 천연광석에는 235U가 0.72% 들어있는데, 핵무기로 쓰려면 이 농도가 90% 이상이 되도록 농축을 해야 한다.]

 


일주 내에 핵연료 제조사를 파악하라

경찰이 핵물질 불법소지자를 체포해 심문에 들어갔다. 피의자는 묵비권 행사 중이다. 핵물질이 어디서 나와서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 서둘러 파악해야 한다. 같은 경로로 지금도 계속 핵물질이 빠져나가고 있을 수 있다. 핵감식팀은 쉴 새 없이 바로 다음 단계로 돌입했다. 핵연료 제조회사를 파악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6일(일주일 안에는 임무1의 ‘24시간’도 포함된다).

가지고 있는 증거는 핵물질뿐이다. 핵물질을 담고 있는 통에 적혀있던 제조회사, 제조일자는 이미 심하게 훼손돼 알아보기 힘든 상태다. 앞서 파악한 농축도와 핵물질의 형태만으로 원산지를 파악해야 한다. 데이터베이스 검색 결과 비슷한 물질을 생산하는 공장이 수십 군데다. 이래선 답이 없다.

다행히 경찰에서 중요한 증거를 추가로 확보했다. 피의자가 가려 했던 프랑크푸르트 근교에서 새로운 핵물질(ES3)을 발견한 것이다. 경찰이 증거를 핵감식팀으로 보내왔다. 질량분석기로 우라늄 동위원소비를 측정하고, X선 회절분석기(XRD)로 결정구조를 분석했다. ES3는 앞서 포획했던 ES1, ES2와 같은 물질로 확인됐다. 수사범위가 확 좁아졌다. 주어진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프랑크푸르트 근교에서 이 핵물질을 만드는 곳은 세 군데!



두 달 내 정밀분석을 실시하라
이제 정말 중요한 단계다. 세 군데 공장 중 어디서 이 핵물질을 만들어냈는지 밝혀야 한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우선 공장 세 곳의 공정흐름도를 입수했다. 각 공장의 특이점을 찾아야 한다. 거의 똑같았지만, 다른 곳이 딱 한 군데 있었다. 공장 한 곳에서 우라늄을 분쇄하는 공정에 몰리브덴 볼을 썼다. 혹시 몰리브덴이 핵연료에 불순물로 섞여 들어가지 않았을까. 역시나, 분석결과 미량의 몰리브덴이 발견됐다. 바로 이 공장에서 유출된 제품이었다.

마지막으로 언제 유출된 제품인지 파악해야 한다. 핵연료는 나이테처럼 시간을 자신의 몸속에 기록한다. 우라늄이 시간이 지나면 다른 물질로 바뀌기 때문이다. 공장에서는 순도 100%에 가까운 우라늄 제품을 만들어 낸다. 공장에서 나와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알파붕괴가 일어나 토륨, 프로탁티늄 같은 ‘딸핵종’으로 바뀐다. 알파붕괴 속도는 일정하므로, 딸핵종이 얼마나 섞여있는지 알면 제품이 언제 생산됐는지도 알 수 있다.

 

 



핵감식, 기존 과학수사와 손잡다

핵감식은 과학수사의 새로운 영역이다. 핵반응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고급인력과 핵물질을 분석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한, 특수영역이기도 하다. 지문이나 DNA처럼 중요한 범죄단서가 방사성 물질에 오염됐을 때도 나설 수 있는 사람은 핵감식팀밖에 없다. 한선호 연구원은 “유럽연합에서는 핵감식팀이 과학수사팀과 협력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앞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 과학수사조직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CMX-4에서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처음 참가한 것치고는 좋은 성과를 거뒀다. 임상호 선임연구원은 “전반적인 측정결과가 다른 나라와 유사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연구원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연구할 주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황이나 질소, 산소의 동위원소는 지역에 따라서 미세하게 차이가 납니다. 핵연료를 만들 때 이런 원소가 먼지에 섞여 불순물로 들어옵니다. 따라서 지역에 따른 동위원소 차이를 알면 핵연료만 분석해도 원산지를 파악할 수 있죠. 언젠간 그 단계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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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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