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잠 속의 내가 진짜 나인가, 깬 상태의 내가 진짜 나인가. 장자의 질문과 묘하게 닮은 이 물음에 답을 내릴 사람이 있을까. 잠은 왜 잘까. 꿈은 왜 꿀까. 꿈을 간직하는 대가로 우리는 잠을 잃어버리고 있진 않을까. 잠은 그저 휴식일까. 인생을 접수한 지배자는 아닐까. 이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나는 과연 깨어 있는 걸까. 혹시, 잠 속에서 내가 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

 

“나는 잠들어 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 있는가 없는가.”


_셰익스피어, ‘리어왕’
 

기억의 수집가…

잠은 왜 잘까. 잠을 잘 때는 천적에 노출되기 쉽고 먹이를 찾는 활동도 중단해야 하며 생물의 가장 중요한 책무인 짝짓기도 못한다. 혹시 만나지 못하는 대상에게 꿈에서라도 닿기 위해? 하지만 그런 꿈에서도 짝짓기는 불가능하니, 어차피 절반의 해결에 불과하다.

과학적으로 본 잠에는 이 정도의 낭만조차 없다. 처절한 생존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잠이 없으면 동물은 기억을 할 수 없다. 드라마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따위를 복잡하고 우습게 만드는 기억상실증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이 없다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같다고 말할 근거가 사라진다. ‘나’의 존재 자체가 모호해진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소설에서처럼, 일상도 사랑도 유지되기 힘들다.

잠은 바로 이렇게 중요한 기억을 수집하고 정리한다. 잠은 크게 렘(REM)수면과 비렘(non-REM)수면으로 나뉜다. 이 중 깊은 잠은 비렘수면에 속한다. 비렘수면 중에는 대뇌피질이 약 1Hz 정도의 파장을 뇌 전반에 발생시키는 느린 뇌파 수면(slow-wave sleep, 서파 수면)이 있다. 깨어있을 때 뇌가 어떤 활동을 하고 나면, 잠이 들었을 때 이 부위에서 느린 뇌파 발생이 느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가 바로 뇌가 활동하며 얻은 기억을 기억 중추(해마)에 전달하거나, 편집을 하는 때다.

흥미롭게도, 잠에서 느린 뇌파 수면이 늘면 잠의 질도 높아지고 기억도 잘 하게 된다. 어린이가 어른보다 기억력이 좋은 것도 느린 뇌파 수면이 길어서다. 만약 어른이 느린 뇌파 수면을 늘릴 수 있다면(실제로 뇌에 전기자극을 주는 방식으로 질 좋은 수면을 늘리려는 연구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기억력 역시 다시 좋아질지도 모른다.


시냅스의 조절자

최근 잠과 관련해 ‘시냅스 항상성’이라는 이론이 주목받고 있다. 뇌세포 사이의 결합을 의미하는 ‘시냅스’는 동물이 깨서 활동을 할 때는 수도 늘고 크기도 커진다.

기억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에 잠을 자면, 다시 시냅스의 수가 줄고 크기도 작아진다. 뇌는 이를 통해 ‘신선한’ 시냅스를 준비해 다음 날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일 대비를 한다. 재미있는 것은 기억 시냅스가 작아질 때, 기억이 없는 시냅스는 더 작아진다는 사실이다. 즉 전체적으로는 시냅스 크기가 줄어들지만, 여전히 기억은 유지된다. 2011년 미국 위스콘신대 의대 치아라 키렐리 교수팀이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잠이 시냅스의 크기를 작게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관련된 유전자까지 찾아내면서, 점차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기억의 청소부…

잠은 기억의 청소부기도 하다. 느린 뇌파 수면은 감정과 관련한 나쁜 기억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의대 카테리나 하우어 박사팀은 공포 기억을 지닌 사람에게 그 기억과 연관이 있는 후각 자극을 주고 동시에 느린 뇌파 치료를 했다. 그랬더니 공포를 더 빨리 잊었다. 작년 9월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실렸다.

잠은 뇌의 노폐물을 청소하는 역할도 한다. 지난해 10월, 미국 로체스터대 의대 룰루 시에 교수팀은 두뇌가 활동 과정에서 생긴 독소(대사 노폐물)를 잠을 통해 씻어내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결과를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잠이 부족할 때 뇌는 청소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돼, 마치 명절에 수거하지 않은 쓰레기통처럼 노폐물로 가득차게 된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조차 위태로워질 수 있다.


잠을 방해하는 사악한 밝음의 무리들

당신의 잠을 방해하는 ‘악’은 빛이다. 오늘날 각광 받고 있는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이 그 선봉이다. LED조명은 에너지가 적게 드는 대신, 방출하는 빛의 파장이 400~500nm로 짧다. 이 파장은 주로 푸른빛인데, LED로 조명을 한 결혼식장이나 가로등 아래에서 차가운 기분을 느끼는 것이 그 때문이다. 문제는 수면을 유도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이 정확히 이 파장의 푸른빛을 쬘 때 가장 적게 분비된다는 점이다. 미국 토머스제퍼슨대의 조지 브레이나드 박사팀이 2001년 ‘뇌과학저널’에 발표해 전세계에 ‘LED경보’를 발령하게 한 연구 결과다. 참고로 지금은 퇴출되고 있는 백열전구는 500nm 이상의 긴 파장의 빛(노랑-빨강)을 많이 내고, 형광등은 550nm와 620nm 파장의 빛을 주로 낸다.

반대로, 푸른 빛을 적게 쬐면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 생성이 늘까. 결과는 ‘그렇다’다. 캐나다 토론토대 레오니드 카유모프 박사팀은 수면 장애에 시달리는 교대근무자들에게 푸른 빛을 제거하는 필터를 단 안경을 주고 수면 시간을 측정했다. 필터 안경을 쓴 교대근무자들은 수면 장애를 덜 호소했다.

자연의 빛도 문제다. 스위스 베셀대 크리스티앙 케요첸 박사팀은 달의 주기가 수면에 미치는 영향을 뇌전도(뇌 전기신호) 분석을 통해 연구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보름달 전후로 깊은 잠과 관련한 비렘수면이 30% 줄고, 잠드는 데 걸리는 시간도 평소보다 5분 이상 늘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원인은 역시 빛에 의한 멜라토닌 생성 억제였다. 이제는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라는 노래 제목을 ‘…보름달은 뜨고’라고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악몽은 고통을 견디는 예방주사?

문이 닫힌다. 천장의 전구는 꺼진 상태다. 길게 이어지던 문의 그림자가 덜컥 소리와 함께 사라지자, 방은 완벽한 어둠에 사로잡힌다. 바로 그 순간, 바닥에서, 책상 아래에서, 혹은 창문 밖에서 미지의 존재가 얼굴을 들이민다. 보이지 않는 두려움, 어둠이다.

누구나 겪어봤을, 어렸을 때의 기억이다. 불 끄고 자는 게 두려워 작은 전등을 켜고 잔 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인간은 왜 어둠을 두려워할까. 어둠에 대한 공포는 생물학적인 원인이 없다. fMRI를 찍는다고 어둠에 대한 뇌 반응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진화의 결과로 추정한다. 아프리카 초원(사바나)에서 진화한 인류는, 더위를 피해 밤에 활동하는 포식자들과 맞설 능력이 없었다. 자연히 한낮에 먹을 것을 구해 돌아다녀야 했고, 밤은 숨죽여 지내야 하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밤을 막연하게 두려워하게 된 것은 조금이라도 생존률을 높이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위험하니 밤에 돌아다니지 마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악몽은 좀 다르다. 아직 인류는 악몽을 왜 꾸는지 모른다. 다만 뭔가 유익한 기능이 있으리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뉴사이언티스트’의 에디터인 데이비드 로브슨 기자에 따르면, 괴롭거나 슬픈 경험을 한 사람들은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를 갖는 꿈을 꾸는 경향이 있다. 더 뚜렷하게 인식되고 기억되는 꿈으로, 격렬한 악몽도 거기에 속한다. 그는 “이를 통해 남은 인생 동안 새로운 트라우마를 겪더라도, 좀더 견딜만하게 느끼게 해준다”고 추측했다. 악몽은 일종의 예방주사인 걸까.


꿈 카메라를 만들다

어쩌면 바다를 동경하고 우주를 궁금해 한 인류가, 바다나 우주보다 닿기 어려워하는 곳이 잠과 꿈이 아닐까. 그 중에서도 꿈은 난해한 ‘소프트웨어’로서, 잠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아예 꿈을 ‘보려고’ 시도하는 과학자들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 ATR 계산뇌과학연구소 가미타니 유키야스 박사팀은 가수면 상태에 있는 세 사람의 꿈을 해독한 뒤 내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해 그 결과를 2013년 5월 ‘사이언스’에 실었다. 연구팀은 fMRI와 뇌자도(뇌 자기장)를 이용해 연구했다. 특히 시각과 관련된 뇌 부위에 주목했는데, 꿈을 꾸는 것은 꿈을 ‘보는’ 행위기 때문이었다. 만약 측정장치에 특이한 신호가 잡히면 자던 사람을 깨워 무슨 꿈을 꿨는지 물어보고 다시 재웠다. 이런 방식으로 하루 세 시간씩 7~10일 실험을 해, 한 사람당 200개 이상의 꿈 신호 자료를 모았다.

연구팀은 이 자료를 ‘남성, 음식, 자동차, 거리’ 등의키워드로 분류한 뒤 해당하는 사진과 연결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거꾸로 fMRI와 뇌자도 자료를 바탕으로 그 사람이 꿈을 꾸고 있는지, 꾸고 있다면 무엇이 등장하는 꿈일지를 예측했다. 실험 결과 75~80%의 정확도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맞췄고, 종류를 맞추는 실험도 그냥 추측한 것보다 정확하게 맞췄다. 언젠가는 정말 꿈을 기록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까. 악몽의 정체도 그땐 밝혀질까.


초식동물은 서럽다

2012년 9월 ‘사이언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동물은 크기와 형태가 비슷하더라도 먹을 게 부족하거나 먹이를 안정되게 먹을 수 있는 장소가 부족할수록 잠이 적었다. 짝짓기나 새끼를 키우는 활동이 힘겨운 척박한 환경의 동물도 잠이 적었다. 늘상 불안에 시달리며 풀을 뜯는 초식동물이 생각난다. 실제로 열량이 높은 먹이를 먹을수록(즉 육식성일수록) 잠이 많았고, 초식일수록 적었다. 야생에서 잠은 사치다. 사자는 종일 자도 괜찮지만, 가젤은 잘 수 없다. 당신은 사자인가, 가젤인가.


에필로그 : 잠이 인생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조금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잠과 꿈에 대해 온갖 과학 연구가 있었는데, 고작 자신을 괴롭히는 악몽의 정체조차 모른다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너그러워지자. 인류는 악몽은 커녕 꿈을 왜 꾸는지조차 정확하게 모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 꿈이 정말 꿈인지도 모르니까. 진짜 세상이 꿈 속에 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세상이 아득한 꿈이라고 믿고 싶은 악몽의 순간이 있으니까. 당신은 잠들어 있는가, 깨어 있는가. 당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자, 있는가 없는가.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14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윤신영 기자

🎓️ 진로 추천

  • 심리학
  • 철학·윤리학
  • 생명과학·생명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