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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 · 의학분야 연구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생물학연구정보센터(이하 브릭)’가 지난 7월 이용자 116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논문 저자권 관련 진단’ 설문조사를 보자. 전체 답변자의 48%가 “최근 3년간 저자 순서교체나 저자 끼워넣기 등 연구 부정행위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바로 옆에서 목격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66%에 이른다. 소수가 겪은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일이라는 뜻이다.


연구자 절반이 경험… 이슈화도 안돼

강도를 당하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강도질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논문 강도질은 신고하기 어렵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해 조사과정에서 누가 누구를 고발했는지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피해자는 고발 뒤에도 가해자 밑에서 연구인생을 저당 잡힌 채 계속 논문을 써야 한다. 설사 다른 연구실로 옮겨간다 해도 이미 학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어 ‘왕따’를 면하기 힘들다. 조진호 서울대 연구윤리팀장은 “표절이나 위조, 변조 등 다른 연구부정행위와 달리 저자권 문제는 이해관계자가 명확하므로 제보자가 익명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면서 “제보자가 느끼는 부담감이 가장 클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저자권 문제는 아직도 수면 아래 있다. 2013년 2월 브릭에서 이용자 102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연구윤리 문제 중 저자권(authorship) 때문에 고민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41%). 반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대부분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졌다. ‘혼자 고민만 했다(25%)’, ‘실험실 선후배와 논의했다(39%)’ 등이다. 연구윤리 전문가와 논의한 사람은 3%에 불과했다. 그나마 논의를 해도 대부분 상담으로 그친다. 조 팀장은 “그동안 상담한 사람 중에 구체적인 제보로 이어진 경우는 없었다”며 “실제 문제를 겪는 사람 중 제보하는 사람은 열 중 하나도 안 될 것”이라고 했다.


표절과 비교해보면 저자권 문제 제보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이인재 서울교대 교수팀이 전국의 대학 연구자 2679명과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자 39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2014년 발표한 ‘국내 연구윤리 활동 실태 조사 연구(이하 연구윤리 실태 조사)’를 보자. 최근 2년간 연구부정행위를 겪은 사람 중 ‘부당한 논문 저자 표시’를 겪었다고 답한 비율은 32.2%(대학)~43.9%(출연연)로, 표절보다 많거나 비슷했다. 하지만 적발건수는 표절의 7% 수준이다. 이인재 교수는 “그동안 문제를 삼지 않아서 그렇지, 문제를 삼기 시작하면 표절이나 위변조보다 부당한 저자 표시가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문분야별로 논문저자갈등 빈도를 조사한 자료는 없다. 하지만 이인재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이공계에서 갈등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이공계 연구의 특성 때문이다. 일단 연구비가 많고 실험의 규모가 크다. 시간이 오래 걸리며 매우 다양한 실험장비와 측정방법이 동원된다. 그래서 여러 연구자들이 분업해서 실험을 진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 명의 연구가 학술지 논문에 필요한 양과 질을 채우지 못해 여러 명의 연구가 하나로 묶이기도 한다.


이런 조건이다 보니 연구 전체를 감독하고 조율하는 연구책임자(대부분 교수)의 역할이 크다. 브릭의 7월 설문조사에서 ‘교신저자가 다른 저자와 상의 없이 저자 순서를 단독으로 결정했다’고 답한 응답자가 49%에 이른다. 연구실에서 지도교수는 거의 절대 권력이다. 이 교수는 “대학원생의 논문에 지도교수가 교신저자로 이름을 올리는 일도 이공계에선 당연하다”고 말한다. 인문계는 다르다. 학생이 단독으로 논문을 작성하기도 하며, 이 경우 지도교수가 저자로 들어가기 힘들다.


‘이공계 연구환경’은 저자권 문제가 발생하기 좋은 토양이다. 하지만 근본원인은 아니다. 황은성 서울시립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같은 이공계라도 선진국에선 갈등이 덜하다”고 말한다.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를 풀 열쇠도 발견할 수 있다. 근본원인 중 첫 번째는 성과압박이다. 연구윤리 실태조사에서 연구부정행위를 왜 저지르는지 묻는 질문에 ‘많은 업적을 내야 하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50.7%로 가장 많았다. 안정적인 직장이든 연구비 지원이든 모두 해외유명저널에 실리는 논문으로 판가름 난다. 논문이 곧 밥줄인 셈이다.
2005년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연구부정행위를 폭로한 류영준 강원대 의대 교수는 “젊은 교수들도 연구부정행위에서 예외는 아니다”고 말했다. 지위가 불안정하고 경쟁이 더 치열하기 때문이다. 남창훈 DGIST 기초학부 교수는 “저자권이 ‘과학계의 화폐’와 같아서 구직, 프로젝트 획득, 연구권력 구축 모두와 아주 긴밀히 연동돼 있다”고 말한다. 실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는 사람을 뽑을 때 논문으로 평가한다. B 박사도 “논문을 뺏긴 탓에 평점이 모자라 지원하지 못한 직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걸려도 그만… 솜방망이 처벌

저자조작을 하다 걸려도 처벌이 약하다. 연구윤리 실태조사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부당한 저자표시’로 적발된 9건 가운데 해임, 파면, 연구참여 제한, 승진상 불이익, 임용취소 같은 중징계를 받은 연구자는 ‘없다’. 주의(2건), 경고(3건), 견책(1건), 정직(1건) 등 가벼운 징계가 전부다. 고등학생 아들을 논문 세 편에 제1저자로 올린 사실이 밝혀져 최근 물의를 빚은 국립암센터 김 모 교수 역시 감봉 3개월이라는 솜방망이를 맞았다.





동기부여는 강하고 처벌은 약한데, 제어장치마저 없다. 연구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구본경 영국 캠브리지대 줄기세포연구소 그룹리더는 “저자 조작 사건이 영국에서 발생했다면 교수뿐 아니라 소속 연구소, 학교, 관련 공무원과 기관이 모두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이 발생하면 연대책임을 묻는지라, 상위기관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평소 하위기관에 철저히 연구윤리 교육을 한다. 연구소장과 교수도 여기서 피해갈 수 없다. 시험도 친다. 대학원생 역시 입학부터 졸업까지 연구윤리 이야기를 꾸준히 듣는다.


마지막 원인은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교수와 학생의 갑을 관계다. 생물학 연구자 D는 “일상생활에서 갑과 을인데, 논문 쓸 때도 그 관계가 이어진다”며 “연구를 계속하려면 교수의 추천서도 엄청 중요하다”고 했다. 또 “교수와 대립하면 연구실을 떠나야 하는데, 그러면 연구했던 데이터 다 놓고 몸만 나와야 한다”고 했다. 브릭의 7월 설문조사에서 논문저자갈등을 경험한 비율은 석사과정(29%)보다 박사과정(49%)이 높았고, 연구원(53%)과 박사후과정(55%)으로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교수의 말 한마디에 따라 학생은 진로가 뒤바뀔 수도 있다. 그 절박함을 악용하는 것이다. 선진국에선 이런 일을 보기 힘들다. 구 박사는 “캠브리지대에선 실험실에 학생 숫자를 늘리기가 한국보다 2~3배 어렵고, 졸업도 교수 책임”이라며 “고용법에 준하는 각종 규제가 있어서 학생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했다.





문제를 풀기는 쉽지 않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세 가지가 현실적인 대안이다.


1. 저자 순서와 역할을 미리 등록한다

류영준 교수는 “저자 사전 등록제”를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선 연구가 다 끝나고 논문출판 직전에 가서야 저자 순서를 결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반면 선진국에선 연구를 시작하기 전 저자 순서와 역할을 미리 정하고, 중간에 역할이 바뀔 때마다 협의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갈등이 생길 여지가 훨씬 적다. 이런 문화를 제도화시켜 강제하는 게 저자 사전 등록제다. 연구기획단계에서 저자의 순서와 역할을 국가기관에 등록한다.


정부기관에 저자등록을 하면 공식적인 기록이 남는다. 논문출판 단계에서 엉뚱한 사람을 저자로 끼워 넣으려고 해도 일일이 사유를 적어야 해 쉽지 않다. 부정행위자에게 부담감을 줄 수 있다. 또 저자에서 밀려난 사람이 제보를 할 때도 확실한 증거가 있으므로 힘이 된다. 류 교수는 “양심적인 연구자가 부당한 행위에 저항할 수 있도록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선배 교수가 부정행위를 함께 하자고 해도 저항할 논리가 궁색한 형편이다.


2. 연구부정을 감독할 정부산하 위원회를 만든다

이인재 교수는 “정부산하 위원회를 만들어 연구부정 조사의 상급심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현재는 연구부정행위가 생기면 각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자체조사를 벌이고 당사자를 징계한다. 만약 해당기관에서 사건을 유야무야 덮어버리거나, 솜방망이 징계를 줄 경우 제보자가 다시 문제제기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이와 다르게 미국이나 북유럽 국가에는 정부산하 연구진실성위원회가 있다. 정부에서 연구비를 받은 사람이 연구부정행위를 저지를 경우, 위원회가 직접 나서서 해당기관의 조사행위를 감독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조진호 팀장도 “연구부정행위가 발생한 기관에서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위원회에 맡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법원으로 치면 위원회가 상급심 역할을 맡는 셈이다. 대학 자체적으로 조사·처벌한 사건에 불복하는 사람은 위원회에 상고하면 된다. 이를 통해 대학의 ‘제 식구 감싸기’를 약간이나마 줄일 수 있다. 이번 국립암센터 논문저자조작 사건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E 연구원은 “졸업 후에라도 제보할 수 있는 익명의 신문고가 있고, 처벌이 강력하면 좋겠다”며 “저자권을 지켜주는 일은 사회약자 보호이자, 사회정의 실현”이라고 말했다.


3. 기관마다 연구윤리 전담관리자를 둔다

이인재 교수는 “각 기관마다 연구윤리 전담관리자를 배치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선진국에는 각 대학과 연구기관마다 연구윤리를 도맡아 관리하는 직원이 있다. 이들은 연구자에게 실제 연구부정행위 사례를 상시적으로 교육하고 시험으로 확인한다. 피해를 호소하는 연구자를 상담하기도 한다. 이런 노하우가 쌓여야 제보가 들어왔을 때 사건을 제대로 검증하고 처리하며 제도를 바꿔나갈 수 있다. 이 교수는 “연구윤리 업무 담당자의 인식과 열정, 전문성이 해당 대학의 연구윤리 수준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학에는 연구윤리 전담관리자가 거의 없다. 전문가를 양성하는 과정도 손에 꼽는다. 연구윤리 실태 조사에 따르면 다른 일을 주로 하면서 연구윤리 업무를 부차적으로 하는 직원이 전체의 96.3%다. 조진호 팀장은 “집중력과 전문성의 문제를 봤을 때 전담자가 있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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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경 박사는 “저자권은 연구자의 기본권”이라고 말합니다. 인권처럼 연구자들이 반드시 되찾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라는 말이지요. 저자권만 기본권은 아닙니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지금도 정당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며 연구실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동아에서는 연구자의 기본권을 계속 다뤄나갈 예정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당한 대학원생이나 출연연 연구자분들은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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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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