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이하 그):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죠.
기자(이하 기): (관심 없다는 듯) 그렇게 하세요~. 나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든요.
그: 아마…, 당신은 나의 이야기가 필요할 거예요.
기: 다들 그렇게 말하죠. 자신의 이야기가 가장 특별하다고.
그: 나는 뱀파이어예요.
기: …아, 네. 그럼 뭐 제 피도 빨아먹나요?
그: 당신 나이 정도면…, 내 젊음을 유지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겠네요.
기: 요즘 같은 세상에 뱀파이어라니.
그: 아, 내 말을 조금 수정해야겠네요. 정확히 말하면 현대판 뱀파이어랄까. 피를 빨아먹는 건 아니고, 피를 뽑아서 내 혈액에 주입하는 뱀파이어죠.
기: 왜 그런 짓을 하죠?
그: 젊음 때문이죠. 아직 20대인 당신의 혈액엔 노화를 방지하는 물질이 있거든요.
기: 근거는?
그: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 이리나 콘보이 박사는 늙은 쥐와 젊은 쥐의 혈관을 연결했어요. 그러자 늙은 쥐는 근육의 상처 회복 속도가 빨라졌고 근육줄기세포의 활성이 증가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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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대단하… 응? 근데 혈관을 연결했다고요?
그: 병체결합법(parabiosis)이라고 해요. 쥐의 옆구리에 상처를 낸 뒤 두 쥐를 붙여놔요. 그럼 상처가 아무는 과정에서 두 쥐의 피부가 하나로 붙게 되죠. 끊어졌던 두 쥐의 모세혈관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요. 서로의 혈액과 체액을 공유하게 되는 거예요.
기: 조금…, 무서운 실험이네요.
그: 어쨌건 그 때까지만 해도 ‘젊은 피에는 노화를 방지하는 어떤 물질이 있다’ 정도만 찾아낸 거였어요. 과학자들은 그 ‘어떤 물질’을 찾기 위해 달려들었죠. 그리고 2013년, 미국 하버드대 에이미 웨이저스 교수팀은그 물질이 단백질 GDF11이라는 것을 찾아냈어요.
기: (의아해하며) GDF11이요??
그: 네, 맞아요. 연구팀은 노화가 진행될수록 GDF11이라는 단백질의 혈중농도가 감소한다는 사실을 밝혔어요. 이 물질이 부족하면 노화가 온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결과였죠. 그래서 늙은 쥐에 이 단백질을 주사한 뒤 변화를 관찰해 과학저널 ‘셀’에 발표했어요.
그: 혈액 박출 능력이 향상되고 손상된 골격근이 회복됐어요. 우리가 흔히 노화라고 말하는 증상들을 극복한 거죠. 그러니까 당신의 피에는 나를 젊게 해줄 물질이….
기: (다급하게) 잠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아요. GDF11이 노화를 억제하는 단백질이 확실한가요? 저는 GDF11이 오히려 근육이 만들어지는 걸 억제하는 단백질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거겠죠.
기: 원래 GDF11은 근육줄기세포가 성숙한 근육세포로 분화하는 것을 억제하는 단백질로 알려져 있었어요. 당신이 말한 2013년 웨이저스 교수팀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는요.
그: 그러니까 제 말대로 웨이저스 교수팀의 연구가 맞다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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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끝까지 들어봐요. GDF11에 대해 연구하던 미국 노바티스 생명의학연구소 데이비드 글래스 박사팀은 웨이저스 교수팀의 결과를 보고 ‘우리가 실험 과정에서 빠뜨린 게 있나?’라고 고민했다고 해요.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였으니까요. 다시 연구에 착수한 글래스 박사팀은 올해 5월 19일, ‘셀 메타볼리즘’에 GDF11이 기존에 알려져 있던 대로 근육의 재생을 막는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어요.
그: …(당황하며) 그럴 리가…. 기 GDF11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 진행 중이에요(인터뷰 참조).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기다려요. 게다가 GDF11 말고도 노화를 막아줄 물질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니까요. 그 중 대표적인 게 마이크로RNA(miRNA)예요. miRNA는 핵산 22~23개로 이뤄진 아주 작은 RNA죠. 사람 몸속에 수백 개가 넘어요. 하지만 최근까지도 기능이 알려지지 않은 miRNA가 정말 많아요.
그: 그중 노화를 방지하는 miRNA가 있다는 건가요?
기: 맞아요! miRNA는 특정 단백질의 발현을 낮추는 역할을 하는데요. 이광표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하 생명연) 전임연구원은, 근육줄기세포가 근육으로 분화하는 것을 저해하는 단백질(SMAD4)의 발현을 억제하는 miRNA를 발견해 7월 29일 국제학술지 ‘유전자와 발생’에 발표했어요. 즉, 근육줄기세포가 근육으로 분화하게끔 도와주는 miRNA를 발견한 거죠.
그: 단백질은 아니지만, 노화를 방지하는 물질이군요. 그럼… (눈을 희번득하게 뜨며) 결과적으로 당신 피를 주입하면 노화를 막을 수 있단 말이네요?
기: (뒷걸음질 치며) 아아! 잠깐만요. 아쉽게도 이 물질은 혈액에서 발견된 건 아니에요.
그: (의심의 눈초리로) 그럼 어디서 발견된 건데요?
기: 근육줄기세포에서 발견된 miRNA예요. 연구팀은 노화된 쥐의 근육줄기세포에 이 miRNA의 양이 현저히 적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래서 늙은 쥐에게 인위적으로 해당 miRNA을 발현시켰고, 근육 분화가 활발해 지는 걸 확인했죠.
그: 그럼 혈액에는 노화를 방지하는 miRNA가 없나요?
기: 전문가들은 혈액에도 있을 거라고 봐요. 생명연에서도 현재 혈액에 있는 miRNA를 연구하고 있고요. 3년 후쯤이면 알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때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해요. 그때도 굳이 피가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뒷걸음질 쳐 사라지고, 뱀파이어는 혼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