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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 섬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부 고고라는 인물이 살았는데, 키가 1m 정도로 작았고 온몸이 털로 덮여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 같은 영화에서 반인족 호빗은 발이 크고 털로 뒤덮여 있습니다.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지 않나요.
흥미롭게도 올해 7월에 62세의 나이로 타계한 호주의 고인류학자 마이크 모우드 박사는 2003년, 바로 이 지역에서 정말로 호빗 같은 난쟁이 인류의 화석을 발견했습니다. 몸이 아주 작고, 특히 머리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갓난아기보다 작은 수준) 화석이었습니다. 모우드 박사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인류라고 결론 짓고, 이 화석에 ‘플로레스 섬의 인류’라는 뜻인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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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호빗 화석
플로레스 섬에서 인류의 흔적이 나온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고고학 흔적은 약 70만 년 전부터 나타나거든요. 인류학자들은 약 100만 년 전부터는 인류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다른 섬인 자바 섬에서는 호모 에렉투스 화석(자바인)의 연대가 최고 180만 년 전까지 올라가는 데 비하면 다소 늦은 편이지요.
하지만 단순히 숫자로만 판단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지도를 한번 보세요. 수많은 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섬들은 주변의 바다가 얕은 지역과 깊은 지역이 나뉘는데, 이 경계를 ‘월리스선’이라고 합니다. 자바 섬은 월리스선보다 북쪽에 있습니다. 월리스선 북쪽이 바다가 얕은 지역인데, 빙하기가 반복되던 시기에는 바다의 높이가 지금보다 낮았기 때문에 이 지역은 아시아 대륙과 연결돼 있었습니다. 동물은 물론 인류도 걸어서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플로레스 섬은 월리스선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지역은 가장 혹독한 빙하기 기간에도 여전히 바다였습니다. 배를 타야만 다다를 수 있었고, 따라서 플로레스 섬은 아시아 대륙과 내내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약 100만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다니, 인류학자들이 흥미를갖는 것도 당연합니다.
정체도 의문이었습니다. 고고학 자료는 계속 발견됐지만 인류 화석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2000년대에 들어 드디어 인류 화석이 발견됐는데, 그게 바로 모우드 박사의 플로레스인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비슷한 화석은 이후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추가 발굴을 통해 화석의 주인공이 이 지역에서 적어도 약 6만 년 전부터 1만 8000년 전까지는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이 때는 호주에 현생인류가 살기 시작한 때와 비슷합니다. 과연 플로레스인은 현생인류일까요 아닐까요. 학자들은 플로레스인
이 현생인류라는 주장과, 현생인류가 아니라 아주 작은 체구의 새로운 인류라는 주장으로 나뉘었습니다.
논쟁은 먼저 두개골에 집중됐습니다. 두뇌 용량이 400cc가 채 넘지 않았는데, 갓난아기나 어른 침팬지보다 뇌가 작았습니다. 반면 현생인류 중 난쟁이는 다릅니다. 키는 1m가 넘지 않는 것은 같지만, 두뇌 용량은 보통 사람의 머리 크기와 별로 다르지 않거든요. 이를 바탕으로 생각하면, 플로레스인 화석의 주인공은 단순한 현생인류의 난쟁이는 아닙니다. 혹시 머리가 작아지는 ‘소두증(microcephaly)’에 걸린 건 아닐까요. 그래서 이 병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몸의 특징을 플로레스인에게서 찾았지요. 대표적인 게 두뇌의 생김새가 달라지는 증세와, 몸의 발육부진입니다.
플로레스인이 새로운 인류라는 사람들은 플로레스인과 소두증 환자의 뇌는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2005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인류학과 딘 포크 교수팀의 연구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정교한 영상기법을 이용해 플로레스인의 화석 두뇌를 촬영한 결과, 플로레스인의 두뇌는 소두증 환자의 두뇌만큼 작지만 생김새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조차도 결론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미국 컬럼비아대 인류학과 랄프 할로웨이 교수가 “플로레스인이 죽은 뒤 머리뼈가 땅속에서 찌그러져서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고 맞서며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거든요. 이 두 학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인 ‘타웅 아이’의 화석을 놓고 20년 넘게 격렬하게 논쟁을 하고 있는 숙적인데, 이번에는 플로레스인 화석을 놓고도 맞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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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증거, 작은 손목 뼈
머리가 결론이 안 나자, 다른 인류학자들은 나머지 특징에 주목했습니다. 도구 제작 여부도 그중 하나입니다. 침팬지나 갓난아기보다 작은 두뇌로 과연 돌도구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의심한 것입니다. 플로레스에서 나온 돌 도구는 200만 년 전 아프리카의 올도완에서 만들어진 도구와 비슷합니다. 혹시 몇 백만 년 전 조상 인류와 비슷한 사람이 만든 건 아닐까요. 혹자는 400cc의 두뇌 용량으로는 절대 그런 돌 도구를 만들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시 다른 인류가 있었을까요.
몸집에 주목한 학자도 있었습니다. 플로레스인의 팔 뼈는 현생인류 중 가장 몸집이 작은 아프리카의 피그미족이나 안다만 섬 사람들 중 작은 사람과 비슷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인류학자들은 플로레스인이 현생인류의 ‘미니 버전’이며 성장이 불충분한 병에 걸렸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위해 고병리학자들은 팔다리 뼈의 바깥쪽이 얇은 점과 좌우가 비대칭인 점을 찾아냈습니다.
장부진의 단서입니다. 종아리 뼈도 휘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정상 범위 내의 변형이라 확증은 아니라는 단점이 있습니다.
논쟁의 종결은 아주 작은 데에서 찾아왔습니다. 손목 뼈 중 하나인 ‘작은마름뼈’입니다. 이 뼈는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태아가 수정된 지 얼마 안돼 모습을 갖추기 때문에 임신 3개월 이후의 발달 장애에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뼈의 형태를 보면 발달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화석의 주인공이 인간인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연구 결과, 플로레스인의 손목 뼈는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플라이오세(530만~260만 년 전)의 초기 인류와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인간보다는 유인원의 손목 뼈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이제 이들이 현생인류와는 다른 인류라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럼 플로레스인은 왜 몸집이 작아졌을까요. 가설 중 하나는 섬왜소증(island dwarfism)입니다. 섬에 고립된 동물은 본토에서와는 다른 진화 경로를 거칩니다. 코끼리는 작아지고 쥐는 커집니다. 코모도도마뱀도 커졌습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연구가 많이 필요한 주제입니다. 섬에서 고립돼 몸이 작아졌는지, 작아진 몸을 가지고 섬으로 왔는지부터 꼼꼼히 살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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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후손일까
플로레스인의 팔다리 뼈의 길이, 골반 뼈의 생김새는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와 비슷합니다. 몸 크기나 머리 크기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범주에 속합니다. 만약 플로레스인과 비슷한 화석이 루시가 발견된 동아프리카의 300만 년 전 지층에서 발견됐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발견 장소는 아시아였죠.
그런데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는 화석이 또 있습니다. 조지아의 드마니시에서 나온 화석입니다. 이 화석 역시 호모 에렉투스와 비슷한 시기의 아시아 지층에서 발견됐지만, 머리나 골격 크기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비슷합니다.
만약 두 화석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속한다면 어떨까요. 그야말로 인류 역사를 뒤바꾸는 엄청난 일입니다. 지금 인류 진화에서 정설은 이렇습니다. 몸과 머리가 작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중 일부가 진화를 통해 몸과 머리가 커졌습니다. 또 고기도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호모 속이 됐고, 아프리카 바깥 세상으로 진출했습니다. 호모 에렉투스가 그랬고, 우리 현생인류도 그랬습니다. 이 가설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능력이 부족해 아프리카 밖으로는 나가지 못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드마니시의 인류나 플로레스인이 아프리카를 탈출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후손이었다면 이 가설은 무너집니다. 특히 아시아에서 호모 속이 진화했다는 ‘아시아 기원론’도 힘을 얻을 수 있어 큰 파장이 일 것입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를 제시해 봅니다. 30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중 일부가 아프리카를 빠져 나와 초원지역을 따라 유라시아로 퍼졌습니다. 그 중 한 집단은 흘러 흘러 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 섬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섬 안에 갇힌 채 최근까지 살아남았고, 이게 발견된 난쟁이 화석의 정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검증을 거치려면, 적어도 두개골이 한 점은 더 나와야 합니다. 플로레스인의 두개골이 단 하나밖에 없는 지금 시점에서는 내릴 수 있는 결론이 하나도 없습니다. 플로레스인의 발견자 모우드 교수는 막 타개했지만, 그 때에 버금가는 발견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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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와 미국 미시건대 인류학과를 졸업한 뒤 2001년부터 UC리버사이드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공은 고인류학이며 인류의 두뇌 용량의 변화, 노년의 기원, 성차의 진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암벽화, 화살촉 등 유적을 자료화하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shlee@ucr.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