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6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싱가포르. 세계지도를 펴놓고 싱가포르에서 한국까지 컴퍼스로 찍은 다음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원을 그려보자. 이 원 안에는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중국과 일본, 호주 그리고 두바이 등 현재 과학연구와 경제발전이 활발한 나라들이 모두 들어온다. 과학과 경제가 성장하고 있는 세계 각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이 갖춰져 있는 것이다.
사실 싱가포르는 인구가 500만 명에 불과한 도시국가다. 그래서 우수한 해외인력을 유치하는 데 적극적이다. 우수한 인재 유치와 양성을 성장동력으로 삼은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싱가포르는 무역국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업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전자산업에 대한 연구 투자도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투자와 인재 유치 노력의 중심에 싱가포르 국립대(NUS,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가 있다.
QS 대학평가 아시아 대학 순위 2위를 차지한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종합대학이면서도 전세계 순위에서 자연대 16위(아시아 2위), 공대는 9위(아시아 2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영미권에서 상위권 순위를 휩쓸었던 분야다. 학문적 변방으로 취급받던 아시아권 대학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탄 초추안(Tan Chorh Chuan) NUS 총장은 이에 대해 “글로벌 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해 전세계 최상위 수준의 교수를 영입하고 영향력 높은 연구에 집중한 것, 국제적 협력과 네트워크를 통해 교육에서 더 넓고 높은 수준의 그림을 그린 것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기자가 대학을 찾았을 때 신입생들은 싱가포르 독립기념일 행사 준비로 바빴다. 재활용 쓰레기를 활용해 퍼레이드카를 만들고 있었다. 전자컴퓨터공학과 박사과정 신영준 씨는 “술을 마시는 대신 이런 활동을 통해 서로 단합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전세계 곳곳에 거미줄 네트워크
싱가포르는 역사적으로 영국 등 세계열강들이 무역기지 거점으로 삼았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도 4개다. 영어, 말레이어, 중국어, 타밀어를 모두 쓴다. 화폐나 지하철에도 4개의 언어가 함께 표기돼 있다. 싱가포르는 이민을 장려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언어권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해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때문에 NUS에서 100% 영어강의를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해외우수한 교수와 학생 유치에 날개를 달아줬다.
자연대에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양자 정보 기술(Quan tum Information & Technology)연구소’가 있다. 이 연구소를 위해 양자 기술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옥스퍼드대의 아르투르 에커트(Artur Ekert) 교수를 영입했다. 뿐만 아니다. ‘기계생물학(Mechanobiology) 연구소’를 위해 콜
롬비아대의 마이클 쉬츠(Michael Sheetz) 교수가 왔다. 최근에는 그래핀 연구센터도 만들었다. 역시 보스턴대의 석학이 초청됐다. 해당분야의 권위 있는 교수와 함께 연구한다는 것 외에 다른 효과도 있다고 NUS 자연대 학장인 앤드류 위(Andrew Wee) 교수는 말한다. “이런 뛰
어난 학자들이 오면서 함께 연구하는 동료도 옵니다. 이 사람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NUS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계 다른 연구실이나 대학과 협력연구를 할 수 있는 길도 더 많아집니다.”
NUS에는 한국인 교수 30여명과 학생 약 50명이 있다. 기자가 학교를 찾았을 때는 성균관대와 KAIST 대학원생이 여름학기를 맞아 교환학생 자격으로 NUS의 연구실에서 인턴십을 하고 있었다. 이들도 NUS의 철저한 교육시스템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엄격한 학사관리로 유명한 캠브리지대에서 온 교환학생들도 NUS에서 A학점을 받지 못했다고 하니 가히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우수한 해외 인력을 영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NUS 학생을 해외로 보내는 것도 중요한 정책 중 하나다. 현재 자연대와 공대의 학생들은 최소한 한학기라도 해외 다른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하고 있다. 앤드류 위 학장은 “현재 50%의 학생들이 미국과 유럽 등으로 가서 공부하고 온다”고 밝히며 “앞으로 이 비율을 70%까지 올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해외에 다녀온 학생들은 눈빛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난 후에 세상을 보는 시각이 그만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NUS 오버씨 컬리지(oversea college)라는 프로그램도 있다. 학생들이 실리콘밸리 등에 가서 공부하고 각 지역의 기업에서 1년 동안 인턴십을 경험하도록 한다.
엔지니어 리더를 키운다
“NUS 공대는 학생들이 단순히 버튼을 누르고 기술만 익히는 엔지니어(기술자)가 아니라 엔지니어 리더(지도자)가 되길 원합니다.”
NUS 공대 부학장인 빅터 심(Victor Shim) 교수는 이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실전에서는 하나의 프로젝트에 여러 전공 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때문에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만 생각하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전체적인 그림을 볼 줄 아는 리더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공대에서는 이를 위해 특별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한다.
우선 ‘글로벌 엔지니어링 프로그램(GEP)’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우수한 학생들 사이에서도 최상위권인 학생을 위해 고안했다. 프로그램을 선택한 학생은 캠브리지대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한다. 캠브리지대는 전세계에서 MIT등 단 4개 대학과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NUS다. 보통 학부과정은 4년이지만 이 프로그램을 선택한 학생은 3년 만에 학부과정을 끝낸다. 다른 학생들이 졸업하는 해에 이 학생들은 이미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전액장학금으로 운영돼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다. 또한 이 학생들은 NUS의 프로그램과 다른 우수 대학의 경험을 모두 갖고 있어 기업에서 더욱 선호한다.
또 하나, 공대에 입학한 학생들은 첫학기를 마치고 나면 ‘디자인 중심 과정(DCC)’에 지원할 수 있다.
“공대에 입학하면 보통 2학년 때까지는 거의 모든 학생이 배운 지식을 어디에 쓰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3, 4학년 때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지금까지 배운 것을 엔지니어가 이렇게 쓰는구나’ 느끼죠. 그래서 아예 1학년 2학기부터 프로젝트를 주고 여러 전공학생들이 모여서 각자의 전공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전기자동차의 성능을 향상시키기’ 같은 것들이죠. 재료공학, 역학 등 수업을 들으면서도 이것을 전기자동차에 어떻게 적용할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제의 전체적인 면을 볼 수 있고. 더불어 다른 전공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능력도 향상됩니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공학과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프로젝트 중심활동에 뛰어난 학생이 있다면 그들에게 맞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물론 다른 분야와 융합연구를 하려면 기초가 탄탄해야 한다. 심 부학장도 기초의 중요성을 여러번 이야기 했다.
“기술자가 아니라 기술을 혁신하는 사람을 원합니다. 기초를 잘 닦은 사람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전기컴퓨터공학부 양현수 교수도 “기초적인 연구 없이는 더 높은 수준의 연구를 할 수 없다”며 기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글로벌 엔지니어 리더를 키우기 위해서 이런 프로그램 말고도 ‘교육’에 특별히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양 교수는 “교육면에서 굉장히 엄격한 학교”라며 그 예로 ‘튜토리얼’을 꼽았다. 학생들에게 연습문제를 풀어주는 것을 말하는데,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대다수 나라의 대학에서는 대학원생인 조교가 맡아서 문제를 풀어 준다. 그러나 NUS에서는 반드시 교수가 하도록 해 수업의 질을 높이고 있다. 교육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전기컴퓨터공학부에서 광통신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김훈 교수는 “교수기술을 평가할때 같은 과 교수와 다른 과 교수 몇 명이 참관한 후 평가할정도로 교육에 대한 관리와 평가가 엄격하다”고 밝혔다. 이처럼 관리가 철저하기 때문에 질높은 교육을 받은 졸업생이 전세계에서 평판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시간과 돈, 아낌없는 지원
NUS는 탄탄한 교육을 바탕으로 연구중심대학으로서 새롭게 발돋움하고 있다. 공대 기계공학과는 QS 전세계 랭킹5위를, 전기전자공학과는 11위, 자연대 재료과학과는 7위를 기록했다. 김훈 교수는 이러한 놀라운 순위가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꼽았다. “1년에 1과목~1.5과목만 가르치면 됩니다. 행정업무도 매우 적은 편이라 훨씬 많은 시간을 연구에 쏟을 수 있습니다. 젊은 연구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경제적인 지원도 어마어마하다. 평균적으로 받는 연구비는 한국의 5~10배에 달한다. 나노코어 연구센터에서 연구실을 이끄는 양 교수는 “연구실에서 최근 3~4년 동안 받은 연구비가 150억 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주로 정부지원이 많다. 2012년 공대 전체 연구지원비가 약 870억원 정도다. 신영준 씨는 “박사과정은 거의 학비가 면제된다”며 “생활비로 쓰는 장학금이 월 200만원을 넘고, 박사후과정은 기업연봉과 비슷한 수준의 연봉을 받는다”고 말했다. 교수 평균 연봉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물론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만큼 1년마다 연구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3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등 평가에 대한 부담도 있다. 테뉴어(정년보장)를 받더라도 평가는 피할 수 없다. 평가를 철저하게 연봉에 반영한다. 그러나 앤드류 위 학장은 평가 때문에 논문인용횟수나 논문수 등에 집착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저 좋은 연구를 하면 됩니다. 수치보다 얼마나 좋은 연구냐가 중요합니다.”
NUS는 학부생들의 연구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더 많은 학부생들이 연구에 참여하도록 할 계획이다. 싱가포르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현상은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자연대는 어렸을 때부터 과학을 즐겁게 접할수 있도록 초, 중, 고등학생을 위한 ‘과학실험실(Science Demonstration Lab)’을 운영한다.
탄 초추안 총장은 “열정적이고 재능 있는 학생, 뭔가 색다른 것을 하고 싶은 학생이라면 NUS로 오라”는 이야기를 하며 “물론 학문적으로 뛰어나야 하며 지적인 호기심도 많았으면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학생들이 리더십을 갖고 영향력 높은 연구와 공동체에 대한 기여를 통해 아시아와 전세계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