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뛰어난 자료처리능력과 통신의 빠른 발이 결합해 지구촌을 하나로 묶어가고 있다.
꼬질꼬질한 엽서에 신청곡을 적어 보내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신청곡이 전자우편이나 팩시밀리를 통해서 순식간에 방송국으로 날아간다. 사람의 입술에서 회자되던 최불암 시리즈가 이미 전자게시판에 잔뜩 올려져 있다. 그리고 수십억 달러의 돈이 지구 이쪽에서 저쪽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간다. 영어사전 한권 정도의 문서가 1분 사이에 지구 저편에 컴퓨터 통신망으로 완전히 전달된다. 컴퓨터 통신의 위력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본다.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발명되기 시작한 것은 인간의 문명과 그 시기를 같이한다. 인간의 다양한 목소리는 다른 어떤 영장류보다도 진화를 촉진시킨 계기를 마련하였다. 문제는 코앞에 있는 사람과의 통화가 아니라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과의 통신이었다. 사람의 고함소리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소리나 다른 악기소리가 신호를 전파하는 최초의 도구였다. 음향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시각이 사용된 것은 원시문명이 생겨나면서 시작한다. 산꼭대기에서 피우는 봉화나 연기는 소리보다 멀리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깃발신호가 추가로 사용되었다. 쓸쓸한 카페에 앉아서 담배를 속절없이 태우고 있는 사내에게는 선조들이 봉화를 피우던 습성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가늘게 피어 오르는 담배연기는 연기의 주인공이 고독한 사내라는 신호로 해석된다.
음성과 데이터가 전화선을 타고
컴퓨터통신의 역사는 전신에서부터 시작된다. 전신은 모스와 그의 조수인 베일에 의해서 우연히 발명된다. 1층에서 배선작업을 하던 모스는 자신이 만든 전기장치에서 이상한 잡음을 듣는데 그 잡음의 근원은 2층에서 부시럭거린 조수의 손장난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전자석을 이용한 최초의 전신기가 발명된다. 모스는 영어를 위한 전신기부호를 만들어 각 알파벳마다 해당되는 도트(dot)와 대시(dash)의 조합으로 코드를 정했다. 이것이 바로 모스 부호다. 1866년 그는 의회의 지원을 받아 장거리 전신서비스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꽤 비싼 장난감 정도로 인식했기 때문에 전봇대를 세우는 일에 냉소를 던졌다.
초기의 비난을 극복한 전신시스템은 1861년에 이르러 미주리의 세인터조지프와 샌프란시스코간의 1백57개역을 통과하는 거대한 통신체계로 변모한다. 이 때문에 그간 영예를 누려온 포니 익스프레스(Pony Express) 역마차 시대는 영화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도트와 대시로만 이루어진 전신체제는 사용하기에 불편했다. 이후 텔레타이프의 등장으로 전신보다 컴퓨터에 가까워진다.
텔레타이프의 개발은 프랑스의 전신기술자인 에밀 보도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최초로 전신에 2진체제를 응용하여 통신의 신뢰도를 높인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컴퓨터 통신에서 전송속도를 나타내는 단위로서 널리 쓰인다. 그러나 상업적인 의미에서 성공한 최초의 텔레타이프를 만든 사람은 뉴질랜드 출신인 도널드 머레이라는 기사였다. 최초의 작품은 원통형의 글판을 손으로 돌리는 정도로 조악했다. 주위에선 재봉틀과 손풍금의 합작이라는 둥, 소시지 제조기라는 둥의 혹평을 받았지만 머레이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개량을 거듭하여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그 시대의 통신량은 초당 7, 8자 정도의 글자를 보낼 수 있었다. 현재 디지털 컴퓨터에 의한 통신이 초당 2백만자 정도이니 그 발전 속도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초당 2백만자라면 웬만한 소설책 두세권 정도는 눈깜짝할 사이에 전달되는 속도다.
텔레타이프는 종이테이프라는 매체를 이용해서 보다 속도의 증가를 꾀하게 되었다. 수신자측에서는 느린 타이프 대신 빠른 종이 테이프로 1차로 받은 뒤 수신이 끝난 후 그 종이테이프를 걸어서 원문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프라인(off line) 방식의 시초가 된다. 이러한 텔레타이프는 이후 벨이라는 뛰어난 발명가에 의해서 전화가 개발됨에 따라서 크게 진보하였다.
벨은 이미 알려져 있는 전신용 선로를 이용해 음성정보를 보내서 서로 상대방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벨의 방식에서 한가지 획기적인 것은 서로 다른 전파를 한 도선에 서로 다른 주파수 대역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대개 초당 2백~3백정도의 주기적인 진동을 한다. 이 단위를 헤르츠라고 한다. 예를 들면 피아노 건반의 높은 쪽을 울리는 주파수는 사람의 목소리보다 높은 주파수를 가진다. 따라서 한 전선에 전신정보나 텔레타이프정보는 보다 높은 주파수대역으로 실어서 보내고 인간의 육성은 그 보다 높은 또는 훨씬 낮은 주파수대역으로 실어 보낼 수 있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예를 들어 보자. 커다란 수도관이 있다. 이 수도관에 기름과 물을 보낸다면 기름이 물 위에 뜨는 성질이 있으므로 액체는 섞이지 않고 따로따로 받을 수 있다. 두 액체가 서로 섞이는 성질이 없을수록 운송은 더욱 쉬워질 것이다. 만일 다소 섞일 가능성이 있는 여러 종류의 액체를 넣는다면 여러 종류의 액체를 한 관으로 동시에 전달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잘못하면 뒤엉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물질을 상대편에서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로 한 전선에 매우 인접한 대역폭을 선택해서 여러 종류의 메시지를 한꺼번에 보내려 한다면 각 전자파의 간섭현상으로 말미암아 부호들이 뒤엉키게 된다. 한 전선에 여러 주파수의 정보를 보내는 통신을 우리는 주파수 분할 다중화 방식이라고 한다.
지금도 컴퓨터통신을 할 때 기존에 가설된 전화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불완전한 선로 사정으로 말미암아 오접이나 중간에 불필요한 잡음이 많이 섞여든다고 한다. 누군가가 엄청난 옥타브의 비명을 지른다면 그 전화선을 디지털 통신용으로 쓰는 사람의 컴퓨터에는 다소의 아스키 문자(?)가 섞일지도 모른다.
벨의 공로로 말미암아서 본격적인 전기 통신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뒤 진공관의 도입으로 주파수 분할 다중화 방식에 의한 통신은 더욱 빨라지게 된다.
스티비츠의 텔레컴퓨팅 시범
컴퓨터 신호를 이용한 장거리 전송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부터다. 1940년대부터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한 컴퓨터의 가격은 그때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비쌌다. 정부 출연연구소라든지 정부기관 자체의 필요에 의해서만 설치될 정도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화선을 통해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이 여러대의 컴퓨터를 설치하는 것보다는 싸게 먹혔다. 이런 일에 뛰어든 사람은 조지 스티비츠라는 벨 연구소의 젊은 수학자였다.
그는 복소수 계산을 할 수 있는 디지털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그 성능이 뛰어나 같은 건물내의 여러 층에서 많은 수학자들이 텔레타이프로 그것과 연결하여 적시에 사용하였다. 스티비츠의 복소계산기는 여러 수학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여 한 학술대회에서 그 위력을 선보일 계획을 세웠다. 이 기회에 스티비츠는 아예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복소계산기에 전신을 통하여 직접 계산을 해보이기로 마음먹었다. 최초의 텔레컴퓨팅 시범이었다. 비록 2백50마일간을 연결하는 전용 케이블 설치에 약간 문제가 있긴 했으나, 보통의 전신회로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1940년 9월 11일 스티비츠는 드디어 텔레컴퓨팅 시범을 많은 관중들 앞에서 성공적으로 마쳤다. 스티비츠의 동료 윌리엄스가 테이블위에 준비된 텔레타이프를 두드린 후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멀리 뉴욕에 설치된 복소계산기의 계산 결과가 전달되었다. 요술과 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컴퓨터가 통신에 이용되는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이루었다. 그런데 몇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전송속도가 큰 문제가 아니긴 했지만 스티비츠 시스템의 전송속도는 텔레타이프의 전송 속도보다 느렸다. 이러한 문제점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해결될 기미를 보였다.
요즘은 대형의 계산기를 따로 설치하는 것보다 강력한 모뎀을 설치하여 서로 번갈아 가면서 공용의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이 보다 경제적인 방법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보다 고속의 디지털 컴퓨터가 개발됨에 따라서 모뎀의 성능도 더욱 빨라지도록 압력을 받았다. 획기적인 장치의 발달은 1950년대 최초의 대규모 컴퓨터 네트워크인 SAGE시스템이 방공 경보 장치로서 개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전체 통제를 담당하는 중심 컴퓨터로 MIT의 힐워드 리얼타임 컴퓨터가 채택되었다.
과학사에 있어서, 특히 현대로 오면 올수록 거대한 과학적 발전은 군수산업으로 시작됨을 종종 볼 수 있는데, 통신의 발달도 그런 예에 속한다.
SAGE는 약 1천5백만 마일이나 되는 거대한 통신선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방어망에서 자료처리속도란 바로 전쟁전체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각 데이터 기지에서 받아들여진 정보를 중앙 컴퓨터에게 보내고 또한 빨리 받아볼수 있게 하는 고속 모뎀개발은 극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전송속도를 빨리 하려다 보면 앞뒤의 0과 1의 디지털 신호가 서로 붙어서 수신측에서 볼 때 무슨 신호였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뒷감당을 못할 정도의 속도는 소용이 없었다. 따라서 선로의 용량과 거리에 따라서 전송속도에는 어느 정도의 속도제한이 있기 마련이다. 1964년 벨 연구소의 럭키(Lucky)라고 하는 운좋은 이름을 가진 연구원이 전송하기 전 선로상태를 점검해 주는 약 1, 2초간의 시간내에 회선을 트레이닝시키는 방법을 개발함으로써 깨끗이 해결되었다. 럭키의 업적으로 전화선을 통한 모뎀은 초당 9천6백 비트라는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는 최초의 전송속도에 비해 무려 2백배나 빨라진 결과였다.
화약없는 통신전쟁
최근 컴퓨터의 발전방향을 보면 발전 방향이 크게 3가지임을 볼 수 있다. 먼저 속도의 획기적인 발전이다. 그 다음은 기계장치 자체의 소형화와 가격의 급락을 들 수 있다.
모뎀도 마찬가지로 초기의 책상만한 크기에서 최근의 도시락만한 크기로 엄청난 소형화 작업이 계속 진전되어 왔다. 이런 추세라면 모뎀이 중앙처리장치내의 단 한개의 칩으로만 구현된 형태의 컴퓨터가 나올 법도 하다. 아마 10년 이내에는 달성될 수 있으리라고 전망된다. 이렇게 소형화되고 값싼 모뎀은 비싸고 덩치 큰 모뎀의 사용에 불편을 느낀 반긴이라는 연구원에 의해서 개선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모뎀을 한번 사용하려면 그것이 설치된 장소의 터미널 라인까지 가야했고 게다가 그 모뎀의 위치를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그때마다 전화국 배선공을 새로 불러야 했다.
모뎀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생활에도 적지않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출근하지 않고 집안에 앉아서 컴퓨터 터미널에 연결된 모뎀을 통하여 회사의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모뎀을 통해서 집안에 앉아 주식시세, 각종 문화행사, 백과사전류의 지식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안방에 앉은 채로 타국의 여행정보와 비행기표 예약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컴퓨서브(Compuserve)와 더 소스(The source)라는 대기업이 위와 같은 정보시장의 관리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프랑스는 미국보다는 한수 위라고 할 수 있겠다. 프랑스에는 1980년대 중엽부터 이미 텔레텔이라는 컴퓨터 통신시스템이 전국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또한 직장에서는 미니텔(Le Minitel)이라는 통신용 전문단말기가 설치되어 상당부분의 관용업무가 이미 컴퓨터통신망으로 해결된다.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컴퓨터 네트워크는 1970년 미국에서 알파네트가 완성됨으로써 그 절정을 맞이한다.
1969년 초에 설치되었을 때 겨우 15개의 중소연구소를 연결한 알파네트는 이제는 무려 30여개국 1천여곳의 컴퓨터를 연결한 지구의 중추신경으로 진화하였다.
네트워크가 많이 생기다 보니 통신을 위한 표준코드제정이 문제였다. 서로 자기 논에 물을 대기 위해 갖은 싸움이 벌어졌다. 아스키(ASCII)를 국제표준화기구에서 표준으로 정할 즈음 IBM이 슬슬 그 결정을 방해하고 나왔다. IBM은 그들의 코드인 EBCDIC를 표준으로 주장하다가 결국은 이를 포기했다. 또한 통신규칙(프로토콜)제정에서도 IBM은 자사 SNA의 방식을 고집했다. 그것은 기존의 패킷교환방식이라는 전달 방법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패킷교환방식은 컴퓨터간 주고받을 자료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패킷) 각 패킷마다 발송지주소를 기록하여 네트워크위로 뿌리는 획기적인 방식이다. 커다란 책을 소포로 보내는 대신 각 페이지를 나누어서 봉함편지로 보내는 것이다. 이 경우 다소 번거롭긴 하지만 책이 통째로 사라지진 않는다. 이것은 안전한 전화망개발을 주도한 폴 배런이라는 통신 전문가가 개발했다. 1964년 완성하여 미국 국방부에 제출하였으나, 그 시행은 보류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알파네트에서 성공적으로 돌아감에 따라서 새로운 방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드디어 1976년 전쟁과도 같은 CCITT(국제전신전화자문위원회)는 X.25를 국제표준으로 정했다. 어떤 프로토콜 시안은 위원회용 스페인어판, 프랑스어판 번역판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해서 아예 고려되지도 못하였다. 그것은 국가간의 화약없는 전쟁이었다. 요즈음도 IBM의 SNA방식에 의한 네트워크 구성은 까다롭고 호환성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삐삐가 인간을 달고다닌다(?)
국내에서도 사설, 공용 통신망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그 활용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아직도 컴퓨터 통신의 위력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인공위성과 광통신 기술의 발달로 이전에는 전송하기 다소 벅찬 영상 데이터나, 음성신호까지도 너끈히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구는 점점 꽁꽁 묶여가고 있다. 이름하여 멀티미디어 시대가 오고 있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지금의 손목시계정도로 흔하게 개인용 휴대전화기가 보급될 것이다. 낙관론자들은 통신이 발달하면 할수록 민주주의가 번창할 것으로 전망하고, 비관론자들은 오히려 독재가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주체적으로 통신을 이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허리에 매달린 삐삐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필자는 사람이 삐삐를 달고 있는지 삐삐가 사람을 달고 있는지 가끔은 헛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