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85년 7월 한국―독일 공동연구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인 구조용 세라믹스 개발 과제에 참여하여 1년동안 남부 독일의 공업도시 슈투트가르트 막스플랑크 분말야금 연구소에서 일했다. 필자는 우리나라 정부 출연연구소를 막스플랑크연구소와 비교함으로써 우리 연구소가 개선해야 할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인구 70만의 우리나라 수원 정도 크기의 슈투트가르트는 '보슈'전자회사, '다이뮬러-벤츠'자동차회사, 스포츠카로 유명한 '포르쉐'자동차회사 등 큼직한 공장이 자리잡은 공업도시였지만, 일요일의 도심 풍경은 민방위 훈련중의 우리나라 거리 만큼이나 한산하였다. 나중에 안일이었지만, 서독에서 7월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럽의 다른 휴양도시로 휴가를 떠나고, 비단 휴가철이 아니더라도 음식점과 술집을 제외한 상가는 평일에는 오후 6시면 문을 닫고 휴일에는 아예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약 10km 정도의 거리였으며, 막스 플랑크 분말야금 연구소(PML)는 시내에서 다시 약 10km 정도 떨어진 교외에 위치하고 있었다. PML은 약 5백여평의 대지위에 지상 2층 지하 1층의 연구동과 설비동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사진에서 보듯이 뒷편에는 아름드리 전나무 숲과 호수를 끼고 있을 뿐 아니라, '유럽의 벨 연구소'라 불리는 지상 6층 지하 2층, 연건평 1만 5천평의 막스 플랑크 물리연구소와 불과 50m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어서 연구소 입지조건으로 더없이 훌륭한 곳이었다.
잘알려 있듯이, 막스 플랑크는 1900년 광량자설에 의해 흑체복사 현상을 설명함으로써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물리학자이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베를린 대학 설립 1백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11년 결성된 빌헬름 황제학술 진흥협회가 2차대전후 개편되어 독일국민이 추앙하는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의 이름을 빌어 막스 플랑크 학술진흥협회로 개칭되면서 그 협회산하의 연구소를 일컫는 총칭으로 쓰이고 있다.
50여곳의 연구소를 총칭
협회 창립 이후 그때 그때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새로운 연구소가 신설되기도 하고 기존의 연구소가 폐쇄되기도 하여 현재 약 50여개소의 연구소가 뮌헨 베를릴 슈투트가르트 등에 산재하고 있으며, 연구분야는 자연과학 뿐 아니라, 법학 문학 등 인문 과학의 연구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이 연구소의 연구자금의 대부분은 정부에서 지원받고 있으나 예산의 배분, 연구과제의 선정등 운영은 학술원 회원이 주체가 되어 정부가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막스 플랑크 분말야금 연구소(PML)는 분말야금학의 기초연구를 수행할 목적으로 1969년 막스 플랑크 금속연구소 산하에 실 단위 규모로 현재의 위치에 신설되었으며, 현재는 구조용 세라믹스개발 그룹, 분말야금 그룹, 단결정성장 그룹 등 크게 3개의 연구그룹과 상편형 연구팀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연구실의 구성인력으로는, 설립당시부터 이 연구기관을 맡아 일하고 있는 폣쬬(Petzow) 교수를 책임자로 하여 4~5명의 그룹리더와, 박사학위소지자, 박사과정 학생, 연구객원을 포함한 30여명의 연구원, 15명의 전문기능원, 5명의 사무원 등 약 55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세라믹 엔진 개발 프로그램에 참여가 확정된 후 1천평 규모의 세라믹 연구동이 87년에 완공되었고 연구원과 기능원을 포함한 연구인력의 수는 85년 인원의 2배수로 증가하였다.
85년 당시 연구인력 가운데 외국인 연구원은 박사과정에 있는 인원을 포함하여 한국인 4명, 일본인 3명, 중국인 2명, 영국인 2명, 미국인 1명, 프랑스인 1명, 헝가리인 1명, 베트남인 1명, 이스라엘인 1명, 터키인 1명 등 17명에 달하여, 연구인력 가운데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50%에 이르고 있었다.
연구소의 규모와 자국인 연구인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외국인 연구원수로 미루어, 활발한 국제 공동연구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는 폣쬬교수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는 단기간의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조직을 확대시키지 않고 비교적 양질의 연구인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바람직한 정책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동안 이 연구소를 거쳐간 한국인 수는 20여명에 달하며 그 가운데 4명이 이 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타외국에 비하여 많은 한국인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데에는 한양대학교 문인형 교수께서 폣쬬 교수와 가진 개인적인 교분을 '한국-독일 공동연구협정'이라는 정부차원의 프로그램으로 확대시킨 공로에 힘입은 바 크다 하겠다.
연구동은 반 지하식으로 건설되어 지하층과 반지하층은 실험실로, 1층은 연구실로 이용되고 있었다. 1층에는 연구실 이외의 부대시설로 세미나실과 휴게실을 겸하고 있는 룸과, 특정 연구분야에 필요한 알뜰한 전문서적을 갖춘 소규모 도서실이 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연구에 필요한 대부분의 전문서적은 이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으나, 혹 도서실에서 구할 수 없는 자료는 50m떨어진 물리연구소의 대형도서관이나 시내의 금속연구소에서 자유로이 대출할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실험실에는 분말야금과 구조용 세라믹스 연구에 필요한 첨단장비가 중복됨이 없이 완벽하게 설비되어 있었으며, 안내자는 각 장비를 운영하고 있는 기능인력의 풍부한 경험과 높은 자질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구입년도가 꽤 오래된 장비가 기능인의 숙련된 솜씨에 의해 하자없이 운영되고 있다는 점과, 각 장비의 운영에 소요되는 소모품이 넉넉히 준비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활발한 연구활동을 가늠할 수 있었다. 더불어 연구소 규모에 맞는 소규모 공장실까지 갖추고 있어서 독립된 실험실 운영체제를 읽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지하층은 시편 제조에 관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고 반지하층은 시편의 끝 처리와 각종 실험장비를 설치, 아랫층에서 위층을 거치면서 세라믹스제조 및 실험의 전공정을 가장 가까운 동선내에 끝낼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스스로 연구과제를 설정
연구소 시설에 관한 안내를 마치고 앞으로 1년동안 수행해야할 과제에 대한 토의가 시작되었다. 먼저 구조용 세라믹스 개발 계획과 관련되어 PML에서 수행하고 있는 과제의 성격과 현재의 추진상황을 일러준 다음, 앞으로 한달간의 시간여유를 가지고 이러한 큰 연구범위 내에서 나의 관심분야와 그동안의 연구배경을 기초로 하여 스스로 연구과제와 실험방향을 도출하여 보라는 주문이었다. 비교적 자세하게 짜여진 실험방향을 제시하고 그 계획에 맞춰서 실험을 진행해 달라고 요구하리라 생각했던 나의 기대와는 달리 큰 과제의 테두리하에서 나의 관심에 맞는 새로운 세부과제를 수행해 보라는 요청은 신바람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한달여 기간동안 내가 연구해 보고 싶은 분야의 문헌조사를 끝내고, 그동안 같은 재료에 대하여 PML에서 축적한 데이타를 참고로 하여, 이미 결과가 나온 실험항목이나 명확하게 결과가 예상되는 실험은 배제하여 대충의 실험계획서를 작성하였다. 그후 이 분야에 연구경험이 많은 전문가와 3~4차례 토의를 거쳐 기술적 내용에 관해 수정을 가하고, 최종적으로 객원교수로 와 있는 권위자의 조언을 들은 후 계획서를 마무리지었다. 일단 계획서가 완성되면 기능인과 협의하여 각 장비의 이용가능한 날짜와 나의 실험을 도와줄 수 있는 일자를 체크하여 실험스케줄을 잡았다. 일단 실험이 시작된 후 나의 지도를 맡고 있는 슈버트(Schubert) 박사와 한달에 2~3차례 중간결과에 관한 토의를 하여 새로운 결과에 대한 해석과 미흡한 결과에 대한 보충실험을 그때 그때 행하면서 최초 설정되었던 연구목표를 향하여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다.
돌이켜보면 1년의 짧은 기간동안 3편의 논문을 작성하여 관련 국제학회에 나가서 발표도 하고, 학술지에 기고할 수 있게된데에는 다음 3가지 요소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공동연구 프로그램이라는 행정적인 규제에 얽매임 없이 참여인력이 독립된 세부과제를 스스로 제안하여 적극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둘째는 기능인력이 풍부한 경험과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어서 연구업무의 반 이상을 신뢰성있게 도와주었으며, 세째는 실험상 부딪치는 제 문제에 관하여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토론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규모가 크지 않은 연구소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수준높은 연구업적을 발표하고, 생동감 넘치는 연구분위기를 가질 수 있게 된 원인을 우리나라 정부 출연 연구소의 상황과 대비하여 정리해 봄으로써 우리연구소의 나아갈 방향에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첫째 '독립적 운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립적 운영은 연구행정의 독립적인 운영과 실험의 독립적인 수행을 포함한다. 조직면에서 PML은 앞서 기술하였듯이 막스 플랑크 금속연구소 산하 실단위 연구기관이며, 연구인력이나 시설규모면에서 우리 정부 출연 연구소의 부 단위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예산의 운용, 과제의 수행, 연구인력의 편성 등 연구행정의 대부분을 금속연구소 본부의 지도나 감독 간섭을 받지 않고 책임자급 교수의 판단하에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또한 실험수행 과정에 있어서도 금속연구소 건물과는 10km 떨어진 독립건물에 위치하여 분말야금과 세라믹스 연구에 필요한 대부분의 장비를 갖추어 놓고 자체적으로 선정한 과제를 소화해내고 있을 뿐 아니라, 전문연구기관답게 소규모 도서실, 공작실까지 금속연구소에 의존치 않고 개별적으로 운영하였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정부 출연 연구소는 전문지식을 가진 중간관리자의 결정권이 거의 없는 비대한 관리체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선 연구원에 의해 제기된 새로운 아이디어가 과제화 되기까지 비전문가로 구성된 여러단계의 심의과정을 거쳐야 하고,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설사 과제화 되었을 경우도 애초에 발의했던 연구내용에서 많이 벗어나게 되어 일선 연구원의 사기를 저하시켜 왔다.
또한 83년 KAIST 학사부와 연구부 통폐합시에는 각각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라는 고유의 연구분야를 도외시한채 거리상으로 1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두 연구소의 장비를 20억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부 단위로 통합시켜 놓았다. 각각 다른 방에서 행정을 보던 행정 인력을 하나의 방으로 옮겨 놓고, 각각 다른건물에서 실험하던 실험실을 한 건물로 옮김으로써 통합 후에 연구행정이 더욱 효율적으로 이루어졌고 더 낳은 연구성과가 있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89년 학사부를 다시 대덕연구단지로 옮길려는 계획에서 그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통폐합이후 애초에 기대하였던 연구장비의 효율적인 이용과 연구 협조체제와는 달리, 고유의 연구영역이 무너지고 서로 동일한 과제를 따내려는 과정에서 반목은 커지고 관리직의 재량권만 확대되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PML의 운영처럼 전문지식을 가진 중간 관리자에게 많은 재량권을 부여하고 각각의 고유 연구분야에 따라 독립적인 연구관리체제와 실험수행 방법을 모색해 보는것도 일선 연구원의 무력감을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자율과 책임의 양면성
두번째로는 '연구관리자의 선명한 자기 역할 수행'을 들 수 있겠다. 1969년 분말야금에 관한 기초연구의 필요성에 의해 실단위 규모로 설립된 PML이 오늘날 유럽의 세라믹스 연구소 가운데 가장 수준 높은 연구결과를 내는 연구기관으로 성장하게된 이면에는 그때 그때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새로운 과제를 이끌어온 책임교수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컸다고 할 수 있겠다. 구성인력의 학문적 배경과 그동안 연구소내에 축적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연구소 전체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새로운 과제를 도출하여 연구비를 따내기 위해서는, 연구 관리자가 그 분야의 학문적 성격과 연구소 분위기를 익히 아는 전문가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폣쬬교수의 경우도 슈투트가르트 공대에서 금속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은 후 줄곧 동일분야의 연구에 종사해 오다가 같은 분야의 연구소의 관리를 맡아왔다. 과제의 선정과 연구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나름대로 자신감과 통찰력을 갖고 연구소를 운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 정부출연연구소의 책임자는 연구소 설립당시부터 기여해 왔던 사람들이 아니라, 행정조직에 의해 위에서 임명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 조직내부의 문제점을 보고 느낄 기회가 없었으며, 책임자로서 연구소를 맡을 때부터 공부하여 정책을 결정하게 된, 그 정책은 상당한 위험을 수반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분들의 대부분은 수직적 사고, 경직된 조직이 지배하였던 사회에 몸담고 있거나, 그런 분위기에 동화된 사람들로서 또다른 윗사람들의 기대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전시효과를 발휘 할 수 있는 과제 중심으로, 연구분위기를 무시한 무리한 추진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질을 갖춘 전문가가 연구소의 책임을 맡아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각기 고유한 연구분야에 따라 독립적인 조직을 인정해주고 동시에 중간 관리자의 재량권을 확대해 나가는 방향으로 연구소의 관리체계를 축소 개편함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세번째로 '연구원의 연구능력이나 연구팀의 연구결과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학연이나 인맥이 배제된 객관적인 평가기준이 있어야 한다. 독일의 모든 대학은 국립대학으로서 대학간의 우열이 없으며 단지 특정대학, 특정학과에 어떤 전통과 어느 교수가 있느냐에 따라 약간의 선호경향이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질은 자연스럽게 학연에 얽매임이 없이 합리적 기준에 따라 평가된다. 예를 들면 PML에서 실험을 한 박사과정학생의 학위논문 심사시, 그 논문의 등급을 분명히 하여 높은 등급의 졸업자에게는 그 이후의 과제에 대하여 우선권을 줄 뿐 아니라, 팀장으로 성장하는 데 우선권을 부여한다.
연구원의 경우에 있어서도 과제의 도출, 연구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간섭을 하지않으나, 연구결과에 대해서는 엄격히 심사하여 다음 계약조건에 철저히 반영한다. 또한 개인의 연구결과도 적절히 분류 보관되어, 다음 연구자는 먼저번 연구자의 실험상의 오류를 피하고 그 이후의 연구를 수행 할 수 있게끔 연구결과를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우리의 경우, 그동안 많은 국책연구비가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 등에 뿌려졌고, 또 그에 상응하는 연구보고서가 연말이면 어김없이 배달되었기만 그 연구결과가 어떻게 분류되고 있으며, 어떻게 응용되고 있는지는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원 조차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한 고용계약서상에 명시된 조항에 따라 일정기간이 지난후에 계약을 갱신하고 있지만, 연구능력이 미흡하여 계약이 취소된 연구원이 있다는 말은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하였다. 더불어 남에 비하여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상대적으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불평들도 기실은 개인의 연구능력이나 연구결과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려주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라 생각한다.
전문기능인 확보도 필수조건
네째는 '전문적인 기능인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PML에서는 40여개의 대형장비에 15명의 전문기능인이 배치되어 2~3개의 연구장비를 상당한 재량권을 갖고 관리하고 있다. 연구원이 실험일정을 계획할때는 먼저 기능인들과 협의하여 장비사용 허가를 얻어야 하며, 연구업무의 반 이상을 그들이 수행하므로 그들의 스케줄에 실험일정을 맞추어야만 실험이 가능하였다. 연구원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하드웨어와 관련된 실험은 대부분 기능인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동일한 실험내용이 숙련된 기능인의 손에 의해서 수행되므로 실험치에 신뢰성을 부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아이디어에 의해 진행된 실험결과간의 비교가 용이하였다.
우리나라 연구소의 실 단위 인적구성을 살펴보면 대부분 선임연구원 수보다 연구원 수가 적고 또 기능인의 수는 연구원수보다 적은 역삼각형 구성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연구원은 기능인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각기 다른 일솜씨를 가진 연구원들이 필요에 따라 임의로 고가장비를 운영하다보니 고장률이 잦아 장비가 효율적으로 이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기능인력의 수가 부족하여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 기능인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여 주지못하여 이직률이 높아진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기능인과 연구원, 선임연구원간의 임금체제를 가능한 한 좁혀서, 우수한 기능인력이 안정된 가정생활을 바탕으로 연구업무를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하여 주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과제를 수행해 가는 과정에서 일선 연구원과 과제책임자간에 진지한 학술적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되고 있는 과제의 현재까지의 결과나, 시도하려는 실험에 대하여 연구원간에, 또는 연구원과 과제책임자간에 학술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데에는 연구원 스스로의 자세에도 문제점이 없지 않으나, 과제책임자들의 배타적인 사고와 무관심이 일차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과제 수행시 일선 연구원의 의견이 수렴되어 전달되지 못하고 과제책임자의 독단에 의해서 이끌어질 경우, 많은 연구원은 무력감에 빠지고 적극적으로 연구에 참여하기 어렵게 된다.
PML에서 연구기간 동안, 자기 스스로 선정한 과제에 대하여 매월 두차례씩 순번제로 세미나를 하고 있는 것을 지켜 보았다. 이런 대화의 기회를 통하여 전문가로 부터 실험방법상의 문제점과 해석의 오류를 지적받기도 하고, 동료간에 협조의 길을 열 수도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매월 두번 정도 열리는 초청연사의 세미나를 통하여 현재 부딪친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을 얻기도 하였다.
우리의 상황에서 연구원이 과제를 스스로 도출한다는 것은 어렵다 하더라도, 서로 긴밀한 학문적 대화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과제에 동참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막스 플랑크 분말야금연구실이 크지 않은 규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많은 연구결과와 수준높은 연구업적을 쌓을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았다. 1년의 짧은 연구기간 동안 느낀 점을 개인적인 견해로 기술하였으므로, 그 조직이 갖고 있는 단점을 쉽게 발견하지 못한 점도 있으리라 믿는다. 다만 이 글이 우리나라 정부출연 연구소가 현재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재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제언으로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