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시대 구분은 부인할 수 없는 진화의 증거다.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고 진화론에는 흥미있는 과제가 많다는데 문제가 있다. -진화론측 입장
'과학동아' 7월호에 실린 '진화냐? 창조냐? '라는 논쟁기사는 그동안 국내에서 논란돼 왔던 내용들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반가웠고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편집에 있어서도 양쪽에 균형을 유지 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 점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사를 읽고 나는 우리나라 학계의 후진성을 실감했다. '화석이 창조론을 지지한다'라는 제목은 집필자의 전공을 고려해 차라리 '핵공학은 창조론을 지지한다'로 바꾸었으면 어떠했을까. 지질학이나 고생물학에 관한 이야기를 핵공학자가 공개적으로 논단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10문10답'에 있어서도 재료공학자나 식품영양학자가 자기 분야도 아닌 문제를 다루는 용기에 접하면서 아직도 우리 학계가 이토록 미분화상태에 있는가 하고 놀랐다. 분야가 날로 세분화돼 자신의 전문영역을 조금만 벗어나도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의 역할밖에 할 수 없게 돼있는 현대에 살고 있으면서···. 학문 전체를 조감하는 경우에도 해당분야 전문가에게 조언을 듣지 않으면 극히 피상적인 내용에 그칠 수밖에 없다.
급변설의 비과학성
생명현상 중에는 현대과학이 아직 밝히지 못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는 수많은 학설들이 제시되고 있으나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다. 이는 생명현상을 밝히려면 거시적인 것에서부터 분자나 원자의 수준에까지 완벽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하여 '지혜의 개입' 또는 '신의 창조'에 이 문제를 돌린다면 이는 과학자의 성실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진화는 관찰된 일도 없고 증명된 것도 아니다'라는 핵공학자의 말을 크게 논박할 것도 없지만 적어도 생물진화의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는 생물의 진화를 사실로 인정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화석자료는 창조론자들의 견해와 잘 일치한다'라는 말도 창조론자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화석을 다루는 어느 고생물학자도 화석 자료가 창조론을 지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이래 2백년 가까이 전세계적으로 지질계통이 수립되고 지질시대가 세분돼 왔다. 이는 생물의 진화학적 전환(轉換)이 지질시대에 수없이 많이 일어났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즉 지질시대가 세분될 수 있음은 각 시대마다 독특한 생물군이 생존했다는 사실에 근거하며, 각 시대마다 독특한 생물군이 생존했다는 사실은 곧 진화를 의미한다.
삼엽충 필석류 방추충 등은 고생대층을, 암모나이트는 중생대층을, 화폐석은 신생대층을 지시하는 표준화석으로 유명하다. 이들 외에도 고생물학자는 엄청난 양의 표준화석을 가지고 지질계통을 수립하고 있으며 지질계통은 지질학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창조론자의 주장대로 '모든 생물이 일시에 완벽하게 창조되어 유지 존속돼 왔다'고 한다면 고생대는 무엇이고 중생대는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동일과정설과 급변설은 오래 전 지질학 초창기에 이미 논란되고 걸러진 문제다. 이를 여기서 다시 문제삼을 필요도 없지만 일반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동일과정설이란 현재 지구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 현재만이 아니고 과거에도 일어났으며 미래에도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현재의 관찰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하는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이론이다.
급변설과 노아의 방주
창조론자들은 창세기의 노아홍수 설화를 역사적인 사실로 믿고 급변설을 아직도 주장한다. 홍수에 의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물에 잠겼으며 낭만적인 노아의 방주에서 지상의 모든 생물들이 40일간 홍수를 피했다고 생각한다. 1백50만종 이상의 모든 생물들이 40일간이나 노아의 빙주에서 대피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과학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40일이 아니라 4백일을 비가 내려도 해수면은 상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강수현상은 지구의 수권에서 일어나는 순환현상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기록대로 홍수가 일어났다면 수권의 양이 현재의 세배 이상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엄청난 양의 물이 어디로부터 쏟아져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신급변설(Neocatastrophism)이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있으나 이는 거대한 운석의 충격과 같이 현재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현상들이 과거에 간혹 일어났을 수 있다는 것이지, 종래의 창조론자들이 생각하던 급변 설로의 회귀는 결코 아니다.
'고생대에서 신생대까지 12개 지층을 수직으로 모두 보여주는 지층기둥(Geological Column)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에도 다섯 개의 지층만이 존재한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지질계통을 믿을 수 없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지질학에 대한 초보적인 상식만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다. 즉 고생대에서 신생대에 이르는 전 지질시대의 지층들이 하나의 지질단면에 모두 나타난다면 오히려 그것이 지질학적인 수수께끼다.
지층이 퇴적된다는 사실은 주위의 지역보다 낮은 저지대가 한동안 계속 침강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계속 일어나는 지각변동은 어느 한 지역을 저지대 상태에서 계속 침강만 하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그리고 지층이 두껍게 퇴적되면 반대로 지각평형(지각과 맨틀의 밀도차에 따른)에 의해 융기하게 돼 있으며, 반대로 지각이 융기하면 침식을 겪게 된다.
퇴적과 침식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어느 지역에서도 한 단면에 전 지질시대의 지층들이 모두 나타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여러 지층들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대비, 지질계통을 수립하고 있다 이 대비의 방법은 수학의 공리(公理)와 같이 부인할 수 없는 여러가지 기본적인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
굴드의 법정증언
1980년 10월 시카고 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린 진화학회에서 굴드와 엘드리지 등 고생물학자들이 다윈의 진화론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다윈이 제시한 점진적인 진화모델 대신 구두점식 진화모델을 제시했다. 이 사실은 미국의 극성스러운 창조론자들이 법원에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굴드 등이 창조론을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법원에서 "우리는 진화를 설명한 다윈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지 진화의 사실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라고 간명하게 증언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창조론자들이 끈질기게 강조하는 내용은 어느 생물이 다른 어느 종으로 진화한다면 그 중간형태의 종(種)이 화석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두점식 진화모델에 따르면 새로운 종이 탄생되는 것은 기존의 생물이 서식하는 모집단 내에서가 아니라 그 집단에서 탈출해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는 소수의 개체로부터 비교적 급속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 종이 화석으로 잘 보존되지 않을 뿐이다.
생물이 화석으로 보존되고 안되고는 생물 그 자체가 보존에 유리한 골격이나 각을 갖고 있는지, 지층이 쌓이는 현장이나 그 가까이에서 서식하는지 그리고 그 밖의 복잡한 생물학적 지질학적 조건 등을 고려해야 하는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졸른호펜(Solnhofen)의 시조새 화석은 파충류와 조류의 양쪽 특징을 소유하는 중간형태의 매우 드문 생물이다. 창조론자들이 지난 달 논쟁에서 주장했듯이 '날개에 발톱이 있는 새가 아직 존재하고 거북이에게도 이빨이 없다'는 단순한 논리로 시조새 화석의 의미를 가볍게 다루는 것은 옳지 않다. 일반인을 상대로 시조새 화석의 진화학적 의미를 설명한 웰른호퍼(Peter Wellnhofer)의 글이 미국의 과학대중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1990년 5월호 p.42~49)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이를 참고할 수 있다.
하와이섬의 생물상이 대륙과 다른 것은 오랫동안 격리된 상태에서 독립된 진화를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러한 생물의 지리적 분포는 대륙과 해양의 지질학적 변동과 생물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현상을 '생물학자들이 편리하게 구분한다는 의미 외에는 없다'고 하는 것은 생물지리학에 대한 몰이해일 뿐이다.
신생대 후기에 파나마지협이 생성되고 소멸된데 따른 육상동물군(群)과 해양 무척추동물군의 변화 그리고 호주대륙의 독특한 생물군 등은 지판(plates)의 이동에 따른 다른 대륙과의 통합과 분리 등 지질학적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물론 마다가스카르섬의 생물상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전문영역 고수해야
양서영교수가 결론으로 밝혔듯이 진화는 틀림없는 사실이고 이를 설명하는 학설은 학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이러한 학설은 새로운 정보나 증거에 의해 계속 수정돼 갈 것이다. 과학은 완성품이 아니고 늘 자체의 냉엄한 비판과 수정을 통해 계속 발전해가는 과정에 놓여 있다. 이는 과학의 허점이면서 동시에 강점이다.
그러나 창조론은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자체의 논리적 체계가 없으며 과학의 허점을 과장하거나 왜곡, 자신들의 교리에 과학을 맞추려고 한다. 따라서 창조론은 과학의 특성인 스스로를 비판하는 내용이 없어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창조론은 과학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과학과 관련된 직을 갖고 있는 일부 인사가 일반대중을 상대로 자신들의 종교를 과학으로 위장해 오도하는 것이며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자의 언어가 과학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자신의 전문영역을 고수해야 한다. 이는 학자가 취할 기본자세다. 과학은 어느 분야이건 시대에 따라 발전의 완급은 있지만 발전의 방향이 역행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아마추어가 함부로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논리적 체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타 영역에 관한 잘못 된 내용의 서적을 아무런 비판도 없이 읽고 그 내용을 과학자의 이름으로 일반대중에게 소개하는 일은 이제 그쳐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