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사람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칠까. 2013년 미국경제학회지(AER)에 재미있는 연구가 발표됐다.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람들의 저축성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연구를 주도한 사람은 영국 예일대 경영대학원 행동경제학과 키스 첸 교수. 중국계 미국인인 그는 영어의 Uncle(삼촌)이라는 단어 하나가 중국어에서 伯父(큰아버지), 叔父(작은아버지), 舅舅(외삼촌), 姑丈(고모부), 姨丈(이모부)처럼 다양한 단어로 번역되는 현상이 늘 신기했다. 중국어는 첸 교수에게 끊임없이 가족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런 언어의 차이에 주목했다. 영어에서는 시제가 중요하다. 어제 비가 왔다(It rained yesterday),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It is raining now), 내일 비가 올 것이다(It will rain tomorrow)처럼 과거, 현재, 미래를 표현하는 언어가 모두 다르다. 반면 중국어에는 시제변화가 없다. 어제 비 내리다(昨天下雨), 오늘 비 내리다(今天下雨), 내일 비 내리다(明天下雨)처럼 단순하다. 이런 차이가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첸 교수는 생각했다. 중국어처럼 현재와 미래가 구분되지 않는 언어를 ‘미래비구분언어(Futureless languages)’라고 한다. 첸 교수는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일정부분 양보할 것이며 따라서 저축확률을 높일 것이라고 가설을 세웠다. 반면 영어 같은 ‘미래구분언어(Future languages)’는 현재와 미래를 끊임없이 구별해 미래보단 현재 행복에 충실하게 만든다고 봤다(즉, 저축을 덜 한다).
실제로 그럴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34개국과 러시아를 조사한 결과 상관관계가 있었다. 중국어 같은 ‘미래비구분언어’를 쓰는 13개국이 영어 같은 ‘미래구분언어’를 쓰는 22개국보다 국민총생산의 5%를 더 저축했다. 흡연, 비만, 피임률에도 차이가 있었다. 미래비구분언어 사용자들이 흡연율은 20~24%, 비만율은 13~17% 낮았다. 성관계에서 콘돔을 사용할 확률은 21% 높았다. 첸 교수는 “미래를 현재와 동등하게 생각하는 언어권일수록 미래의 기쁨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하는 성향이 있다”고 해석했다.
내가 다가가는 걸까 마감이 다가오는 걸까
첸 교수의 연구는 언어가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랑이가 거대한 인지변화를 겪고 있는 중일 수 있다(참고로 한국어는 미래구분언어, 일본어는 미래비구분언어다). 미래 구분 여부 외에 다른 차이를 시사하는 연구도 많다. 한국어에 ‘넣다·놓다·끼다’처럼 대상 간의 공간관계를 뜻하는 어휘가 많아 한국어 사용자가 공간을 잘 범주화시킨다거나①, 일본어 사용자가 형태보다 소재를 기준으로 사물을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들이다②.
그런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건 언어가 아닌 문화이며, 언어와 사고는 독립적이라는 주장이다. 한 세기에 걸쳐 두 주장은 엎치락뒤치락 맞서왔다(Inside). 아직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최근 들어 연구자들은 사랑이 같은 이중언어 사용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단일언어 사용자보단 상대적으로 문화의 영향을 배제하고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순수하게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중언어 사용자 연구는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
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2013년 미국 스탠포드대 심리학과의 레라 보로디츠스키 교수가 영어-중국어 이중언어 사용자의 시간인식개념을 조사해 ‘심리학프론티어’ 저널에 발표한 논문이 대표적이다. 일반 영어 사용자는 시간의 흐름을 말할 때 ‘우리는 마감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이를 ‘자아이동관점’이라고 한다). 반면 중국어 사용자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시간이동관점’을 주로 사용한다. ‘마감이 다가오고 있다’는 식으로.
이중언어 사용자는 어땠을까. 두 관점을 모두 사용
했다. 언어의 영향으로 상반되는 두 사고체계가 섞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언어를 배우는 나이가 빠를수록 변하는 경향도 컸다. 모국어로 중국어를 쓰는 사람은 어려서 영어를 배울수록 자아이동관점으로 많이 이동한다.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강력한 증거다.
사랑이 마음엔 두 사고체계가 있을까
한국어를 배우면서 사랑이에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이중언어 사용자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템플대 응용언어학과 아네타 파블렌코 교수는 10여 년에 걸친 연구결과를 모아 작년 ‘이중언어 사용자의 마음(Bilingual Mind)’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책에는 두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 한 언어가 다른 언어에 간섭을 미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영어와 러시아어는 감정을 뜻하는 단어가 조금씩 다르다. 영어의 ‘Jealous’란 형용사는 ‘질투하는’이란 의미와 ‘부러운’이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예쁜 여자 친구 사진을 보여줬을 때 친구가 “질투 나는데?”라고 반응했다면, 질투라는 단어를 썼지만 사실 부럽다는 의미다. 반면 러시아어에는 질투와 부러움이 명확히 구분돼 있다. 둘을 섞어 쓰지 않는다. 영어에서 한 단어로 쓰는 ‘Sorry’를 한국어에선 ‘미안함’과 ‘유감’으로 구분해 쓰는 것과 비슷하다.
재미있는 건 한 언어의 사고체계가 다른 언어를 사
용할 때도 영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영어-러시아어 이중언어 사용자는 러시아어를 쓰면서도 ‘질투’와 ‘부러움’을 섞어 쓰는 경향이 발견됐다. 한국어로 치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라는 말에 어색하게 “미안해”라고 반응하는 것처럼.
뒤섞인 두 사고체계를 분리할 수도 있다. 영국 랭카스터대 심리언어학과 파노스 아타나소풀로스 교수는 영어-독일어 이중언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해봤다. 언어특성상 영어와 독일어는 차이가 크다. 영어가 ‘나는 길을 걷고 있던 중이었다’처럼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면, 독일어는 ‘나는 집에서 학교로 가던 중이었다’처럼 출발지와 도착지(즉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이중언어 사용자는 그 중간쯤의 특성을 보인다.
아타나소풀로스 교수는 이중언어 사용자에게 아무 의미 없는 소리를 들려주거나 언어를 알아듣기 힘든 부호로 처리해서, 실험대상자가 언어로 사고하는 걸 방해해봤다(언어간섭). 효과가 있었다. 영어로 임무를 준 상태에서 언어간섭을 하면 (독일어에 가까운) 목적지향적인 행동을 했고, 독일어로 임무를 준 상태에서 언어간섭을 하면 (영어에 가까운) 행동지향적인 행동을 했다. 두 인지체계가 분리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이중언어 사용자는 평소에는 둘을 함께 사용하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한쪽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어에 따라 세계를 서로 달리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3월 6일 ‘심리과학’ 저널에 실렸다. 단정할 순 없지만, 사랑이가 한국어를 배우는 건 일본식 사고방식에 더해 한국식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이 마음속엔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