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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 김담, 조선의 우주를 열다



인류가 400년 만에 초신성 폭발을 관측했을 당시 김제완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는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올해 노벨물리학상의 주인공들과 같은 중성미자(뉴트리노)를 연구하는 입자물리학자인 그는 SN1987A 초신성에서 방출된 중성미자 연구를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가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초신성 관측 이끈 조선 천문학

“당시까지 한국 학자들은 케플러의 1604년 초신성 관측 기록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조선의 기록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김 교수가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은 ‘역사적인 초신성(The Historical Supernovae)’이라는 책이었다. 그 책에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1604년 초신성 관측 내용이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의 관측 기록과 함께 그래프로 그려져 있었다. 날짜별로 달라지는 초신성의 위치와 밝기 등을 기록한 것이다. 중국인 학자가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해 서양과 동양의 1604년 초신성 관측 기록을 하나로 정리했다. 특히 조선의 관측 기록은 케플러가 기록한 것보다 정교해서 그 자체로 초신성의 유형이 Ⅰ형이라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반면 케플러의 기록만으로는 초신성의 유형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김 교수의 발견으로 한국 천문학계는 조선시대의 천문학 수준을 재조명하게 됐다. 전 세계에 남아 있는 초신성에 대한 기록 중 가장 구체적인 기록을 남긴 것이 조선의 천문관측기관인 서운관의 일관(日官)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문학 불모지’와 다름없는 조선에서 이 같은 성과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운관의 토대를 다진 무송헌(撫松軒) 김담(1416~1464)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내년에 탄생 600주년을 맞는 김담은 장영실과 이순지, 이천 등의 계보를 잇는 조선 초기의 대표 천문학자였다.


칠정산내편(왼쪽)과 칠정산외편. 중국과 아랍 역법체계를 해석한 뒤 조선을 기준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일식을 정확히 예측하다

“역산을 정밀하게 하는 데 김담 같은 이가 없기 때문에 쓴 것인데, 무슨 불가함이 있는가.” 세종 31년(1449년), 임금은 부친과 딸의 연이은 죽음으로 고향에 돌아가 있던 김담을 호군(護軍·정4품 관직)으로 임명하고 역산을 담당하게 했다. 그러자 김담은 물론 사간원에서도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맡기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상서를 올렸지만, 세종과 세자(문종)는 김담을 ‘대체 불가’한 인재로 여겨 거듭된 요청을 묵살했다. 그만큼 김담은 세종의 총애를 받는 학자였다.

지금의 경북 영주지방에서 태어난 김담은 20살(1435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집현전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1등이 사육신으로 잘 알려진 성삼문이었던 것을 보면 김담의 총명함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담은 당시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담당하던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간의대를 맡을 적임자로 가장 먼저 추천됐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역법은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해 한 달과 한 해 같은 일정한 주기를 시간으로 엮고, 일식과 월식 등을 미리 예측하는 계산법을 말한다. 조선은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토대로 천문현상을 예측하고자 했는데, 그 원리와 계산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예측 결과가 부정확할 때가 많았다. 특히 일식은 왕을 상징하는 태양이 가려지는 현상이기 때문에 하늘이 왕에게 주는 모반의 징조라고 생각해 예보에 신경을 썼다. 왕은 일식이 일어나는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하도록 지시했고, 일식이 일어나는 동안 아무 탈 없이 끝날 것을 기원하는 구식례(求食禮)를 치뤘다. 하지만 세종 4년(1422년) 1월 1일에 일어난 일식은 예측보다 1각(14분 24초)이 늦어졌고, 당황한 세종은 예보 담당관인 이천봉에게 곤장형을 내렸다. 결국 세종은 그해 12월에 역법 교정을 명했다.

중국의 역법을 토대로 계산한 결과가 계속해서 오류를 냈던 이유는 ‘기준점’ 때문이었다. 수시력은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기준이 북경이었기 때문에 한양을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세종의 명을 받은 집현전 학자들은 1422년부터 일식과 월식의 계산 오류를 보정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한편 간의와 혼천의, 자격루, 앙구일부 등의 천문관측기구를 제작했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역법 원리와 한양을 중심으로 한 천문관측 결과를 집대성한 끝에 조선의 역법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완성했다.

칠정산은 해와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일곱 개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해 일식과 월식, 날짜와 계절의 변화를 계산할 수 있게 한 역법서다. 김담은 이순지와 함께 1444년 간행된 칠정산외편을 집필했다. 칠정산내편은 중국 역법을 조선에 맞게 수정한것이고, 외편은 명나라에서 번역한 아랍 역법을 토대로 만든 조선의 역법체계다.

특히 칠정산외편은 명나라 학자들이 아랍 역법을 풀이하면서 범한 오류까지 수정해 한양을 기준으로 일식과 월식을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게 했다. 실제로 칠정산외편을 토대로 계산한 1447년 음력 8월 1일 일식은 예보된 시간인 오후 4시 50분 27초에 정확하게 일어나 6시 55분 53초에 끝났다. 이로써 조선은 독자적으로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세계의 밤하늘을 담다

김담은 칠정산외편에 밤하늘에 보이는 별 목록도 정리했다. 이 목록표에는 14세기 명나라에서 만든 명역천문서(名譯天文書)에 기록된 30개의 별보다 월등히 많은 277개 별의 위치와 밝기가 기록돼 있다. 특히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동일한 목록표가 편찬된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칠정산외편이 중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칠정산외편의 별 목록표가 보여주는 특징은 그리스식 별자리 이름을 썼다는 점이다. 천문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칠정산외편의 별 목록표가 아랍의 별 목록표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서기 150년에 편집한 별 목록표를 아랍어로 번역한 ‘알마게스트’가 이후 동서양 천문학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최근 이용복 서울교대 명예교수와 이용삼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교수, 전준혁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원 등은 칠정산외편의 별 목록표와 알마게스트를 비교 분석해 칠정산외편의 별 목록표가 알마게스트를 포함한 2~3개의 목록을 편집해 만든 것이라고 추정하는 연구 결과를 영국 ‘왕립천문학회월간회보’ 10월 12일자 온라인판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지구의 자전축이 회전하는 팽이처럼 세차운동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지구에서 보이는 별의 위치가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해 별 목록표의 기준시기를 1362.2년으로 산출했다. 그리고 현재 밤하늘 별들의 위치를 1362.2년으로 환산해 목록에 있는 277개의 별 중에서 274개(98.9%)를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목록표상의 별의 위치는 현재의 것과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연구팀은 그 차이를 최소로 만드는 기준시기와 각도를 찾아 그래프 위에 표시했다. 그런 뒤 알마게스트에 수록된 별을 같은 방식으로 분석한 자료와 비교했다. 그 결과 칠정산외편의 별 목록표의 기준시기가 서로 다른 2~3개의 그룹으로 묶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제작된 시기가 다른 2~3개의 별 목록을 혼합해 별 목록표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전준혁 연구원은 “별 목록표를 만들었다는 것은 김담 선생이 중국뿐 아닌 아랍의 선진 천문학 지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며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달과 행성의 위치를 비교하고 정밀하게 관측하는 데 별 목록표를 활용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후대 천문학자들의 길잡이가 되다

김담이 조선 천문학 발전에 미친 영향력은 단순히 역법체계 구축에서 끝나지 않는다. 김담은 조선의 관측천문학 발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604년 조선 일관들의 초신성 발견과 김담을 연관지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종은 1449년 말에 혜성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이순지와 김담에게 혜성을 관측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혜성은 조선시대에 아홉 번째로 나타난 혜성이었는데,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뒤 1450년 초에 하늘에서 사라졌다. 주목할 점은 이순지와 김담이 이 혜성을 관측한 이후부터 혜성 관측 기록이 이전보다 풍부해졌다는 점이다. 그때까지 혜성 출현을 확인한 것은 총 8번이었고, 1회에서 최대 6회 관측에 그쳤다.

하지만 1450년 이후 혜성이 나타날 때마다 관측 횟수가 최대 38회까지 많아졌고, 관측 내용도 혜성이 출현한 방위와 별자리, 꼬리의 길이까지 상세해졌다. 또 이순지와 김담처럼 특별 관측자를 임명해 관측을 맡긴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성종 21년(1490년) 의 기록에는 혜성을 패성(星)과 요성(妖星)으로 구분하는 방법과, 초신성을 뜻하는 객성(客星)을 알아보는 방법 등도 남아 있다.

물론 이 모든 업적이 김담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김담의 멘토였던 이순지와, 정밀한 관측기구를 만들었던 장영실, 이천 등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물론 이순지와 장영실, 이천은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돼 있을 정도 그 업적을 인정받고 있는 반면 김담은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용복 교수는 9월 24일 고등과학원에서 열린 김담 탄생 6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김담 선생은 그 업적에 비해 많이 주목받지 못했다”며 “(탄생 600주년이)그의 과학적인 업적에 주목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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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최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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