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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tech] 짝퉁 꼼짝 마!

디자인과 IT 만나 가짜 없는 세상 꿈꾸다



돈 만드는 연구원다웠다. 한국조폐공사 기술연구원은 단풍나무가 늘어선 아름다운 길 안쪽 깊숙이 위치해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자, 영화 속 비밀연구소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들어 기자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한국조폐공사 기술연구원은 9월 2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제1회 위·변조 방지 신기술 설명회’를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조폐공사가 돈과 우표, 상품권만 발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방부 출입증과 공무원증, 전자여권 등 다양한 보안솔루션도 제작한다. 이번 설명회는 그간 개발한 위·변조 방지 신기술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정부기관과 기업체에 기술을 이전하기 위해 개최됐다. 한국조폐공사가 생긴 지 63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민간 기술 설명회였다. 왜 갑자기 이런 행사를 연 걸까.

“올해가 5만 원권 발행 5주년입니다. 사실 저희는 타격이 컸어요. 한국은행은 지폐를 사갈 때 한 장에 일정 금액을 지불합니다. 공사 입장에서는 똑같이 100만 원을 팔아도 1만 원권으로 판매할 때보다 수입이 5분의 1로 줄어든 거죠.”

이효건 홍보팀 과장은 기자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털어놓았다. 5년 전 지폐 가치가 높은 5만원 권이 생기고 최근에는 카드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공사의 경영실적이 악화됐던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활로를 찾던 중, 그간 쌓아 온 화폐제조 노하우를 바탕으로 민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위·변조 방지 기술을 개발하게 됐다.

그의 안내를 받아 기술연구원 디자인연구센터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스케치 연습에 쓰는 다양한 석고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고등학교 미술실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분위기가 연구소 같지 않네요”라고 말하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전국 대회 등에서 수상한, 출중한 디자이너들이 이 곳에서 화폐를 디자인합니다. 보안 기술도 디자이너들이 직접 연구하고 있죠.”

한국조폐공사

짝퉁 상품 적발 증가세


복제할 수 없는 QR코드가 숨겨져 있다

그러고 보니 각 자리에는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이는 스케치들이 붙어 있었다. 뛰어난 솜씨였다.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보안기술을 개발한다는 걸까. 살짝 의아해 하는 기자의 표정을 읽었는지, 오창진 디자인연구센터 수석선임연구원은 “일단 조폐공사가 제공하는 전용 어플리케이션(앱)을 다운로드 받아보라”고 말했다. 앱을 켜보니, 흔히 쓰는 스마트폰 카메라 화면과 비슷했다. 다만 거친 흑백 화면이라는 게 다른 점이었다. “자, 이제 스마트폰을 통해 이 종이를 보세요.”

그가 건넨 회색 종이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화면을 한번 터치해 종이 위에 초 점을 맞췄다. 그러자 무언가가 뚜렷이 나타났다. “우와, QR코드가 나타나네요! 이거 무슨 원리죠?” 설명회 당일 가장 인기가 많았다는, 일명 ‘히든QR코드’ 기술이었다. 급하게 원리부터 캐묻는 기자에게 오 연구원은 웃으며 원통형 확대경을 내밀었다.

“이 돋보기로 보시면 QR코드가 나타난 부분에 작고 까만 십자가들이 보일 겁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회색 종이 위에는 사실 QR코드가 흰 색으로 인쇄돼 있었다. 단지 그 안을 검정색 십자가들이 빼곡하게 채우고 있어서 맨눈으로는 바탕색과 똑같이 보였던 것이다. 돋보기로도 집중해야 보일 만큼 미세한 패턴이었다.

“넓은 모래밭 위에 ‘자갈 십자가’들을 올려 놓은 겁니다. 맨눈으로 보면 그냥 모래밭으로 보이죠. 스마트폰 앱이 이런 ‘자갈 십자가’들을 확대해 보여줍니다.”

한국조폐공사가 개발한 앱 ‘수무늬’는 암호화된 알고리듬으로 바둑판 모양 필터를 생성한다. 이 가상의 필터에 숨어있던 QR코드가 걸려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십자가 모양일까. 이에 대해 오 연구원은 “원이나 사각형 모양은 바둑판 필터를 자칫 통과해 버릴 수도 있는데, 십자가는 무조건 바둑판 필터에 걸리게 돼 있다”고 말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히든QR코드가 제대로 보일 수 있게 만든 마지막 비결인 셈이다.

“가장 중요한 건, 히든QR코드가 상용 기계로 복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인쇄기로 찍을 수 있는 가장 미세한 선의 너비는 약 25μm(1μm=100만 분의 1m)에요. 10μm 너비의 십자가를 인쇄하는 기술은 한국조폐공사만 보유한 고급 인쇄술이죠.”

히든QR코드를 화장품이나 주류 등의 용기 표면에 인쇄하면 가짜 제품이 유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더불어 소비자들은 상품의 생산, 유통 이력을 조회할 수 있다.



[한국조폐공사는 9월 25일, 제1회 위·변조 방지 신기술 설명회를 열었다. 김동후 위조방지센터 선임연구원(➊오른쪽 첫 번째)과 오창진 디자인연구센터 수석선임연구원(➋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각각 입체자성필름과 스마트기기 인식용 보안패턴을 선보이고 있다.][한국조폐공사는 9월 25일, 제1회 위·변조 방지 신기술 설명회를 열었다. 김동후 위조방지센터 선임연구원(➊오른쪽 첫 번째)과 오창진 디자인연구센터 수석선임연구원(➋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각각 입체자성필름과 스마트기기 인식용 보안패턴을 선보이고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에 ‘기스’ 내 볼까?”

이 기술은 간단하지만 아이디어가 기발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과연 이렇게 참신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오게 됐을까. 오 연구원은 “이곳 디자인센터의 분위기가 자유로운 덕분”이라고 말했다.

“언제든 누구든 아이디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회의를 하다가 ‘복사가 어떤 때는 잘 되고 어떤 때는 잘 안 되는데 그걸 한번 응용해 보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그 길로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죠.”

사실 히든QR코드는 이번 신기술 설명회 때 함께 공개한 ‘복사방해패턴’ 기술에서 파생됐다. 공문서 등에 복사방해패턴을 적용하면, 원본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지만 이를 복사했을 때 ‘COPY’ 또는 ‘복사본’ 이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기본 원리는 히든QR코드와 같다. 글자는 미세한 패턴으로, 바탕은 거친 패턴으로 새겨져 있어 맨눈에는 구분이 안된다. 그런데 복사기는 미세 패턴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글자 부분이 하얗게 나타난다. 복사본임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만약 복사했을 때 글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위조된 문서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원리는 무척 간단해 보이지만, 개발하는 데는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콜럼버스의 달걀인 셈이다.

온누리상품권 뒷면에는 복사방해패턴, 일명 '고스트사(Ghostsee)'가 적용돼 있다. 복사하면 '온누리'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도장을 찍을 때마다 다르게 나오듯 복사도 잉크가 퍼지기 때문에 항상 다르게 나와요. 이런 점 때문에 숨겨진 글자가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는 패턴 모양과 최적 두께를 찾는 데만 6개월이 걸렸어요. 그저 미친놈마냥 하고 또 하고 계속 했죠.”

이렇게 개발된 한국조폐공사 고유의 복사방해패턴은 인감증명서 같은 각종 국가 인증서와 대학 증명서, 의약품 처방전, 온누리상품권 등에 적용됐다. 하지만 곧 불만이 터져 나왔다. 문서를 꼭 복사해 봐야만 위조 여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숨겨진 패턴을 볼 수 있는 ‘위·변조 방지 돋보기’도 만들었지만, 아무도 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때 생각했죠. ‘이걸 스마트폰에 넣어보자.’”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인쇄 기술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베테랑 디자이너들이었지만, IT기술에는 문외한이었다. “처음에는 ‘스마트폰 카메라에 격자로 ‘기스’를 내볼까?’라고도 생각했어요. 정말 농담 안하고요.” 오 연구원이 쑥스러운 듯 ‘허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수소문 끝에, 외부 업체와 협력해 미세 패턴을 확대해 표시해주는 앱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복사방해패턴 기술은 최근 한국발명진흥원의 2014년 발명특허대전에서 수상해 그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히든 QR코드가 적용된 포장용기를 앱으로 확인하는 모습.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패턴으로 새겨져 있어 앱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기와장 ‘파던’ 디자이너 스마트폰을 잡다

한국조폐공사 기술연구원은 히든QR코드와 복사방해패턴 외에도 엠보싱잠상, 스마트기기 인식용 보안패턴, 입체자성패턴 등 다양한 위·변조 방지 신기술을 공개했다(박스 기사 참조). 모든 신기술은 한국조폐공사가 지금까지 축적해 온 요판(인쇄판) 제작술과 인쇄술, 그리고 스마트폰 앱 기술이 맞물려 개발됐다. 디자인과 IT기술이 만난 융합연구인 셈이다. 남세현 디자인연구센터 수석선임연구원은 이를 두고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렴하게 적용할 수 있는 위.변조방지 신기술로이제 소비자들은 정품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우리 선배들은 옛날부터 ‘장인 정신’으로 일했습니다. 칼을 미세하게 갈아서 화폐를 찍는 정교한 요판을 직접 깎았거든요. 돈에 그려진 미세한 지붕 모양 하나하나가 다 위조를 막기 위한 장치인데, 선배들이 한쪽 눈에 현미경을 끼고 ‘나 오늘 기와장 두 장이나 팠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하지만 2000년 이후 더 이상 손으로 요판을 깎지 않는다. 지폐 3배 크기의 종이에 스케치를 한 뒤, 컴퓨터로 입력한다. 당연히 위·변조 방지 방법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디자인 영역에서 벗어나 IT기술까지 섭렵하면서 더 다양하고 쓰기 편리한 방법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중한 디자이너에서 이제 보안솔루션을 제공하는 융합연구가로 거듭난 남 연구원이 말을 이었다.

“자나 깨나 위·변조 방지 방법만 고민합니다. 그게 제일이니까요. 그렇게 축적한 노하우에 대해서 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우리가 개발한 기술이 많이 공유돼서 짝퉁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Q. 위·변조 방지, 어떻게 할까?

A. 이런 솔루션 적용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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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우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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