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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 신선, 여래, 그리고 원숭이



이야기 하나

양강 땅에 큰 부자가 살았다. 아들은 없고 십 오륙 세 되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시름시름 앓더니 명의를 모두 불러 보여도 차도가 없었다. 병을 고치면 만금을 주겠다는 방을 걸자 소문을 듣고 어중이 떠중이들이 몰려들었으나 당연히 병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

그때 누군가 부자에게 도사 이야기를 했다. 부자는 글을 배운 사람으로 괴력난신을 배격하여 한 번도 점을 치거나 굿을 벌인 적이 없었으나 이때는 마음이 움직였다. 도사는 약음 출신이라 했는데 언제 태어났는지 아무도 몰랐고, 언제 어디서 도를 통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어디 사는지 알 길이 없는데 장이 서면 간혹 나타나 술을 사간다고 했다. 사람을 가려 아무리 청해도 옷소매를 뿌리치는가 하면 청하지도 않았는데 나타나 도술을 부리는데 손가락을 흔들어 구름과 비를 부르고 부적 한 장으로 온갖 병을 고친다 했다.

부자는 큰 술도가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딸의 병을 고쳐주면 가장 좋은 술을 하루 종일 마시게 해주겠다고 방을 걸었다.

술을 마시겠다고 의술을 부리는 사람은 드물어서 방을 내건 지 사흘째 오후에, 마침내 허름한 옷차림에 얼굴이 꾀죄죄한데 눈빛만 이상하게 갓난아이처럼 맑고 푸르스름한 노인이 문을 두드렸다. 딸 아이를 보였더니 슬쩍 웃으며 은젓가락을 청했다. 영문을 모른 채 가져다주니 옷소매에서 작은 향을 내어 피웠는데 잠시 기다리자 소녀의 입술 사이에서 작은 아지랑이 같은 검은 것이 한줄기 나왔다. 젓가락으로 잡더니 호리병에 넣고 마개를 닫자 소녀가 눈을 떴다.

부자가 사례로 술동이들을 내어오자 도사가 빙그레 웃었다. “약속하신 대로 하루 종일 마실 수 있습니까?” 부자가 화답했다.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드셔도 좋습니다.” “저 혼자 마셔서는 재미가 적으니 같이 마시는 게 어떻습니까?” 부자가 거절할 수 없어 “좋습니다.”

대답하자 도사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돗자리를 꺼내어 펼쳤다. 땅에서 한 치쯤 떠서 바람이 없는데도 조금씩 살랑거렸다. “이 위로 올라 오시죠. 좋은 술을 주시니 저도 작은 답례를 하고 싶습니다.” 부자가 차마 사양할 수 없어 조심스레 그 위로 올라가 앉았는데, 돗자리는 부자의 육중한 몸이 실려도 가라앉지 않고 처음과 똑같이 살랑거렸다. 도사도 웃으며 그 위에 올라가 앉았다. “그런데 술독을 싣기에는 자리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부자가 묻자 도사가 대답했다. “술독은 번잡스러울 뿐 어찌 반드시 필요하겠습니까.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옷소매에서 작은 술병 하나와 술잔 두 개를 꺼냈다. 밑이 빠진 술병이었는데 기울이자 잔 두 개가 가득 찼다. 향을 맡아보니 부자의 술도가에서 가장 세고 좋은 술이었다.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가솔 중 하나에게 술독들을 살펴보게 했더니 하나가 봉한 뚜껑은 그대로인데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두 잔 어치 되겠지요. 허공은 실제로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어서, 요령이 있으면 자르고 굽히고 붙여 서로 이을 수도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손짓을 하자 돗자리가 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부자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부자의 저택이 등 뒤로 멀리 사라졌다. 놀라는 부자에게 도사가 웃으며 말했다. “술을 즐기기 위한 작은 재주입니다. 하루가 지난 후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한 잔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돗자리는 곧장 서쪽으로 날았다. 날아가는 속도가 땅이 스스로 도는 속도와 동일했기 때문에, 해는 출발했던 시각에서 한치도 더 기울지 않았다. 부자와 도사는 끝없이 술이 흘러나오는 작은 술병을 번갈아 술잔에 기울이며 오후의 따뜻한 햇살과 함께 눈아래 펼쳐지는 이국의 낯설고 신기한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도사는 아득한 고대의 일부터 천만 리 바깥 세상의 이야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옷소매에서 꺼낸 나무젓가락을 꺼내 돗자리 아래 세상으로 뻗어 이름은커녕 재료와 조리법도 짐작하기 힘든 갖가지 산해진미를 집어 올리자 더 필요한 것이 없었다. 부자는 도사를 따라 술잔을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웠다. 마침내 술병을 기울여도 더 이상 술이 나오지 않자 도사는 돗자리의 속도를 조금씩 늦추어 아래 세상의 시간이 그들을 따라잡도록 했다. 천천히 등 뒤에서 낯익은 풍경이 다가왔다.

그들이 다시 집에 돌아온 것은 출발한 지 석 달이 지난 뒤였다. 처첩과 비복들은 다만 술독들이 꾸준히 줄고 비는 것을 확인하며 애써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술독이 빈 날 밤에 마침내 부자와 도사가 둘 다 대취한 채로 돌아온 것이었다. 부자는 병색이 완연히 가시고 혈색 좋은 꼬마 아씨로 돌아온 외동딸을 보며 다시금 도사에게 거듭 감사했고 도사 역시 크게 웃으며 좋은 술을 마음껏 마시게 해준 것에 감사한 다음 돗자리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이야기 둘

경원 지방에 양씨 성을 쓰는 서생이 하나 살았다. 글보다 숫자를 좋아해서 주비산경이나 구장산술, 양휘산법 등은 진즉 통달하고 색목인들의 책을 어렵게 들여와 보았는데 그러느라 가세가 기울어 마침내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만 겨우 책을 읽는 신세가 되었다.

하루는 밭갈이를 마치고 낡은 도끼를 들고 뒷산에 올랐다. 삭정이를 서툴게 자르는데 어디선가 맑고 깨끗한 소리가 들렸다. 기이하여 찾아가 보니 우거진 나무 사이 푸른 풀밭에 수염과 머리가 하얀 노인 둘이 돌로 된 바둑판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가가도 알아차리지 못해 용기를 내어 바둑판을 들여다본 양생은 깜짝 놀랐다. 바둑에 문외한은 아니었으나 아무리 보아도 아무 맥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수 한 수 놓을 때마다 무슨 의미일까 궁리해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무의미한 위치에 무의미한 돌을 놓는데 노인들은 너무 골몰해서 감히 입을 열어 이유를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친 노인들일까? 그러나 눈빛이 서늘하게 맑고 투명해서 오히려 시정의 예사 사람들이 아니라는 확신만 들었다.

그리고 확신에는 의문들이 따라왔다. 이 미친 짓에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 걸까? (어떠한 의미라도 있기는 있는 걸까?)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걸까? (목적이 과연 있을까?) 무질서는 과연 정말로 질서가 없는 걸까? 고도로 복잡해진 질서를 과연 무질서와 구별할 수 있을까? 무의미는 어떠한가. 과연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 자체가 벌써 하나의 의미가 아닌가. 무의미한 존재란 과연 가능할까?

그러자 세상이, 우주-공간의 터 위에 지어진 시간의 집-안의 모든 것들, 불가에서 흔히 삼라만상이라 일컫는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커다란 그림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 살짝, 그것을 가린 두터운 휘장을 걷고 양생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그 그림 안에서는 작은 것도 큰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작은 것도 그 안에 무수히 많은 큰 것들을 담고 있었고 가장 큰 것도 가장 작은 것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전체 안에 부분이 있었고 부분 안에 전체가 있었다. 그 때, 젊은이 술 한 잔 하겠나? 정신을 차려보니 노인 하나가 술잔을 내밀었고 다른 노인도 조용히 웃고 있었다. 이들이 술을 마시며 바둑을 두고 있었나? 기억나지 않았지만, 인사도 없이 기웃거리던 터에 사양할 수 없어 잔을 받아 몸을 돌리고 마셨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 이름을 알 수 없었지만, 술을 좋아했다 한들 이름을 알 수 있는 술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모금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술기운이 마치 낡은 종이가 담묵을 빨아들이듯 온몸에 퍼졌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는데 정작 나뭇잎이나 풀잎은 흔들리지 않았다.

됐군. 다른 노인이 무심히 말하며 다시 한 수를 두었다. 술을 권한 노인도 다시 양생을 잊고 반상만 골똘히 내려다보았다. 꽃이 지고 녹음이 옅어지고 낙엽이 지고 눈이 녹았다.

꽃이 피고 녹음이 짙어지고 단풍이 들고 눈이 내렸다. 양생은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계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노인 중 하나가 반상에서 눈을 들어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세월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네. 다른 노인이 다시 돌 하나를 놓으며 말을 받았다. 사람의 목숨은 몸에 매였고 몸은 음과 양, 밤과 낮의 섭리에 매여 있지. 음과 양, 낮과 밤, 흑과 백. 양생은 다시 반상을 쳐다보았다. 검은 돌이 놓이고 해가 지고 하얀 돌이 놓이고 해가 떴다. 돌이 놓일 때마다 바람이 불고 꽃이 졌다. 돌이 놓이고 꽃이 피고 돌이 놓이고 바람이 불었다.

마침내 양생은 대국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깨닫는 순간 천지가 울고 우주가 몸을 떨었다. 노인들은 정말 무작위로 한 수 한 수 두고 있었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무작위였다. 아주 간간이 돌을 따내면서 돌이 반상을 가득 메우고 나면 승패를 가리지 않고 돌을 쓸어낸 다음 다시 처음부터 다시 두기 시작했다. 단 한 수만 다르게. 돌들이 놓이는 맥락이 보이지 않아 똑같은 착석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제야 단 한 수가 매번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가로 열아홉 줄 세로 열아홉 줄이 만드는 삼백육십일 개의 교차점에 검은 돌과 하얀 돌이 번갈아 한 점씩 놓여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의 수의 가지들 : 빈 반상에 흰 돌이 처음 놓일 수 있는 자리는 삼백육십일 개이며, 다음에 검은 돌이 놓일 수 있는 자리는 삼백육십 개, 그다음 흰 돌이 놓일 수 있는 자리는 삼백오십구 개…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거대한 숲 하나를 일구어낼, 경우의 수들의 가지들. 두 노인은 그 거대한 숲의 나뭇가지 하나하나를 오르내리는 작은 다람쥐들일 뿐이었다.

영원한 대국 속에서 해가 뜨고 닭이 울고 해가 지고 소쩍새가 울었다. 별들이 밤하늘에서 원을 그렸고 그 원의 중심도 천천히 한쪽으로 기울었다. 산 아래 평야가 솟아올라 산이 되었고 산이 내려앉아 평야가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노인 둘은 묵묵히 대국을 계속했고 양생은 계속 지켜보았다. 마침내 해가 점점 붉게 달아오르고 부풀기 시작했다. 그즈음 전후로 주변의 풀과 나무, 작은 동물들이 모양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는데, 해가 부풀자 노인 중 하나가 성가시군, 중얼거리면서 잠시 일어나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고 주위에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그 뒤부터는 원 안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대국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마침내 첫 돌이 놓이는 자리가 천원 아래로 내려가고, 이즈음 태양은 이미 하늘 전체를 덮어 이글거리다 사그라들어서 하얗게 말라붙고, 밤하늘에는 달도 없이 온통 희뿌옇기만 한데, 이미 그 전에 한 노인이 숨을 불어넣은 민들레꽃 갓털 한 송이가 빛을 밝혔기에 반상의 흰 돌과 검은 돌은 분간할 수 있다. 마침내 별들이 하나씩 꺼지고 영원히 희뿌연 적막과 적요와 적멸만이 원 바깥을 가득 메웠을 때에도 흑과 백의 조합은 계속된다. 백은 양, 흑은 음, 백은 존재, 흑은 무, 혹은, 백은 양성자, 중성자, 전자, 그리고 물질, 흑은 반양성자, 반중성자, 양전자, 그리고 반물질. 대국이 계속되고 우주가 늙어감에 따라 반상 위에는 백보다 흑이 더 많아진다. 백과 흑이 번갈아 놓는다는 바둑의 가장 기본이 되는 규칙마저도 풀면 경우의 숲은 헤아릴 수 없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우거진다.

마침내 백돌 하나가 삼백육십일 개의 반점에 한 번씩 놓이는 삼백육십일 번의 대국이 모두 끝나고, 흑돌이 반상을 가득 메우는 삼백육십이 번째 대국마저 끝나자 비었다고 할 수도 없고 무언가 있다고 할 수도 없는 허공은 검다고도 할 수 없고 검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빛깔로 번득인다. 노인 하나가 묻는다. 이제 큰 대국이 또 한 번 끝났는데 어쩌겠소? 다른 노인 하나가 양생을 돌아보며 답한다. 아마 처자가 있었을 테니 다시 데려다 주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집이 생각났다. 맙소사, 이 미친 대국을 보느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이미 원자 단위로 흩어져 버린 도끼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그는 아내와 아이와 집과 고양이를 생각했다. 그들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멀리,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멀리. 양생의 너무 어리석고 너무나도 뒤늦은 후회에도 아랑곳 않고 노인 하나가 웃으며 흰 돌을 집어 빈 반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럽시다. 그러자 깊은 혼돈 속에서 다시 눈부신 빛이 생겨났다.

이어서 다른 노인이 검은 돌을 놓았고, 그렇게 대국이 계속되었다. 빛이 가라앉자 어둠이, 무에서 존재가 태어났다. 공간이 식어 원자로 응결했고 원자들의 구름 속에서 별들이 태어났고 행성과 위성들이 그 주위를 선회하기 시작했다.

원 주변에 땅이 생기고 그 위로 하늘이 열리고 낮과 밤이 찾아오고 해와 달이 떴다. 땅 위로 풀이 자라나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거대한 길짐승들이 사방을 메우더니 어느덧 토끼가 뛰고 여우가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멍한 표정의 서생 하나가 도끼를 어색하게 들고 산 위로 올라왔다. 망설이다 원을 넘어 양생의 자리에 앉았다.

“뭐하는 겐가, 이젠 집에 가야지!”

놀란 양생에게 노인 하나가 돌을 집다 말고 말했다. 양생은 홀린 표정으로 일어나 서생이 들고 온 도끼를 집어 들었다. 다시 대국에 열중하는 두 노인에게 엎드려 절한 다음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집에 돌아온 양생에게 아내는 땔감은 어쨌느냐고 물었고 아이는 놀아달라고 매달렸으며 노란 털의 작은 고양이는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했다. 저녁을 먹고 불 끈 방에 누워 양생은 생각했다. 무한 속에서는 정말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있는 걸까? 영원 속에서 우주는 정말 반복되는 걸까? 나는 정말로 집에 돌아온 것일까? 나는 정말 나인 걸까? 잠든 아내와 잠든 아이와 잠든 고양이의 나직한 숨소리 속에서 양생은 답을 얻고 비로소 잠들었다.




이야기 셋

여래가 원숭이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하고 내기를 해보자꾸나. 네 재주가 그렇게 대단하다면 구름을 타고 내 오른 손바닥에서 빠져나가 보아라. 내 손바닥에서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네가 이긴 것으로 쳐주마.” 원숭이가 코웃음을 쳤다. “내 술법은 구름을 한 번 타면 십만 팔천 리를 날 수 있다구! 고작 한 자도 채 못 되는 당신 손바닥에서 설마 벗어나지 못할까?” 여래가 답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말을 마치고 오른 손바닥을 펼쳐 내밀자 원숭이는 구름을 불러 올라탔다.

당대의 십만 팔천 리는 대략 사만 팔천 킬로미터. 한 번 올라타는 것을 일 초로 가정한다면 광속의 약 육 분의 일. 상대성이론의 효과는 미미했다. 여래는 오른손을 부드럽게 뻗어 (광속의 오 분의 사에 서 십 분의 구 정도였다) 원숭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원숭이가 다시 여래에게 말했다. “아직 내 솜씨를 다 보여준 게 아니야.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이번엔 우주 끝까지라도 날아가 보이지.” 여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얼마든지 더 해 보려무나, 원숭이야.” 원숭이는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다시 구름을 불러 올라탔다. 붉게 달아오른 구름은 이전의 세 배나 되는 속도로 맹렬하게 날았다.

여래는 한 번 더 가운데 손가락의 글씨를 보여주고 손을 씻었다. 원숭이가 다시 여래에게 말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여래가 대답했다. “몇 번이라도 상관없단다. 하지만 네가 알아두어야 할게 몇 가지 있구나. 첫째로, 너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아무리 노력해도 빛보다 더 빨리 날 수는 없단다. 그리고 빛이 날아가는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너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점점 더 두께가 얇아진단다.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정반대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원숭이는 다시 콧방귀를 뀌고 구름을 불러 올라탔다.

실제로 원숭이가 광속에 근접하면서 진행 방향을 축으로 길이가 수축하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여래는 종이처럼 얇아지고 태산처럼 무거워진, 멈춘 시간 속에 얼어붙은 원숭이를 집어 다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원숭이는 전혀 기가 꺾이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뭘 말이냐, 원숭이야?” “내가 손가락 끝에 다가갈 때마다 손가락들은 점점 더 멀어지는데, 내가 다가가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다. 분명히 마지막에는 내가 빛의 속도를 따라잡았으니, 그렇다면 당신의 손가락들은 당신의 말과는 다르게 빛의 속도를 넘어선다는 말이냐? 아니면 희랍인들의 역설? 그런 게 정말 가능해?”

여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힘의 관계에 대한 법칙은 여래로서도 간섭하거나 관여할 수 없는 이 세상의 가장 절대적인 원칙이란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무게와 힘을, 힘과 물질과 존재와 비존재를 분별하는 무명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나, 시간과 공간과 무게와 힘과 물질과 입자와 파동을 분별하지 않는 반야의 눈에는 삼라만상 이 다르게 보인단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한 여래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모여 낱낱이 뗄 수 없으나 한쪽을 잡아당기면 다른 쪽이 따라오는 매듭이 된단다. 시간을 줄이면 공간이 늘어나고 힘을 키우면 무게가 줄어들고 입자를 뒤집으면 파동이 생겨난다. 그 이치를 아직도 모르겠느냐?”

원숭이는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볼과 턱을 곰곰이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손톱 끝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잠시 쳐다보다 다른 손가락으로 튕겼다. 시간과 공간이 이어져 있다고? 물질과 무게, 힘과 출렁임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선승들이 즐겨 읊는 개소리의 최신판인가? 그렇다면 움직이는 것이 안 움직이는 것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높은 것이 낮은 것이고 꽉 찬 것이 텅 빈 것인가?

싸구려 역설법. 세상에 부대껴 지친 중생들에게 잠시 위안을 주는 헛소리, 개소리, 씨발 개헛소리. 역설법은 아무런 진리도 담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얕기 때문에 깊어 보이고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언가 있어 보인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 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말장난. 세 치 혀를 놀려 하는 무의미한 말장난일 뿐이다. 먹고 살기 위해 공허한 말장난을 하는 혓바닥에 저주 있으라. 그런데, 그런데 여래가 말장난을?

또다시 희랍인들의 말장난 : 여래가 여래는 없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참인가, 거짓인가. 여래는 말장난을 하지 않는다. 말장난을 하는 여래는 여래인가 여래가 아닌가. 내가 보기에 여래가 아닌 이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여래라고 하면 그는 여래인가, 여래가 아닌가. 내가 보기에 남들이 모두 미쳤으면 미친 것은 세상인가, 나인가. 내가 미친 건가? 아니면 세상이 미친 걸까?



미친 것은 원숭이인가 우주인가? 어떠한 발화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무엇이 말장난이고 무엇이 말장난이 아닌가.

모든 것이 모두 말장난인가? 세상과 원숭이와 여래가 모두 미친 것인가? 모든 것이 다만 무의미할 뿐인가? 우주 전체가 아무것도 아
닐 뿐일까?

그렇지 않아! 라고 외치는 순간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여래의 말이나 손바닥 따위도, 아무것도 아니다. 구름도, 둔갑술도 도술도 술법도 불법도 법설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이나 아무것이라고 이름붙이는 언어 그 자체가 공허한 말장난일 따름이다. 세계의 실상은 언어 너머에 있다. 언어의 어리석음에 물든 중생들은 이름 없는 곳에 이름 없이 존재하는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 참과 거짓, 의미와 무의미, 존재와 무, 빛과 입자, 시간과 공간, 여래와 중생… 모두 다만 헛된 이름일 뿐, 이름을 넘어선 곳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결코 이름 붙일 수 없는 모습으로 세계 그 자체를 이루고 있다. 원숭이는 몸을 떨며 눈을 깜빡였다. 세계가 열리고 세계가 닫혔다.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래는 여전히 미소 지은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원숭이도 씩 웃었다. 이번엔 제대로 한 번 날아 보여드리지. 원숭이가 날았다.

원숭이는 날지 않았다. 원숭이는 움직였다. 원숭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원숭이는 빛이 되었다. 원숭이는 빛의 속도를 넘어섰다. 원숭이는 빛의 속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원숭이는 원숭이였다. 원숭이는 원숭이가 아니었다. 원숭이가 아닌 원숭이가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여서 빛의 속도를 넘어서지 못하며 넘어섰다.

원숭이가 있었다. 원숭이는 없었다.

여래가 있었다. 여래는 없었다.

원숭이가 있었던 세계도 있었고 원숭이가 없었던 세계도 있었다. 원숭이가 빛의 속도를 넘어서 여래의 손바닥을 넘어선 세계가 있었고 원숭이가 빛의 속도를 넘어서지 못해서 여래의 손바닥에 갇힌 세계가 있었다. 원숭이가 움직인 세계가 있었고 원숭이가 움직이지 않은 세계가 있었다.

우주는 수없이 많았다.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도 우주의 수만큼 수없이 많았다. 원숭이는 그 모든 우주 속에서 날았다. 수많은 원숭이가 수많은 우주 속에서 날았다.

여래가 있는 우주가 있었다. 모든 생명이 여래인 우주도 있었다. 여래가 없는 우주도 있었다. 물리 법칙이, 뇌 안의 물리 화학 전자적 양상을 지배하는 물리 법칙이 해탈을 막는 우주가 있었다. 그렇지 않은 우주도 있었다.

원숭이가 여래의 손바닥을 벗어나는 우주가 있었다. 원숭이가 여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주가 있었다.

시간이 동그라미를 그리는 우주가 있었다. 시간이 직선을 그리는 우주가 있었다. 공간이 열린 우주가 있었다. 공간이 닫힌 우주가 있었다.

원숭이가 있는 우주가 있었다. 원숭이가 없는 우주가 있었다. 여래가 있는 우주가 있었다. 여래가 없는 우주가 있었다.

원숭이가 그 모든 우주들에 있었다. 원숭이가 그 모든 우주들에 없었다. 그 모든 우주들을 바라보는 여래가 있었다. 그 모든 우주들을 바라보는 여래가 없었다.

우주가 있었다.

우주가 없었다.

시작이 있었다.

끝이 있었다.

시작이 없었다.

끝이 없었다.

원숭이가 여래였다. 여래가 원숭이였다. 여래가 그 모든 것을 바로 보았다. 원숭이가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여래가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원숭이가 그 모든 것을 바로 보았다.

원숭이가 날지 못했다.

원숭이가 날았다.

원숭이가 마지막으로 날았다.

2013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박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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