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부터 안경 코받침이 콧등을 심하게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공룡발자국처럼 선명한 자국이 콧등에 새겨졌다.
‘안경사우르스 이놈!’
머리가 지끈거려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3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내고 지상으로 내려가 시력교정 수술을 받기로 했다.
“잘 생각했어. 잘 생각했는데, 한 이틀 눈 감고 지내야 될걸. 누구 돌봐줄 사람 있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없었다. 돌봐줄 사람 따위.
“그럼 여기서 수술할 거야? 이쪽 병원에서 하면 좀 아프다던데. 마취약물 반입규정이 어쩌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한 사람이 생각났다. 꼭 아픈 게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석 달 전에 지상으로 직장을 옮긴, 지표면에 사는 내 유일한 친구. 나는 윤희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 시간쯤 뒤에 짧은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우리 아직 사귀는 사이였어? 두 달 동안 한 번도 연락을 안 했는데. 당연한 듯이 말하네.”
나는 최대한 뻔뻔스럽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돌봐주는 거라고는 하지만 하루 종일 붙어서 병수발을 해달라는 건 아니고, 대부분 시간은 그냥 혼자 보낼 테니 혹시 뭔가 크게 잘못된 건 아닌지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만 들여다봐 달라는, 다소 비굴하게 들리는 부탁과 함께였다.
“뻔뻔한 건 여전하구나. 알았어. 좋을 대로 해. 그런데 내가 좀 바빠. 집에 안 있을 거고, 일 때문에 다른 데 가 있을 거야. 그쪽으로 와. 어차피 위장(僞裝)도 좀 해야 되니까 너라도 붙어 있으면 자연스럽겠다. 아, 근데 너도 감시당할지도 몰라, 여기 있으면. 괜찮겠어?”
윤희나는 또 뭔가 첩보 일을 하는 게 분명했다. 조금은 수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더 자세한 건 묻지 않았다. 어차피 신세를 져야할 처지여서 그런 걸 물을 만한 입장도 아니었다.
보름 후, 나는 윤희나가 머물고 있는 나라로 가서 수술을 마쳤다. 눈을 뽑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병원 직원들의 손에 이끌려 눈을 가린 채로 택시에 탔다. 그리고 윤희나가 일러준 주소를 적은 쪽지를 내민 다음, 다시 택시 기사의 도움을 받아 어느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는 커다란 여행가방 손잡이를 불안하게 움켜쥔 채 가려진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한참 뒤에야 누군가 다가와 뒤통수를 탁치더니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이, 안경한테도 밟히는 바보!”
좋은 냄새가 나는 집이었다. 나는 윤희나를 따라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이 좁고 통로가 길어 혼자 나갔다가는 다시 찾아가기 힘들 것 같은 길이었다. 희나는 구조를 알 수 없는 방에 나를 데려다 놓더니 분주하게 방 안을 돌아다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어지럽게 널려 있던 것들을 치우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에 희나가 내 손을 잡고 방 안 구석구석을 직접 안내했다.
“이쪽이 창문이야. 바깥쪽으로 밀어서 여는 거니까 뭐 안 떨어뜨리게 조심해. 냉장고는 여기. 손잡이 만졌지? TV는 됐고, 라디오가 있는데 어차피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치워 버렸어. 괜히 떨어뜨리면 다치니까. 그리고 이쪽이 옷장인데 문 열 때 이 테이블에 부딪힐수 있으니까 살살 열어. 침대가 여기에서부터 이렇게 놓여 있고, 이불은 옷장 아래 칸에 더 있으니까 추우면 꺼내서 덮어. 베개도 거기 더 있어. 휴지통은 여기. 지금 왼발 옆에. 좋아. 화장실은 이쪽. 휴지는 여기에. 뭐 별거 없어. 만져보면 알 거야.”
나는 윤희나의 목소리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안도감은 잠시 후에 윤희나가 집을 나가버리고 나서 보다 명확해졌다. 양팔을 뻗어 집안 여기저기를 천천히 탐험하다가 그 암흑 속에서 화분이나 소화기 같은 윤희나가 설명해주지 않은 물건들을 만날 때면 괜히 그 물건이 희나가 안내해준 것들보다 몇 배는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헤어진 거지? 아니지, 헤어진 게 아니었지 참. 공식적으로는.’
침대를 찾아 몸을 누이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곧바로 잠이 들었다.
빗소리에 다시 잠에서 깨어 보니 몇 시쯤 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배 위에 두 손을 올린 자세로 얌전히 누워 밖에서 나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혹시 기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바닷가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생긴 지 한 100년 정도밖에 안 되는 작고 아담한 신도시. 원래 아무것도 없던 땅 위에 항구가 생기고 철도가 생겼다. 곡물이나 양모 같은 걸 실어 나르기 위해서였다. 항구 앞에는 작은 마을이 생겼는데, 가로망이 전부 바둑판 형태였다. 집들은 높아 봐야 이삼 층밖에 안 됐지만 그런 집이며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도로만은 마치 뉴욕 한복판처럼 쭉쭉 뻗은 모양이었던 것이다. 마을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시야를 가릴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 곳. 윤희나가 머무는 곳은 그 마을로부터 걸어서 20분쯤 거리에 있는 철길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항구에서부터 이어진 그 철길은, 윤희나의 거처를 지나 어떤 이상한 공장시설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
“철길이 건물에 이렇게 바짝 붙어 있어도 되는 거야? 기차 지나갈 때는 거의 벽에 닿겠는데.” 사흘 전에 내가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희나가 말했다.
“원래 무슨 무기 부품 공장이 있던 덴데 식민지에서 독립하면서 폐쇄됐었거든. 그러면서 철길도 안 쓰는 길이 됐고. 그 틈에 집들이 쭉 늘어선 거지. 도시가 커졌으니까. 그런데 요 얼마 전에 군부쿠데타 나고 나서 공장이 다시 가동이 됐어. 그러다 보니 기차가 다시 다녀. 자재도 들어가고 제품도 나오고 하는데, 거의 산책하는 속도만큼 천천히 다녀. 방송 나오면 사람들이 철길에 늘어놓은 물건들 치우느라 난린데, 이 집은 상관없지만 그래도 창문은 닫아주면 좋겠지.”
눈이 보이지 않으니 시간의 결도 볼 수가 없었다. 시곗바늘도, 자연이 드리우는 시간의 눈금도, 전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다시 희나와 관련된 일들을 떠올렸다.
희나는 무언가를 감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철길과 관련된 일일 것 같았다. 그런 수상한 일들을 감시하는 지상의 국제기구. 희나가 이쪽으로 직장을 완전히 옮기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하지만 꼭 그게 우리 두 사람이 멀어진 원인은 아니었다. 사실 별다른 계기는 없었다. 그냥 서로 바쁘고 별 이유 없이 시들해졌을 뿐. 거의 낙엽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니면 늘 손쉽게 눈으로 접할 수 있는 상투적이고 일상적인 정보에 현혹돼서 서로의 진짜 존재가치를 서서히 잊게 되었거나.’
눈을 가린 채로 희나와 재회한 순간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윤희나의 존재감. 존재감으로 가득한 그 사람의 손길.
빗소리가 안 그래도 혼란스러워진 시간감각을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주로 소리에 의존해 그 낯선 도시의 구석구석을 최대한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내 의식은, 희미해진 시간의 눈금과 함께 스르르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잠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철길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기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천천히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굴러가는 바퀴가 철길을 더듬는 소리. 헷갈리지 않게 딱 한 길로만 뻗어 있는 철길을 따라 눈먼 기차가 천천히 밤길을 더듬는 소리. 밤공기가 놀라서 밀려나는 소리. 그리고 여전히 들려오는 빗소리. 문득 그 소리가 밤비 소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한걸. 안내방송 같은 건 안 나왔던 것 같은데. 밤에는 따로 방송이 없어도 알아서 철길을 치워놓게 돼 있나. 그보다 왜 한밤중에 기차를 움직이는 거야, 수상하게?’
그리고 그때였다. 군데군데 사진으로 보기는 했어도 정확한 모양을 알 수 없는 철길마을 어디선가, 무언가 의미를 가진 것이 내귀로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천 위에 바늘 끝처럼 뾰족하게 머리를 들이민 날카로운 의미. 아직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불이나 베개가 바스락거리지 않도록 가구처럼 가만히 몸을 정지시켰다. 그래도 피는 돌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침이 꼴딱 넘어가는 소리가 폭풍처럼 요란하게 들렸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기차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창문 바로 옆을 지나는 기차.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의미도 삐져나오지 않았다. 참선하듯 정신을 집중했다. 왜 그렇게 집중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기차가 막 골목을 빠져나가려던 찰나, 다시 한 번 그 소리가 내 귀에 와서 닿았다. 온 골목을 뒤흔드는 메아리 같은 의미. 마치 마을 전체에 깔려 있듯 예민하게 밝아져 있던 내 귀에,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그 소리가 전해졌다.
‘MK-13.’
아침이 되자, 어디서든 아침이면 들리곤 하는 소리들이 골목을 채웠다. 알람시계 소리, 자전거 소리, 철길에 보폭을 맞추느라 다소 어색해진 누군가의 발소리, 어느 집 부엌에서 아침식사 준비하는 소리. 희나는 아침이 됐는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단축키로 희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바빠. 냉장고에서 알아서 챙겨 먹어.”
피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밤에 들은 소리에 관해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알람시계 대신 한 시간에 한 번씩 문자 메시지나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냉장고를 뒤져 모양과 색깔을 알 수 없는 것들을 이것저것 꺼내 먹은 다음, 미지의 색채를 집어삼킨 내 배를 상상하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희나가 먹다 남은 사과 쟁반에 과도가 같이 놓여 있었던 게 생각이 났다. ‘위험하게 그게 무슨 짓이람. 나중에 희나가 집에 오면 제대로 따져야지.’
또 얼마가 지났을까. 윤희나가 보낸 메시지 알림 소리에 잠을 깨고 보니,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는 한 그 소리를 듣는다 해도 몇분인지는 알 수 있어도 몇 시인지는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어젯밤에 들은 소리를 떠올렸다. 그 소리는 분명 로봇용 관절인 MK-13이 회전운동을 할 때 나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역시 이야기를 해주는 게 나으려나. 하지만 바쁜 것 같던데. 그런데 그 바쁜 일이라는 것도 결국 그거 때문에 생긴 일 아닌가.’
점심 무렵에 마침 윤희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자 나는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 희나가 물었다.
“로봇 관절 소리인 건 어떻게 알아?”
나는 그게 내 직업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물론 그건 윤희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3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낼 만큼 일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내 직업은 기계에 소리를 입히는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공학자들이 따뜻하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기계를 찾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과 똑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반대의 해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이랬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기계적인 소리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소리가 될 수 있다는 것. 특히 정밀기계일수록. 언젠가 윤희나에게 그런 설명을 했던 기억이 났다.
“사람들은 원래 정밀기계를 좋아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요즘 기계에서는 그 소리가 안 난다는 거야.”
“왜?”
“디지털이거든. 기계식이 아니라. 디지털은 회로잖아. 게다가 그 회로라는 것도 현미경으로 봐야 보일 만큼 작고. 뭔가가 드르륵거리거나 철커덕거리지를 않는다는 거야. 분해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니깐. 기계식 카세트랑 디지털 음원 재생장치랑 뭐가 더 정밀하겠어? 디지털이잖아. 그런데 기계식 카세트 마지막 세대는 정말 최첨단의 느낌이 났거든. 별거 아닌 플레이 버튼만 눌러도 끼리릭끼리릭 샥샥샥 하는 끝내주는 소리가 났으니까. 그 소리를 녹음해서 트는 게 내 일이야. 너 그거 알지? 현금지급기에서 지폐를 달랑 석 장만 뽑아도 한 서른 장쯤 세는 소리가 나는 거. 그거 다 녹음된 소리라니까. ‘아, 얘가 돈을 세고 있구나’ 착각하게 만드는 소리라는 거지.”
희나 역시 그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진지해진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확실해? 그 MK-13이라는 거?”
“그럼.”
“그게 정확히 뭐하는 건데?”
“군용이족보행로봇 어깨 관절. 어깨에 지대공미사일 발사 장치를 놓고 쏴도 진동 없이 잘 견딜 만큼 견고하고, 유연하기로 따지면 펜싱 칼도 올림픽 선수만큼이나 정교하게 다룰 수 있는, 양쪽 방향 모두에서 쓸데없이 성능 좋은 관절. 뭐 사실 낭비지.”
“그게 기차에 실려 있었다고? 확실해?”
“확실해. 관절 자체보다 소리가 유명한 부품이거든. 우리 업계의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나 할까. 소리가 완전 절도 있어. 그냥 딱 듣기만 해도 그런 느낌이 와. ‘나 지금 움직이고 있어요, 나 정밀기계예요. 나 완전 명품 군용관절이거든요’ 하는 느낌. 한마디로 돈 들인 보람이 확 느껴지게 만드는 직관적인 사운드에, 아무리 문외한이라도 소리만 딱 들으면 관절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저절로 머릿속에서 떠오르게 만드는 …….”
“알았어. 끊을게.”
소리의 온기가 사라져버린 전화기를 귀에서 내려놓으며 나는 우리가 왜 서서히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갑작스러운 침묵이 무안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나 물어볼 걸 그랬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한참 뒤에 다시 희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 그 소리 들은 게 몇 시쯤이야?”
“나야 모르지.”
“하긴. 됐고, 어느 방향이었어?”
“공장에서 항구 쪽.”
“그렇군. 알았어.”
“저기…….”
나는 다급하게 소리를 밀어 넣어, 전화를 끊으려는 희나를 붙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니가 감시하는 거, 퇴론 언덕이야?”
“응? 응……. 아니, 그게 아니고, 아무튼 전화로 길게 이야기하면 위험해. 잘 쉬고, 나중에 봐.”
눈이 회복되면 맨 처음 보려고 했던 곳. 퇴론 언덕은 어느 오래된 왕족의 성이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수백 년 전부터 그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온, 지금은 소수민족이 되어버린 왕실 직영지 거주민들. 꼭대기에 있는 고풍스러운 성 아래로 색색이 아름다운 곡선 모양의 성벽이 민가 전체를 감싸고 있는 특이한 요새 마을. 그리고 지금 그곳은 인종청소의 위협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윤희나가 속한 국제기구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 나라 정부가 그곳을 공격하려는 게 아닌지 감시를 하고 있는 중인 모양이었다.
‘가파른 언덕이랬지? 큰 도로가 없고 골목이 좁은 데다, 그나마 있는 길들도 다 고만고만한 계단들이 퍼즐처럼 복잡하게 이어져서 만들어진 길이라, 바퀴 달린 전차는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그럼 결국 두 발로 걷는 로봇 말고는…….’
단숨에 성벽을 뚫어낼 만큼 충분한 화력을 지닌 중화기를 효과적으로 침투시킬 방법이 별로 없었다.
‘이미 완제품이 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건데. 안 좋을 때 왔잖아. 하필 이럴 때.’
다시 지루한 시간이었다. 기차가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면서 동네가 한동안 소란스러웠던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심심한 오후였다. 하루 종일 누워서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인적이 없을 때는 복도로 나가서 10분 정도씩 걷다가 들어오기도 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조금씩 익숙해지는 복도. 그 고풍스러운 폭과 거리.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익숙해지자 시간의 눈금도 그만큼 선명해져 갔다. 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어쨌거나 나는 휴가 중이었고 쓸 수 있는 시간이 한없이 많았다.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시간. 나는 창문 앞을 지나갈 기차를 기다리는 일에 그 긴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리고 마침내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아주 가까웠다. 거의 창문 바로 앞이었다. 그리고 기차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소리로 이루어진 내 세계에서는 기차 하나가 갑자기 통째로 모습을 감춘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지?’ 나는 정체를 들켜버린 첩보원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달랬다. 항구 쪽으로도 공장 쪽으로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열차.
그 순간 갑자기 그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밤에 들은 것만큼 날카로운 의미를 지닌 소리. 내 귀에는 너무나 익숙한 또 하나의 기계음. 그것은 두 발로 걷는 로봇의 허리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너무 가깝잖아!’
거의 창문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면서 내는 소리라고 해도 좋을만큼 가까이에서 나는 소리였다. 들으라는 듯 일부러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나는 그 소리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알 것 같았다. 크로나크! 지구상에 알려진 이족보행로봇 중 가장 위험한 무기. 사람이 타지 않고 원격조종조차 필요없이 인간 병사가 받는 것과 유사한 구두명령만으로 스스로 완전히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국제협약에 의해 이미 반쯤은 생산과 배치가 금지된 비인간적인 무기. 똑같은 외형을 하고 있어도, 반드시 사람이 타게 돼 있는 기계는 인간의 신체활동을 돕는 강화복으로 분류돼서 불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립된 신경망을 갖춘 ‘로봇’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불법이었다.
‘인종청소야. 저들은 그 폭력을 통제조차 안 할 생각이야. 저 야수를 풀어놓은 다음 그냥 아무렇게나 내버려둘 심산이겠지.’
희나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기차가 골목을 빠져나가기를 기다린 다음, 전화기를 향해 팔을 뻗었다. 전날부터 내내 전화기를 두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런데 전화기가 없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손에 걸리는 게 없었다. ‘화장실에 뒀던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침대를 더듬으며 어정쩡한 자세로 화장실 쪽으로 갔다.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그때 의미 하나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낯선 의미.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세한 바람이었다. 딱 사람 얼굴 높이에서 불어오는 약한 바람.
‘집안에 누가 들어와 있어.’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감시당할지도 모른다던 희나의 말. 희나는 내가 퇴론 언덕 이야기를 꺼내자 전화로 오가기에는 위험한 말이라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방금 기차가 멈춰선 일. 바로 그 방 창문 앞에서 들으라는 듯 일부러 소리를 노출한 무시무시한 이족보행 로봇. 첫 번째는 우연히 들킨 거였겠지만 두 번째는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 나를 보러 온 것이었다.
‘희나일까? 아니야. 키가 너무 커. 이건 남자가 틀림없어.’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조금 전에 느꼈던 인기척을 확인했다. 기차가 한순간 사라졌듯, 다시 암흑 저편으로 모습을 감춰버린 사람의 흔적.
‘복도를 산책하느라 문을 열었을 때 숨어들어온 걸 거야. 아까 내가 희나한테 한 말을 도청하고는 내가 그 소리를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일부러 창문 바로 앞에서 크로나크를 노출한거야. 그리고 전화기를 감췄겠지. 내가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다른 인기척을 전혀 흘리지 않았으니까.
‘전화기 쪽으로 손을 뻗은 순간 그 소리를 알아들었다는 자백을 해 버린 거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실종되고 마는 건가? 이 나라의 다른 반체제 인사들처럼. 그렇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당하는 거야.’
냉장고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먹다 남은 사과 쟁반을 손으로 더듬었다. 다행히 사과 깎는 칼이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차가워진 채로. 그 칼을 왼손에 감춰 쥔 다음 문을 닫고 다시 침대로 향했다. 긴장되는 순간.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웅 하고 울렸다. 그 소리에 잠깐 긴장이 풀렸는지 침입자가 아주 짧은 순간 인기척을 냈다. 암흑 속에서 촛불이 밝혀지듯 사라졌던 존재가 다시 나의 차원으로 들어왔다. 아까와 거의 똑같은 위치였다.
‘지금이야!’
생각과 동시에 나는 그쪽을 향해 오른쪽 팔을 내뻗었다.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가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이면서 감춰져 있던 몸의 소리가 방 안 가득 풀려 나왔다.
‘걸려들었어!’
그는 아마도 훈련받은 군인일 것이다. 군인이든 아니면 경찰이든, 아무튼 내 공격쯤은 쉽게 받아넘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내 오른손 공격을 받아내는 것. 하지만 그건 함정이었다. 나는 비록 훈련받은 싸움꾼이 아니었지만, 단 한 가지 동작만은 익혀서 알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현혹시키고 왼손으로 치명타를 가하는 동작.
내 왼손에 들린 칼이 그의 몸통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한 가지를 떠올렸다. ‘부디 혼자이기를. 제발 침입자가 두 사람이 아니기를. 아, 멍청이!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기저기 부딪혀 가며,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은 계단을 지나 비 내리는 철길 위에 맨발로 섰다. 어둡고 차가운 밤. 가로등 불이 머리 위에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진짜 어둠 속에 있는 건 나뿐이라는 사실을. 침입자들은, 내 적들은, 내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철길을 따라 밤길을 달려갔다. 맨발바닥을 통해 철길의 차가운 감촉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한 방향으로 쭉 뻗어 있는 길. 휘어져있더라도, 눈먼 기차도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져 있을 철길. 빠른 걸음으로 그 길을 따라갔다. 손으로 짚어 가며 천천히 기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두 발로 걷는 이족보행 제보자였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를 발견하고는 내 쪽으로 달려오는 소리. 절망적이었다. 내 손에는 이제 무기가 없었다. 억울했다. 그대로 실종돼 버릴 수는 없었다.
‘안 돼! 이건 너무 하잖아. 나는 지난 이틀 동안 눈도 한 번 못 뜨고 지냈다고!’
발소리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두 명, 아니 세 명이었다. 도저히 따돌릴 수 없는 속도였다. 하긴 나는 어디로 달아나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철길에 발이 걸려 그 자리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발소리가 내 위를 덮쳤다. 어깨에 닿는 손의 감촉.
“괜찮아?”
존재감으로 가득한 손길. 그리고 그 목소리. 희나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윤희나의 목소리였다. “전화기 계속 꺼져 있어서 달려왔더니 이게 무슨 일이야? 이 피는 또 뭐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나는 이미 바닥에 완전히 드러누운 상태였다.
“아, 그냥 위에서 편안하게 수술 받을걸. 죽는 줄 알았네, 진짜.”
다음날 나는 계획대로 무사히 눈을 떴다. 세상이 엄청 밝아 보일 줄 알았는데, 안경을 썼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실망한 내색은 할 수가 없었다. 희나 때문이었다.
“…… 네 말 덕분에 평화유지군 감시단이 움직였거든. 헬기를 타고 곧장 퇴론 언덕으로 날아간 거지. 세 명밖에 안 됐지만 그걸로 충분했어. 불법무기 배치현장을 딱 잡은 거니까. 몇 시간 뒤에 외신기자들이 달려왔을 때는 취재할 것도 별로 안 남아 있었대. 그거 뭐랬지? 크로나크? 그거 진짜 위험한 거라며? 어떻게 진짜로 소리만 딱 듣고 아냐. 나는 그거 허풍인 줄 알았는데. 아무튼…….”
희나가 쉬지도 않고 말들을 쏟아냈다. 나는 끼어들 틈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나 한 명만 말하면 되지 뭐.’
내가 찌른 침입자는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사과깎는 칼이었으니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가 사과가 아닌 한. 아무튼 나는 그를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서 몇 년이고 지상에는 발을 디디지 않을 생각이니까. 하지만 아직은 휴가가 남아 있었다. 3년 치 다 해서 두 달이나 남아 있었다.
‘다시 위로 돌아갈 수는 없고, 누군가한테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은데, 아, 그냥 여행이나 다닐까. 아니야, 됐어. 그런 걸 뭐 하러 해. 쓸데없이.’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희나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응?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어? 어.”
“내 말 어떻게 생각해? 한 달만 우리 집에 있다가 가라.”
“한 달? 니네 집에?”
나는 희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나는 대답 대신 콧등을 매만졌다. 안경 코받침에 눌린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안경사우르스 이놈! 이게 다 네놈이 꾸민 짓이었구나.’
공룡발자국처럼 선명한 그 흔적을 매만지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