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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내가 먹은 흑돼지, 정말 토종일까

201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민 1인당 평균 육류 소비량은 43.7kg이다(식품의약품안전처 통계). 매년 꾸준히 늘고 있다. 그럼 어떤 고기를 가장 많이 먹었을까? 단연 돼지다. 총 소비량의 절반이 돼지고기다. 닭고기가 28%로 다음이다. 돼지와 닭이 한국인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 된 이유는 싸면서도 맛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나기도 힘든 한우와 달리 ‘토종’을 먹을 수 있는 기회까지 준다. 흑돼지나 토종닭 같은 녀석들 말이다. 그런데 잠깐, 흑돼지와 토종닭은 예전부터 우리 조상과 함께 이 땅에 살아온, 정말 ‘토종’일까.
 
온 몸이 검은 털로 뒤덮인 재래돼지의 모습. 김두완 연구사는 “재래돼지는 겁이 많고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고 말했다


구수한 흑돼지, 사실은 영국에서 와

흔히 볼 수 있는 커다란 분홍 돼지는 누가 봐도 외국에서 온 가축 같다. 그보다 작고 검은 녀석, 제주도에서 ‘똥돼지’라고 불리는 ‘흑돼지’는 이름부터 구수한 것이 한반도에서 꽤나 오래 살아온 것 같다. 그렇지만 이들도 불과 100여 년 전에 영국에서 온 버크셔의 후손들이다. 우선 우리나라 ‘가축 돼지’의 역사부터 살펴보자.

2000년 전 만주지역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재래돼지’는 한반도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면서 조선시대까지 고유한 형태로 이어져 내려왔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을사늑약 무렵인 1908년부터다. 재래돼지는 일제강점기동안 마구 들여온 외래종과 무분별한 교배가 이뤄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6·25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재래돼지는 멸종에 이른다. 그나마 1988년 충북 청양과 제주도에서 재래돼지 고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9마리를 어렵게 모아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재래돼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오늘날의 흑돼지와는 확연히 다르다. 재래돼지는 우선 크기가 작고 몸무게도 적게 나간다. 가장 크게 자라도 50kg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씨돼지로 쓰이는 듀록은 최대 350kg, 흑돼지도 250kg까지 클 수 있다. 성장 속도도 외래종의 60% 정도로 느리다. 잡종은 주둥이와 꼬리가 하얀 반면, 재래돼지는 온 몸이 검은 털로 뒤덮여 있다. 얼굴에 주름이 많고 턱이 곧으며 귀가 앞을 향해 곧추 세워져 있다는 점도 재래돼지만의 특징이다. 김두완 국립축산과학원 축산자원개발부 양돈과 연구사는 “재래돼지가 왜소하고 늦게 자라지만 한반도 기후에서 잘 자라고 질병에 강한 장점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2012년 기준으로 국립축산과학원, 제주 축산진흥원, 충북 축산위생연구소, 산우리 농장 등지에서 키우고 있는 489마리만이 재래돼지로 정식 등록돼 있다.
 

1. 늠름한 재래닭의 모습. 2. 조선 후기 화가 변상벽이 그린 '자웅장추'

유전적으로는 일반 돼지와 얼마나 다를까? 이경태 국립축산과학원 동물유전체과 연구관은 “연구결과 다른 품종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재래돼지만의 유전적 특성이 1500개 정도 발견됐다”고 밝혔다. 검증이 완료되면, 재래돼지 복원에 도움이 될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재래돼지와 한국 토종 멧돼지가 유전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돼지끼리의 유전적 거리를 측정한 연구에 따르면, 오히려 재래돼지와 듀록, 랜드레이스 같은 외래종 돼지가 더 가까웠다. 재래돼지가 멧돼지를 가축화시킨 것이 아니라는 근거가 된다.

고기 맛은 어떨까? 재래돼지 고기는 외래종에 비해 껍질이 두껍고 마블링(근육 내 지방)이 많으며 근섬유가 가늘고 풍부하다. 추위가 긴 한반도에서 살아남은 흔적이다. 살코기가 적다는 단점이 있지만, 씹는 맛이 좋고 육즙이 풍부한 장점도 있다.


재래닭이 치느님이 될 수 없는 이유

‘1일 1인 1닭’을 가능하게 하신 ‘치느님’, 닭은 어떨까? 경주의 옛 이름이 ‘계림(鷄林)’일 만큼 닭과 우리 민족이 함께한 역사는 깊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시대 초기에 원산지인 동남아시아 혹은 중국을 통해 닭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 농서 ‘금양잡록’과 ‘농가집성’에 따르면 종류만 300여 종이 있었을 정도로 재래닭은 한반도에서 잘 살고 있었다.

역사의 격변기는 재래닭도 피할 수 없었다. 1903년 한국중앙농회가 흰색 레그혼, 나고야종 같은 닭들을 일본에서 대량으로 들여온 것이 시작이었다. 일제강점기동안 우수한 외래종이 계속 들어왔고, 재래닭은 ‘품종개량’이라는 미명하에 사라져 갔다. 결정적인 타격은 역시 6.25전쟁이었다. 보이는 대로 잡아먹힌 데다 레그혼, 뉴햄프셔 같은 ‘외국 닭’이 원조물자로 40만 마리나 쏟아져 들어오면서 멸종에 직면한다. 다행히 사명감으로 재래닭을 지켜온 사람들 덕분에 돼지보다는 명맥을 유지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천연기념물 265호로 지정된 ‘연산오계’다. 연산오계는 조선시대부터 사육된 기록이 남아 있는 재래닭이다. 1991년이 돼서야 체계적인 재래닭 복원 사업이 시작됐다.

재래닭은 외모부터 확연히 다르다. 우선 외래종에 비해 날씬한 편이다. 키는 30cm 미만, 몸무게는 평균 2.4kg(수컷), 1.9kg(암컷)이다. 몸에 근육이 많고 지방이 적어 ‘후라이드 치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기름에 튀기면 근육만 남아 고무처럼 질겨지기 때문이다. 대신 오래 삶아서 먹는 백숙에는 제격이다. 1950년대 전까지 한국 사람들에게 닭은 ‘삶아서 먹는 것’이였다.

재래닭은 살아가는 모습도 특색 있다. 몸이 가볍고 날개가 강하다보니 잘 날아다닌다. 나무 위도 쉽게 올라간다니,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본다’는 속담이 빈말이 아니다. 옛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알을 잘 품고 볕이 좋은 날에는 병아리를 데리고 산책 다니길 즐긴다. 알을 잘 돌보지 않는 토착종과는 다른 모습이다. 관광지에서 흔히 보이는 토종닭은 재래닭이 아니다. 대부분이 농가에서 자체적으로 길러온 외래종이다. 물론 외래종이라 해도 닭의 경우 7대에 걸쳐 혈통이 지켜지고 우리 풍토에 적응한다면 토착종으로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체계적인 분류와 법규가 마련돼 있지 않아 엄밀하게는 토종닭으로 부를 수 없다. 강보석 국립축산과학원 축산자원개발부 가금과 연구관은 “현재 토착종과 재래종을 포함해 토종닭을 정식으로 인증할 법령과 절차가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이경태 연구관은 “재래닭 중 흑계를 중심으로 유전자를 정밀하게 비교하고 있다”며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면 체계적인 복원과 혈통분석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재래종과 외래종 결합한 ‘신종 토종’ 개발

아쉽게도 우리가 먹는 돼지와 닭의 부모는 대부분 외국에서 사오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나라가 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재래돼지나 재래닭의 복원과 보존에 힘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굳이 ‘토종’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재래돼지와 재래닭이 가장 우수하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래종과 재래종의 우수함을 두루 갖춘 ‘신종 토종’ 돼지와 닭이 개발 중에 있다. 진짜 우리 돼지와 닭으로 만든 삼겹살과 양념 치킨을 먹을 날을 기다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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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한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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