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냐, 아냐. 아직 아니라고!” 개강한 지 일주일, 소년과 소녀는 아직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특히 소녀는 대학 마지막 방학을 끝내고 마지막 학기를 맞았다는 데 아쉬움이 큽니다. 짜증은 더해지는데,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네요. “9월만이라도 마지막 힘을 짜내서 놀아야 해. 이번 주말은 시원한 곳으로 떠나는 거야!” 주먹을 불끈 쥔 소녀가 초록색 검색창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동굴입니다. “으하하, 그래 여기다, 여기. 충청북도에 있는 석회암 동굴! 멀지도 않네~^0^” 소년은 별 시답잖은 말을 꺼내봅니다. “나 공부해야 돼”라고.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1분도 안돼 번개처럼 버스표예매를 해결하네요.
남녀의 에어컨 주도권 씨름, 이유가 있다
동굴 안에 들어서자마자 소녀가 몸을 움츠립니다. 밖은 아직도 30℃를 넘나드는데 동굴 안은 시원하다 못해 약간 쌀쌀하네요. 지하에 발달한 동굴의 내부 온도는 1년 내내 20℃ 이하를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소녀의 호들갑을 지켜 보던 소년이 ‘세상에 없던 순수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자기 추워? 이상하다. 피하지방 많은데 왜 춥지. 참 이상하네.” …이 사태를 어쩌면 좋을까요. 1초 뒤 벌어질 잔혹극을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너, 이 -삐리리- 누가 그런 이상한 삐-소리를 –삐리리- 삐이---------.”
여자가 피하지방이 많아서 남자보다 추위를 덜 느낀다는 말은 잘못 알려진 상식입니다. 저체온증이나 동상 등에 저항력이 있다는 거지, 평소엔 오히려 남자보다 추위를 더 느낍니다. 체중 대비 근육과 지방이 많고 부피 대비 피부 표면적이 적은 사람, 즉 근육과 지방을 통해 열을 많이 생성하고 피부를 통해 열을 적게 발산하는 사람이 추위를 덜 탑니다. 평균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이 이런 체형에 더 가깝지요. “여름 실내에서 남자는 에어컨 온도를 자꾸 낮추고 여자는 자꾸 높이는 게 괜한 씨름이 아니래도. 여자는 신경이랑 혈관도 예민하게 발달해 있기 때문에 피부 온도도 더 많이 떨어진대. 그러니까 네 겉옷 좀 벗어줘. 아잉.”
소년이 다시 그 순수한 눈빛으로 말합니다. “아냐, 아냐. 그래도 이상해. 평소에 신경질이 많으면 콩팥에 있는 부신이라는 내분비기관에서 열 생산과 방출에 관여하는 에피네프린,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호르몬이 많이 나온단 말야. 너는 딱 추위에 강한 체질이라니까?”
아마도 소년은 시원한 동굴 속에서 짜릿하게 굴려지고(?) 싶었나 봐요.

전세계 석유자원의 절반이 생산되는 석회암
사람들과 일렬로 늘어서서 좁고 가파른 철제 계단위를 아슬아슬하게 이동하고 나니, 웅장한 지하궁전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소녀가 입을 다물지 못하네요.
“저 고드름같이 생긴 거, 이름이 뭐더라? 중학교 때 배운 것 같은데 벌써 가물가물하네.” 소년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듭니다. “휴…. 누나도 참. 이럴 때 꼭 나이 먹은걸 티 낸다니까.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된 내가 알려주지!” 바로 그 때, 안내자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립니다. “석회암 지대에 이산화탄소가 섞인 빗물이 흘러들면,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반응해 탄산수소칼슘으로 물에 녹습니다. 침식이 일어나면서 동굴이 만들어지는 거지요.”
“…내가 하려던 말이 저거야.” 무안해진 소년이 긁적이네요. “그럼, 너 그거 알아? 전세계 석유자원 절반이 석회암에서 생산된다는 사실? 동굴에 희귀생물도 많이 살고, 그걸로 치료약도 개발하고. 기후변화도 추적한다는 거 알았어? 앙?” 고소해진 소녀가 빙그레 웃으며 소년을 타이릅니다. “오구오구, 그랬쪄요? 잘했쪄요
~.” “우씨!”

물에 녹았던 탄산칼슘이 다시 굳으면서 생긴 것이 바로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석순, 종유석, 석주입니다. 천장에서 바닥으로 한 방울씩 떨어져 마치 대나무 순처럼 쌓인 게 석순, 천장에서 흐르다가 그대로 굳어버린 고드름이 종유석이지요. 석순과 종유석이 하나로 이어진 기둥은 석주라고 부릅니다.
“와, 이거 봐. 조금만 있으면 이어지겠다!” 닿을 듯 말듯 미세한 틈을 두고 떨어져 있는 석순과 종유석을 ‘사랑의 기둥’이라며 호들갑 떠는 소녀를 보며, 소년이 말합니다. “얘들은 1년에 고작 0.1mm 자라. 그마저도 이제는 사람때문에 동굴이 너무 많이 망가져서 안 자란대. 수천 년이 지난들 석주로 만날 수 있을까?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을 뜻하는 것 같다.ㅜㅜ 우린 석주처럼 평생 붙어 있을까?” 웬일로 소녀가 얼굴을 붉히네요.
“그…,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