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색을 살피면 건강이 보인다. 간기능이 떨어지면 얼굴이 노래지고, 소화기간에 이상이 생기면 딸기코가 생긴다.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안색의 정체는 무엇일까.
차가운 겨울날 바깥에서 일을 보고 집에 돌아오면 얼굴이 벌개지게 마련이다. 추운 날씨 탓에 수축된 혈관이 따뜻한 실내에서 갑자기 이완돼 혈액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혈관이 정상 상태로 돌아와 얼굴은 평소 색깔로 돌아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몇시간이 지나도 벌건 상태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이완된 혈관이 정상 상태로 잘 회복되지 않은 탓이다. 마치 술을 마신 뒤 얼굴이 벌개진 것처럼 보여 한자에서 술을 뜻하는 주(酒)를 넣어 부르는 피부병 ‘주사’의 초기증상이다.
피부는 항상 환경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날씨와 같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끊임없이 자극을 받는다. 한편 내부 장기에서 질환이 생겨도 피부에 그 증세가 어느 정도 나타난다. 그래서 ‘피부는 내장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안색을 포함한 피부색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당사자의 피부 상태 자체는 물론 내부 장기의 질환을 알아차리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딸기코의 정체
주사는 흔히 30-40대의 중년 여성에게 잘 나타나는 질환이다. 평소에 얼굴이 늘 벌개져 있고 조금 심한 경우 여드름과 같은 좁쌀 모양의 두드러기가 돋아난다. 얼굴이 자주 화끈거리기도 한다. 몸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 앞에 서기가 다소 껄끄럽다. 특히 남성의 경우 이 증세가 심해지면 코가 집중적으로 벌개지고 두드러기가 많아져 ‘딸기코’가 되기도 한다. 마치 코 끝에 또하나의 코가 더 붙은 모습이다. 보기에 흉한 탓에 심한 경우 이를 잘라내는 수술이 필요하다.
주사가 발생하는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내분비 계통에 이상이 생기거나 소화기의 기능이 떨어지면 이런 증세가 생긴다. 혈관이 운동능력이 저하돼 이완된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또 피부에 사는 진드기의 일종이 주사를 일으키기도 한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연고를 적절한 처방 없이 얼굴에 바르면 뜻하지 않게 얼굴이 벌개지고 좁쌀이 생기기도 한다. 연고에 함유된 스테로이드 성분이 진드기의 좋은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얼굴에 핏기가 없어져 하얗게 변하는 경우가 있다. 빈혈에 걸렸을 때, 즉 혈액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세포인 적혈구의 수가 줄어들었을 때 흔하게 나타난다. 특히 여자들은 매달 월경을 하기 때문에 빈혈이 발생하기 쉽다. 그런데 빈혈 증세가 있을 때 안색뿐 아니라 머리카락의 색이 변하기도 한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 여학생이 머리카락이 이상하다며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각 머리카락마다 부분적으로 흰 부분과 검은 부분이 반복해 나타났다. 별다른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그녀가 빈혈 증세를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매우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빈혈이 머리카락 색을 변화시킨다는 학계의 보고가 있던 차였다. 다행히도 그녀에게 빈혈치료제를 복용시키자 증세가 호전되면서 건강한 머리카락이 자라났다.
한편 몸에 질환이 없어도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얼굴색이 하얗게 변하는 일이 흔하다. 예를 들어 TV에서 종종 방영되는 미스터리물을 볼 때 무서운 장면이 나타나면 갑자기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하는 경우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혈관이 수축됐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용하는 자율신경계 중에서 교감신경이 자극돼 발생한다. 교감신경은 주로 급박한 위기 상황에 작동한다. 반대로 부교감신경이 자극돼 혈관이 확장되면 안색은 붉게 변한다. 창피한 일을 당했을 때 얼굴이 붉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안색의 또다른 전형은 노랗게 변하는 경우다. 대표적으로 간의 기능이 좋지 않으면 얼굴을 비롯해 온몸이 노랗게 변한다. 이 변화의 주범은 적혈구 속에 주로 존재하는 빌리루빈이라는 노란 색소다. 적혈구가 수명이 다해 분해될 때 남은 빌리루빈은 간에서 대사과정을 거쳐 다른 물질로 변한다. 만일 간염과 같은 질환이 생겨 간이 제기능을 다 못하면 빌리루빈은 그대로 혈액 속에 남게 된다. 그 결과 빌리루빈이 과도하게 축적돼 혈액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온몸이 노랗게 변한다. 이것이 황달이다.
만성간염 환자의 경우 때때로 빨간 핏줄이 가슴이나 목에 거미줄 모양으로 퍼진 경우가 있다. 간염이 오랫동안 진행되면 혈관의 일부가 마치 메두사의 머리처럼 여러 갈래로 확장하는 일이 벌어진다.
중년이 넘어선 여성에게는 간염 질환이 없어도 흔히 2-3개의 벌건 핏줄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많은 핏줄이 보이면 만성감염을 의심할만하다. 특히 남성은 평소에 이런 증상을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거미줄 모양의 핏기가 나타나면 간이 위험하다는 신호다.
흑인 황제 가수의 비애
한편 얼굴이 노랗다고 해서 반드시 황달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얼마전 40대 아주머니가 중학생 딸아이의 얼굴색이 노랗게 변했다며 병원을 찾았다. “간에 이상이 생긴 것 아니냐”며 매우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한눈에 그 학생의 얼굴이 노랗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신체는 중학생답지 않게 우람(?)했다. 간에 이상이 있다고 의심되는 환자치고는 너무나 건강했다.
여학생은 “일상 생활에서 피곤하기는 커녕 힘이 용광로처럼 끓는다”고 말하면서 “괜히 어른들이 걱정한다”고 투덜댔다. 그래서 이 학생에게 무엇을 잘 먹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식욕이 왕성해 무엇이든 잘 먹는데, 얼마 전부터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귤이나 오렌지와 같은 과일로 배를 채운다”고 말했다.
진단 결과 이 학생은 어머니가 걱정한 대로 간에 이상이 생겨 피부가 노랗게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귤이나 오렌지, 그리고 당근과 같이 각종 야채에 많이 함유된 카로틴(몸 안에서 비타민 A로 전환되는 물질)이 혈액에 많이 포함되면 피부색이 노랗게 변할 수 있다. 비단 얼굴뿐 아니라 손과 발바닥도 노래진다.
이 증상과 황달 증상은 간단한 피검사로 쉽게 구별이 된다. 또 그냥 육안으로 볼 때 황달에 걸린 환자는 눈의 흰자위가 노랗게 변해있다. 카로틴을 많이 섭취한 경우 이런 증세는 없다.
한편 피부색을 만드는 메커니즘 자체에 이상이 생겨 피부색이 변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 피부의 색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멜라닌색소다. 이 색소가 정상인보다 부족하면 몸에 흰 반점이 생기며(백반증), 반대로 과다하면 온몸이 검게 변한다(아디손병).
멜라닌색소는 어디서 만들어질까. 피부는 크게 표피, 진피, 지방층의 세층으로 구성된다. 멜라닌색소를 만드는 세포는 표피의 제일 아래층에 존재한다.
멜라닌세포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멜라닌색소를 함유한 멜라노좀을 만들고, 이것이 주변의 각질형성세포로 이동함으로써 우리의 피부색을 만들게 된다. 멜라닌세포는 나뭇가지모양의 수많은 돌기를 가진 특수한 모양을 띠고 있다. 이 돌기를 통해 1개의 멜라닌세포는 36개의 각질형성세포에 멜라노좀을 공급한다. 멜라닌색소는 고열에서 끓여도 분해되지 않는 매우 안정된 화합물이다.
멜라닌색소는 비단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징어가 뿜어내는 먹물이 검은 이유는 바로 멜라닌색소 때문이다. 또 동물의 피부색 역시 사람처럼 멜라닌색소의 분포에 따라 정해진다.
몇해 전 신문에서 백사(白蛇)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 뱀이 정력에 좋다 해서 부르는게 값이고 서로 사려고 한다는 기사 내용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뱀은 멜라닌색소를 만들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무슨 영물인양 거액을 지불하고 정력을 보강해보려는 일부 어른들의 행위에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다.
현재 사람의 멜라닌색소에는 흑색과 갈색 두가지가 밝혀져 있다. 서양인의 금발이나 갈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하얀’ 피부에는 갈색 멜라닌이 많이 들어있다. 이들에 비해 우리와 같은 황인종과 흑인종은 흑색 멜라닌이 상대적으로 많다.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알수 있는 팝계의 세계적인 황제인 흑인 가수가 어느날 하얀 피부색의 백인(?)으로 변신했다. 자신의 인기에는 별다른 변함이 없었지만 당사자로서는 커다란 골치를 앓은 결과였다.
이 사람은 불행히도 멜라닌세포가 없어지는 백반증에 걸렸다. 수많은 열광적인 팬들과 항상 만나야 하는 그로서는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을까? 그래서 그는 얼룩소같은 피부를 가지느니 정상 피부에 있는 멜라닌세포를 영구적으로 파괴시켜 백인(?)으로 변신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햇볕 쬐려는 몸부림
이웃 일본의 청소년들은 백인의 하얀 피부와 금발을 동경한다. 또 젊은이들 사이에서 건강한 피부색을 만들기 위해 선탠이 유행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과학적으로 바람직할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니오”다. 전부터 우스개 소리로 하느님이 만든 인간 중에서 흑인과 백인은 실패작이고 가장 잘 만든 작품이 한국인같은 황인종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농담이지만 여기에 상당한 과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 도시를 여행할 때 시내 곳곳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백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이 햇볕만 나면 기를 쓰고 일광욕을 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생존을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 왜 그럴까.
멜라닌색소는 자외선을 흡수하기 때문에 피부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한다. 백인의 피부는 멜라닌색소가 적기 때문에 햇볕 노출에 의해 피부 노화나 피부암이 잘 발생하게 된다. 이를 막아보려는 노력의 하나로 일광욕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일광욕을 하면 멜라닌 색소의 생산이 증가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외선 때문에 멜라닌세포 주위의 다른 세포에도 함께 영향을 줌으로써 피부노화가 촉진된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미용실이나 수영장에서 선탠하는 것은 자외선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행위인 셈이다. 돈들이면서 자기 피부를 젊어지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늙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흑인의 피부는 건강하게는 보이지만, 미용적인 면에서는 왠지 탐탁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인은 타고난 피부만 잘 유지해도 피부 건강이나 미용적인 면에서 다른 인종에 비해 월등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좋은 피부를 물려준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모두가 조상들께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