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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잔에 든 맥주가 더 맛있다! 음료와 컵의 밀당


대학교 MT를 가면 꼭 챙겨가는 종이컵과 맥주. 하지만 이상하게도 종이컵에 따라 마시는 맥주는 맛이 없다. 차라리 그냥 캔으로 먹는 게 훨씬 더 맛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미국 미시간대 아라드나 크리슈나 박사팀의 2008년 연구에서도 그랬다. ‘사람은 단단한 그릇에 담겨있는 음식을 더 맛있게 느낀다’고. 도대체 어떤 컵이 음료를 더 맛있게 만드는 걸까.

아침에 출근한 뒤 한 잔, 점심 먹고 소화를 시키며 한 잔, 오후에 졸릴 때 또 한 잔, 누군가 커피를 내릴 때 냄새에 이끌려 또 한 잔…. 하루에 서너 잔씩 마실 정도로 커 피를 좋아하지만 대학교 때는 입에 대지도 않던 시절이 있었다. 딱 4월쯤이었다.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카페라떼가 먹고 싶어 학교 매점에서 한 잔 산 뒤, 동아리방에 잠시 들렀 다. 그리고는 커피를 놓고 강의실에 들어갔다. 몇 시간 뒤 돌아온 나를 반기는 것은 싸늘 하게 식은 커피였다. 그걸 그냥 마셨어야 했다. 다시 따뜻하게 만들겠다고 전자렌지에 돌 렸는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호기심은 과학 발전의 원천이라고, 궁금한 독자들은 직 접 해보시라.


종이컵보다는 텀블러에 먹는 커피가 더 맛있다

전자렌지로 데운 커피는 더 이상 커피가 아니었다. 맛은 무지하게 ‘쓴’ 데운 우유였다. 고소한 커피 향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종이 냄새가 잔뜩 배어버 린 커피였다. 결국 한두 모금을 마신 뒤, 하수구에 부어버렸다.

비슷한 경험을 친구에게 들은 적도 있다. 커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프 레소에 관한 이야기였다. 보통 에스프레소는 머그의 절반도 안 되는 에스프레소 전 용 잔에 담겨져 나온다.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가지고 나갈 것이라고 하 자, 점원이 매우 당황하더니 일반 커피 컵에 담아주더란다. 얇은 종이컵에서 빠르게 식은 에스프레소는 순식간에 향이 날아가 한약처럼 쓴맛만 남았더랬다.

생각해 보면 종이컵에 담은 음료수보다는 딱딱한 컵에 담아 마시는 음료가 더 맛있 게 느껴진다. 이는 앞서 말했던 크리슈나 박사팀 연구에서도 드러났다. 크리슈나 박사 와 미국 럿거스대 마우린 모린 박사가 2008년 ‘소비자연구’ 4월호에 발표한 연구에서 참 가자들은 똑같은 물을 마시더라도 종이컵 같은 무른 컵에 마셨을 때 더 맛이 없었다고 답했다.

왜 그럴까. 커피는 ‘향’이 중요한 음료다. 향은 휘발성 성분이 코 안에 있는 감각 세포 를 자극할 때 느낀다. 휘발성 성분은 온도가 높을수록 많이 발산된다. 따뜻한 커피가 맛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이 지나면 휘발성 성분이 모두 날아가고, 온도까지 낮아지면 커피는 향을 잃게 된다. 즉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휘발성 성분이 날아가는 것을 막으면서 최대한 따뜻한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일반 커피용 종이컵에 담아준 에스프레소는 넓은 면적에 커피가 퍼져 빠르게 식었기 때문에 향은 없이 쓴 맛만 남았다. 전자렌지로 다시 데운 카페라떼는 이미 커피 향기는 모두 날아갔는데, 커피 온도가 다시 높아지는 바람에 종이컵 냄새 분자가 활발하게 배어 나와 커피에서 종이 냄새가 난 것이다. 이쯤에서 음료를 맛있게 먹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최대한 처음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벽이 두꺼운 머그나, 보온이 잘 되는 보온병이 좋다. 물론, 냄새 분자가 모두 날아가기 전에 마셔야 제 맛을 알 수 있다.


보기 좋은 떡이 정말 맛도 좋다

이탈리아의 요리사인 필립포 마리네티는 1932년에 출간한 ‘미래주의자 요리책’에서 손가락을 벨벳과 사포에 각각 올려놓고 같은 음식을 먹었을 때, 음식의 부드러움이 완전히 달랐다고 했다. ‘맛’을 직접 결정하는 것은 미각과 통각, 후각이지만 분위기처럼 맛과 직접 관련이 없는 감각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각을 제외하고 사람의 식욕을 가장 자극하는 감각은 무엇일까. 음료의 냄새를 맡는 후각? 꿀꺽꿀꺽 넘기는 소리를 듣는 청각? 정답은 ‘시각’이다. 와인을 예로 들어 보자. 붉은 자주색을 보면 레드 와인이 연상되고, 와인의 포도향과 떫은 맛, 갖가지 와인의 맛과 관련된 수식어가 떠오른다.

이 때문에 음료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시각적인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차가운 음료수는 투명한 컵에, 따뜻한 음료수는 불투명한 컵에 담는 것이 시각 효과를 이용하는 사례다. 투명한 컵은 투명한 얼음처럼 반대편이 비춰 더 시원하게 느끼도록 한다.

지난해에는 컵의 색이 음료의 맛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도 나왔다. 스페인 발렌시아기술대와 영국 옥스퍼드대의 공동연구인데, 핫초콜릿 음료는 흰 색이나 빨간 색 컵보다는 미색이나 주황색 컵에 담아 마실 때 더 맛있게 느껴진다는 연구로 ‘감각연구저널’ 1월호에 발표됐다. 흥미로운 것은 미색 컵에 담긴 핫초콜릿이 더 달고 향기롭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커피 광고에서 왜 커피가 항상 크림색 컵에 담겨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연구에서는 추가로 음료를 담는 용기의 ‘색’이 어떤 효과를 주는지 구체적으로 밝혔다. 노란색 캔은 레몬 향을 더 강하게 했으며, 푸른색 컵은 빨간색 컵보다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효과를 냈다. 분홍색 컵은 더 달게 느끼게 했다.


튤립 모양 와인 잔은 음료를 마시는 데 이상적인 모양.

음료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컵 모양이 있다. 맥주는 손잡이가 달린 길쭉한 잔이며, 커피는 입구가 넓고 아래가 좁고, 납작한 잔이다. 막걸리는 사발에 마시고, 소주나 양주는 자그마한 유리잔에 마신다. 컵은 아니지만 콜라는 중간이 잘록한 유리병에 담겨있다. 그리고 와인잔은 입구가 좁고 아래가 넓으며, 길쭉한 다리가 달렸다.

컵 모양은 음료의 특징과 문화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소주나 양주잔이 작은 것은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조금씩 마시기 위해서다. 흔히 알고 있는 맥주잔은 머그 모양인 데, 편리하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졌을 뿐이다. 사실 맥주는 제조사 별로 맥주 한 병이 정확하게 들어가는 전용컵을 만들고 있다.

‘잔’ 하면 떠오르는 와인글라스를 빼 놓을 수 없다. 입구가 좁고 아래가 넓은 튤립모양 의 잔을 가느다란 다리가 떠받치고 있는 모양이다. 얇고 투명한 재질로 되어있어 안에 담 긴 와인이 어떤 색인지도 감상할 수 있는 1석 2조의 효과가 있다. 와인글라스의 모양은 차가운 음료를 마시기에 더없이 완벽하다. 우선 입구가 좁아 냄새 분자가 잘 날아가지 않 는다. 얇고 투명해 내용물도 잘 보인다. 자주빛 와인은 물론, 우유와 커피와 시럽이 층을 만드는 모습이나, 알록달록한 칵테일을 잘 보이게 한다.

단점이 하나 있긴 하다. 얇은 유리로 된 컵을 손으로 바로 잡으면 체온이 고스란히 전 달된다. 시원하던 음료는 금세 얼음이 녹거나, 미지근하게 변한다. 이 때문에 다리가 고 안됐다. 다리 부분을 잡으면 체온이 컵에 직접 닿는 일이 없다.

한 가지 더 팁.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와인글라스에 맥주를 담아 먹어보자. 맥주 고유의 색을 보면서, 온도도 크게 변하지 않고, 향도 붙잡으며 마실 수 있다. 제조사별로 나온 전용잔이 없어도 거품만 제대로 만들 줄 안다면 맥주의 제맛을 훌륭하게 즐길 수 있 다. 사실 전용잔도 말이 전용잔이지, 거품 제대로 못 만들면 평범한 물컵과 다를 게 없다.

오늘도 출근 후에는 어김없이 커피 마실 준비를 하고 있다. 커피 믹스를 마실지, 더운 물에 인스턴트 아메리카노를 녹일지, 아니면 가까운 카페로 내려가 따뜻한 카페라떼를 사올지 고민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책상 한 구석에 놓인 텀블러에 담아 마실 것이다. 설거지가 조금 귀찮긴 하지만 맛있게 커피를 마시는 데 이 정도 수고는 당연하다. 텀블러 를 쓸 때 갖게 되는 소소한 장점이 두 개 더 있다. 쓰레기가 줄어들고, 무엇보다 커피전문 점에서 텀블러로 커피를 구입하면 할인이 된다! 커피를 맛있게 먹고, 쓰레기도 줄이고 돈 도 아끼고, 이것이야말로 일석삼조에,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아닐까.

2014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오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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