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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뭐가……될까?



저는 ‘고’ 씨입니다. 딱히 불만은 없지만, 전부터 고민은 하나 있었지요.
나중에 자식에게 지어줄 이름입니다. 제가 고 씨긴 하지만 예쁜 이름을 붙이기 까다로운 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쨌거나 예쁘고 좋은 이름을 붙여 주고 싶은 마음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일 테니, 아이를 가질 무렵에는 아마 다들 고민에 빠질 겁니다.

그래서인지 작명소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작명소가 그저 괜찮은 뜻의 한자를 가지고 이름을 지어주는 곳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요즘 보니 그게 아닌가 봅니다. 이름을 짓는 데도 과학을 들먹이는 겁니다. 이해는 갑니다. ‘과학’은 어디다 갖다 붙여도 뭔가 있어 보이는 마법의 단어 아닙니까. 그래서 소위 ‘성명학’이라는 것도 이제는 과학이라고 주장하나 봅니다.



좋은 이름은 좋은 운명이 따른다?

아무리 제가 까칠하다고 해도 뜻이 좋은 이름을 짓겠다는 데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커서 좋은 사람이 되라는 소망의 발현인 거지요. 그렇다면 사람의 이름이 정말로 삶에 영향을 끼칠까요? 옳은 면도 그른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운명이 항상 이름을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이름대로 살았다면 저도 지금은 기자가 아니라 높고 넓은 벼슬을 하며 살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름을 잘못 지으면 놀림을 당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자신감을 잃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름이 예쁘거나 멋있다는 칭찬을 들으면 어깨가 으쓱해질 수 있는 일이지요. 이런 면에서 보자면 이름이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봤자 이름 하나 때문에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심각한 불행에 처하는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요즘에는 개명도 어렵지 않으니 이름 때문에 큰 불편을 겪는다면 바꾸면 됩니다.

문제는 몇몇 작명소에서 근거로 내세우는 주장입니다. 사주니 음양오행이니 하는 건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문제 삼고 싶은 건 현대과학으로 성명학을 뒷받침하는 부분입니다. 이들은 파동성명학이나 인체반응성명학 같은 알 수 없는 명칭을 쓰고 있습니다. 한 작명소 홈페이지에 가서 파동성명학이란 게 무엇인지 알아봤습니다. 이름을 부를 때 그 음파가 듣는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하더군요. 좋은 이름은 그 음파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만들기 때문에 가정화목이나 출세, 승진 같은 좋은 운명이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굳이 작명소에 가서 이름을 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스스로 듣기 좋은 이름을 정해도 상관없겠네요.

‘고호’는 상승하는 주파수?
물론 작명소에서 그렇게 말할 리가 없지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돈을 내고 이름을 짓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을까 싶어 인체반응성명학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한 작명소에 전화를 걸어 상담해 봤습니다. 무슨 원리냐고 묻자 “소리가 청각신경을 따라 들어가면서 인체가 반응하게 된다”며 “이름이 호르몬과 같은 역할을 해 생리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호르몬 부분은 갸우뚱하지만 일단 그럴듯하게 설명은 합니다.

제 이름을 알려주자 “‘고호’는 상승하는 주파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이름을 자주 부르는 사람은 혈압이 높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럴 수가! 신기하게도 저희 어머니가 고혈압이시거든요! 정말 대단할…, 리가 없지요. 저희 어머니는 저를 이름으로 부르는 횟수가 많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 연세에 고혈압이 아닌 경우 가 오히려 드물지요.

상승하는 주파수란 게 뭔지 궁금해서 직접 방문하면 이름을 부를 때의 음파 주파수를 측정해 주냐고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기계로 측정하는 건 아니고 주파수가 다 정해져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모든 발음에 대한 주파수를 다 측정해 놓은 자료라도 갖고 있나 싶었는데, 여기서부터 슬슬 설명이 이상해졌습니다. ‘고’ 자는 토(土) 기운의 주파수를, ‘호’ 자는 불 기운의 주파수를, ‘관’ 자는 복모음이라 아주 강한 물 기운의 주파수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주파수는 보통 숫자에 헤르츠(Hz) 단위를 붙여 나타내는데, 어느새 주파수의 정의가 달라진 걸까요?

과학적? 포장일 뿐!
결국에는 음양오행과 같은, 과학이 아닌 분야로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생리학적인 반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체질에 맞는 이름을 지어야 한다기에 그럼 체질은 어떻게 진단하냐고 물었더니 사주를 가지고 알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주파수’니 ‘생리학’이니 하는 용어는 그저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한 껍데기였을 뿐이지요. 가짜라고 해도 겉으로는 정교하게 보이는 이론체계를 만드는 성의 정도는 보였으리라고 기대한 저는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한번 지으면 보통 평생 따라가는 이름이 매우 중요한 건 맞습니다. 작명소에서 이름을 짓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니고요. 하지만 저라면 저렇게 비과학적인 원리에 따라 지은 이름에 과도한 기대를 걸지는 않겠습니다. 과학적인 원리라면 보편적이어야 하지 않나요? 성명학이 과학이면 영어 이름이나 스와힐리어 이름도 분석이 가능해야죠. 생각해 보세요. 똑같은 이름을 서로 다른 외국인이 제 나름의 발음으로 부를 일도 많을 텐데, 어떤 외국 발음이냐에 따라 사람의 운명도 바뀔까요?

2013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고호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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