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방법’ 가르치는 리버럴 아츠 과학 교육](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8/33606949053febfa76e9be.jpg)
방학의 대학은 적막하다. 사람으로 가득 붐비던 캠퍼스는 고요해진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다음 학기를 준비하는 학생이 있다. 기자가 방문한 지스트대학도 그랬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무더운 여름 날씨보다 더 뜨겁게 강의실을 불태우고 있었다.
칼텍 롭 필립스 교수에게 생물학을 배운다
여름방학이 되면 지스트대학에서는 특별한 수업이 진행된다. 진행자는 미국 칼텍의 롭 필립스 교수와 그의 조교(?)들. 말이 조교지 이미 박사 학위를 받은 연구원과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교수다. 올해는 세포물리생물학과 진화생물학, 두 과목이 개설됐다.
필립스 교수는 인생 여정이 이미 ‘융합’이다. 미국 브라운대에서 이론물리를 공부한 뒤, 응용물리학에 뛰어 들었다가 칼텍에서 생물과 물리를 융합한 학문을 연구하고, 이제는 이 분야를 생물 진화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여름마다 지스트에 오는 목표는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다.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과학을 연구하는 새로운 시각과 방법을 깨닫는 것이다. 약 2주간의 이론과 실험 수업이 끝나면 필립스 교수와 조교, 지스트 학생들은 인도네시아로 떠난다. 진화론에서 다윈과 쌍벽을 이뤘던 알프레드 월리스가 답사했던 지역을 직접 탐사하며 강의에서 배웠던 내용을 고민하고, 스스로 응용해 본다. 조경래 지스트대학 기초교육학부 교수는 “다양한 연구 방법과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익힌 학생들이 낼 결과물을 무척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진화생물학 수업에 참가한 최용석 학생은 “이번 수업을 통해 진화라는 것이 단순히 생물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됐다”며 “인도네시아의 발리와 롬복 섬 사이에 월리스 라인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월리스 라인이 인간의 활동으로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 군은 지스트대학을 입학할 당시만 해도 물리에 관심이 많았다. 조경래 교수도 “수학과 컴퓨터를 이용하는 데 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학기에 들었던 일반생물학 수업과 이번 수업을 통해 최 군은 이제 생명공학 분야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GIST 대학](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8/19703397853febfdd955ab.jpg)
국내 과학기술계 처음 ‘리버럴 아츠 교육’ 시행하다
필립스 교수의 강의는 지스트대학이 추구하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교육’의 일부다. 리버럴 아츠 교육은 학생들이 생각하는 힘을 먼저 키운 뒤 한 가지 전공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배우는 데 목표가 있다.
2010년 처음으로 신입생을 받은 지스트대학은 올해 첫 학부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대학교의 졸업생처럼 한 가지 전공만을 공부하지 않는다. 3학년 때 물리, 화학, 생물, 공학·응용과학 분야로 전공 선언을 하지만 한 전공에서 최대 12학점만 전공으로 인정받을 뿐 다른 분야 수업도 충실히 들어야 한다. 기초과학을 폭넓게 배우기 위한 방법이다.
리버럴 아츠 교육은 12세기 서양에서 최초로 대학이 만들어지면서 시작됐다. ‘기초학문’이라는 말과 비슷한데 글쓰기, 문학, 철학, 자연과학을 비롯해 경제학, 역사학, 인류학 등 다양한 기초학문을 포함한다. 당시 대학 설립자들은 이런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이해력, 사고력, 소통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에 와서는 학부 졸업 이후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논리력이나 사고력과 같은 지적자산을 마련할 수 있으며, 나아가 융합을 요구하는 현대 과학의 흐름에 맞춰 수학, 물리, 컴퓨터 등 학문적 기초 능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미국 칼텍의 롭 필립스 교수가 세포물리생물학 강의를 하고 있다.](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8/127650394353fec02d666ae.jpg)
![밤 10시에도 교수와 만나 궁금증을 해결하는 대학](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8/22753843353fec03cbca31.jpg)
여전히 낯설어 하는 기자에게 조경래 교수는 생물학자 멘델을 예로 들었다. 멘델은 완두콩을 이용한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유명한 과학자다. 하지만 수도사였던 그가 왜 완두콩을 연구하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저 3:1과 9:3:3:1이라는 우성·열성 비율만 열심히 기억하고 있다. 조 교수는 “과학자가 살았던 당시 유럽 사회와 오스트리아의 배경, 유전학의 흐름을 파악해야 멘델이라는 과학자와 유전법칙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리버럴 아츠 교육은 이처럼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말했다.
1989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해럴드 바머스는 리버럴 아츠 교육의 진가를 제대로 알려주는 사례다. 바머스는 미국 앰허스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하버드대와 컬럼비아대를 거쳐 의학을 공부했다. 우리나라 대학교를 생각하면 영문학에서 의학으로 진로를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리버럴 아츠 교육에서는 가능하다. 조 교수는 “지스트대학에서 리버럴 아츠 교육을 충분히 받아 과학자를 생각하고 들어왔다가 다른 진로를 고민하게 되는 학생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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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과목에 교수 10명이 참여하는 ‘융합 강의’ 인기
지스트대학에서 리버럴 아츠 교육을 위해 시도하고 있는 특별한 수업도 있다. 정규 학기에 교수 10여명이 힘을 합쳐 한 과목을 만드는 수업이다. 모든 교수가 매 수업 시간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매 시간 전공이 다른 교수가 번갈아 들어와 가르치는 수업형태와는 다르다. 교수들은 자신의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며, 때로는 학생의 시선에서 수업 분위기를 이끌고, 때로는 동료 교수의 입장에서 학생들을 격려한다.
여러 분야 교수에게서 다양한 시각과 지식을 배울 수 있는 만큼 수업에 대한 인기도 뜨겁다. 처음 개설됐던 ‘에너지와 인간’ 과목은 3학기째 계속되고 있고, 뒤를 이어 ‘음식과 약’이 2학기째 진행됐다. 지난 학기에는 ‘인간과 우주’가 추가로 개설됐다. 기회가 된다면 기자도 토론에 참여해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주제들이다. 주제뿐만 아니다. ‘인간과 우주’ 강의를 생각해 보자. 서로 떨어져 있던 분야 교수 10여 명이 하나의 주제로 토론하고 각 학문이 융합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다. 현장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바로 학생 자신이다.
최근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스팀(STEAM: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rts and Mathmatics)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오면 특정 분야에 집중된 전공 강조 교육으로 바뀐다. 삶의 질을 높이고 고등 학문을 폭넓게 이해하게 만드는 기초 학문은 뒷전이 되고, 지나치게 전문 분야만 강조돼 연구보다 취업이 우선시된다. 최근 일부 대학교에서 전공을 선택하기 전에 다양한 과목을 듣도록 교육을 보완하고 있지만 학생과 전공 수가 너무 많아 연구와 교육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는 어렵다.
이 점에서 지스트대학은 좀 더 자유롭다. 대학의 다음 교육과정으로 연구중심 대학원인 GIST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초 학문과 사고력은 대학에서, 전공 공부와 연구는 대학원에서 맡은 것이다.
GIST의 리버럴 아츠 교육은 오늘도 계속 발전하고 있다. 노경덕 지스트대학 융합학문연구실장의 말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수를 찾는 학생들의 전화와 자유로운 학문 풍토가 지스트대학의 미래를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