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남북고위급 회담 당시 남한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남한 측에 비공식적으로 요청한 사항이 있었다. ‘물코끼리벌레(Bagous kagiash)’라는 해충을 박멸할 살충제를 지원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남한은 이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물코끼리 벌레’가 어떤 생물인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코끼리벌레가 남한에서는 ‘물바구미’라고 부르는, 일본에서 들어온 외래해충이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수년 뒤에야 밝혀졌다.
남북 간 전문용어의 차이는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다. 특히 분단된 이후에 발전한 분야의 새로운 현상, 새로 발견된 생물의 이름은 판이하게 다르다. 예를 들면, 곤충을 분류하는 402개 과(科) 중에서 316개 과의 이름이 다를 정도다.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모를 뿐 아니라 대화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과거에 북한 아나운서가 축구경기를 중계하면서 ‘코너킥’을 ‘모서리 차기’라고 말한 것이 한때 유머의 소재로 쓰인적이 있다. 하지만 전문 학술용어의 차이는 웃고 넘겨서는 안 될 일이다. 현재 남북한에서는 수과학, 공학, 농수산학, 의약학 등 과학기술 전 분야에서 30만 개가 넘는 고유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전문 과학용어는 법령이나 국가표준(KS), 각종 기술 표준에 적용돼 학술, 통신, 보건, 안전, 환경 등 넓은 분야에서 국민 생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과학 용어 어떻게 다를까
남북한의 용어 차이는 크게 5가지로 분류된다. 그중 그나마 차이가 적은 것이 두음법칙에 따른 용어의 차이다. 북한에서는 사이시옷을 사용하지 않고 두음법칙도 따르지 않는다. 즉 ‘ㄹ’로 시작하는 글자도 단어 맨 앞에 올 수 있다. 유산(流産)을 ‘류산’, 난소를 ‘란 소’, 황을 ‘류황’, 임업을 ‘림업’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접해온 북한의 일반 언어와 비교해 크게 생소하지는 않다.
문제는 외래어를 우리 말로 표기할 때다. 과학 용어의 상당 부분은 외래어에서 유래했다. 남한은 국제 추세에 맞춰 외래어의 미국식(영어) 발음을 충실하게 소리로 옮겨 사용한다. 반면 북한은 러시아어를 기본으로 하면서, 독일어와 일본어 용어도 자주 이용한다. 칼로리를 ‘카로리’, 코사인을 ‘코시누스’, 에너지를 ‘에네르기’, 뉴런을 ‘노이론’이라고 하는 식이다. 참고로 외래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음차하는 경향은 한중일 3국 가운데 일본이 가장 심하고 중국이 가장 덜하다.
한국은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의 과학 용어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낯선 것은 어원이 외래어인 조선어 용어들이다. 예를 들어 다이오드(diode)를 ‘이극소자’로, 드라이아이스(dry ice)를 ‘고체탄산’으로, 임피던스(impedance)를 ‘완전저항’으로 읽고 쓴다. 과거에는 북한이 사용하는 조선어를 보고 북한이 남한보다 우리말을 더 많이 발전시켰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실상 북한의 조선어는 한자로 이뤄진 게 매우 많다. 북한은 한자어 표기를 원칙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외래어를 조선어로 바꿀 경우 오히려 뜻을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그밖에도 뜻은 같은데 다른 한자를 써서 헷갈리는 용어들이 있다. 원래부터 한자어에서 비롯된 용어는 남북한 모두 한자 그대로 썼다. 그러나 떨어져 지낸 70년 동안 여기서도 차이가 벌어졌다. 남한에서는 비정상(abnormal)이라고 하는 것을 북한에서는 ‘이상’이라고 하고, 뇌전증(간질)을 ‘전간’, 태양중심운동을 ‘일심’, 별자리표를 ‘성도집’이라고 부른다. 한자를 잘 알고 그 뜻을 깊게 되새기지 않으면 곧바로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다. 한글 용어와 조선어 용어 자체의 차이도 있다. 앞서 말한 ‘코너킥-모서리 차기’ 비유와 유사한데 남한에서 상향식 해석이란 말을 북한에서는 ‘웃방향 해석’, 돌연변이를 ‘갑작변이’, 광전류를 ‘빛전류’라고 쓴다.
왜 달라졌을까
일제 강점기 시대 한국(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는 과학 용어는 대부분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다. 일본식 전문 용어는 같은 한자문화권이라는 이유로 광복 이후에도 선택이나 심의 과정 없이 그대로 조선의 전문용어로 채택됐다. 당시 우리나라 지식계급 대부분이 한자에 대한 소양이 풍부했던 것도 일본어 한자 용어가 우리말 전문 용어로 자리 잡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1945년 남북이 갈라지고 1950년 전쟁이 일어나면서 남북은 각기 다른 말 다듬기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일본의 잔재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남한은 민간 주도로, 북한은 정부 주도로 일본식 전문 용어를 고유어로 다듬는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이때 남한은 미국의 언어(영어) 영향을 주로 받았으며 국제적인 추세를 따랐다. 반면 북한에서는 소련(지금의 러시아)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그 결과 남한에서는 이전에 사용하던 일본어와 독일어까지도 모두 영어식으로 전환해서 사용하게 됐고, 북한에서는 러시아어를 기본으로 사용하면서 독일어, 일본어 등 외래어 유래원에 기반한 조선어를 표기하게 됐다.
남북한이 통일 전후로 원활한 교류와 협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용어부터 통일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따라서 현재 북한 내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조사하고 정리하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남북한의 용어 차이를 지속적으로 수집․파악하고, 전문 분야간의 상이한 용어를 표준화하는 전문 기구가 필요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노력이 통일 시점까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한다는 사실이다. 한 번 벌어진 남북 간의 용어 간극은, 지금도 계속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