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짝사랑하는 그 아이는 이상형이 ‘키 큰 남자’랜다. 그런데 내 키는 반올림해 170cm.
백설공주를 짝사랑만 했던 난쟁이가 바로 내 처지다. 틈만 나면 농구를 하고 밤 10시면 침대로 달려가지만 내 성장판은 대답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키는 유전의 영향이 가장 크다는데….
이번 생에 나라를 구해 다음 생에 키 큰 부모를 만나지 않는 한 남자의 로망 180cm는 희망이 없는 걸까.
2“요 며칠 제가 본의 아니게 키 박사가 됐습니다.”
김희발 서울대 농생명공학부 교수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최근 키에 대해 묻는 전화에 호되게 시달렸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3월 7일 해외 학술지(플로스 제네틱스)에 발표한 연구결과 때문이다. 키와 당뇨를 비롯해 유전에 좌우될 수 있는 49개의 특성을 선정한 뒤한국인 8000여 명의 DNA에서 30만 개를 비교한 대규모 연구였다.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연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 언론이 이번 연구를 키 부분만 집중 보도하면서 김 교수의 시련은 시작됐다.
진짜 연구결과는 이렇다. 개인의 여러 신체 특징은 한두 개 유전자로 결정되지 않는다. 예측을 위해선 유전자 전체를 분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아이의 키가 몇 cm까지 자랄지 예측하기 위해선 지금까지 키를 결정한다고 알려져 있던 수십~수백 개의 유전자뿐만 아니라 인간의 유전자 전체를 분석해야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키는 유전이 80, 환경이 20
과학자들이 이런 연구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예측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다. 예측모델이 정교해지면 영화 ‘가타카(1997)’처럼 어릴 적 한 번만 유전자 검사를 해도 키를 대략 예상하는 것은 물론 미래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
둘째는 유전자 치료나 개선을 위해서다. 만약 키와 체형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밝혀낼 수 있다면 너무 작은 키나 심각한 비만이 염려되는 아기에게 유전자 치료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연구 결과는 두 번째 이유로 SNP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쉽게 말해, ‘키 크는 유전자’가 따로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키는 유전 영향이 80%, 환경 영향이 20%다. 인간의 여러 신체적 특징 중 유전에 가장 크게 영향 받는다. 그런데 키를 결정하는 유전자는 하나를 콕 집어 ‘이거다’라고 말할 수 없다. 개와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개는 유전자 몇 개만 조작해도 덩치를 조작할 수 있다. 인간의 의도적인 교배로 개의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인간의 경우 키를 결정하는 후보로 알려진 180개의 유전자로도 유전 영향의 10%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나머지 70%의 영향력이 유전자의 어디서 나오는지가 그동안 오리무중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김 교수팀이 이번에 한국인 전체 유전자에서 키를 결정하는 30만 개의 염기서열을 새롭게 찾아내면서 유전영향의 80% 중 32%를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연구팀이 염기서열을 찾은 곳은 과연 어디일까.
김 교수는 키를 결정하는 염기서열이 “엑손 뿐만 아니라 인트론, 정크 DNA 위 어디든, DNA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고 말했다. DNA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중 하나가 실제로 단백질의 설계도를 담은 부분인 엑손이다. 다른 하나는 그동안 쓸모없는 부위로 알려졌던 인트론, 정크 DNA 등이다. 이전까지는 키 크는 유전자가 당연히 엑손에만 있을 줄 알았다. 김 교수팀은 키 유전자뿐 아니라 비만, 당뇨와 관련된 유전자도 DNA 전역에 퍼져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30만 개의 염기서열을 추가로 발견한 지금, 유전자를 분석하면 얼마나 정확하게 키를 예측할 수 있을까. 뜻밖에도 김 교수는 “인터넷에 떠도는 ‘내 아이 예상키 공식’보다도 부정확한 것이 현재 수준”이라고 말했다. 유전적 영향 중 32%의 영향을 설명할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베일에 쌓인 부분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환경만 조절하면 15cm 더 클 수 있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내 아이 예상키 공식’은 믿을 수 있을까.
“남아면 아버지 어머니 평균 키에 6.5cm를 더하고, 여아면 6.5를 빼시오.”
박광원 고려대 구로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위 식을 “성장 속도나 영양상태 등을 전혀 고려 하지 않은 신빙성이 없는 공식”이라 지적하며 “환경요인도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예상키를 구하는 간단한 식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키는 ‘유전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신체 특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김희발 교수는 “예상키를 165cm라고 가정할 때, 20%의 환경 요인이면 최대 15cm는 더 크거나 반대로 더 작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165cm에 15cm를 더하면 남자들의 꿈의 키 180cm가 된다. 환경요인만 잘 맞추면 180cm도 꿈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환경요인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먼저 성장판을 주목해보자. 성장판이란 뼈가 자라는 장소로 팔·다리·손가락·발가락 등 관절과 직접 연결된 긴 뼈 끝 부분에 있는 연골이다. X선 촬영을 하면 하나의 선처럼 보인다. 키가 크는 원리는 성장판이 자라면서 늘어난 부분이 단단한 골질로 바뀌면서 결과적으로 뼈가 길어지기 때문이다. 성장판은 성장기엔 활발하게 자라나다 사춘기가 돼 남성은 테스토스테론, 여성은 에스트로겐 호르몬을 분비하기 시작하면 점차 굳기 시작해 2년 후 완전히 단단해진다. 이를 흔히 “성장판이 닫혔다”라고 말한다. 성장판이 얼마나 자라날지는 우선 유전 영향이 크지만, 영양 상태와 성장 호르몬의 영향은 물론 적절한 물리적 자극에도 좌우된다. 키가 크기 위해서는 운동을 하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운동 시 발생하는 물리자극이 성장판의 수용체를 자극해 세포반응을 일으킨다. 박광원 교수는 “성장판을 특별히 더 자극한다고 의학적으로 증명된 운동은 없다”며 “본인이 좋아하는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운동이 중요한 이유는 물리적인 자극으로 성장판을 자극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운동을 하면 자연스레 신진대사에 필요한 에너지가 많아지고 산소섭취량이 늘어나는데, 이는 성장호르몬 분비를 촉진한다.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1.7~2배 많은 성장호르몬이 분비된다고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운동은 키의 적인 비만을 막는다. 비만은 뇌하수체에서 소마토스테틴이라는 성장호르몬 억제호르몬을 분비시키기 때문에 성장에 치명적이다.
성장호르몬은 성장판이 열려 있을 때만
성장호르몬은 성장판의 성장을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혹시 외부에서 성장호르몬을 투여하면 성장판 성장을 촉진해 더 키가 크진 않을까. 박광원 교수는 “강남 등 일부 지역에서 자녀의 키를 더 크게 할 목적으로 성장 호르몬 주사 투여가 이미 성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장호르몬 주사는 성장호르몬 결핍증이나 터너증후군, 프래더-윌리증후군 등의 질환에서 쓰이는 치료다. 남효경 고려대 구로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성장호르몬 결핍증 환자들이 이 주사를 맞으면 1년에 10cm도 자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원래 있어야 할 성장호르몬이 없어 키가 자라지 않던 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핍증이 없고 정상적으로 성장호르몬이 분비되는 아이들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남 교수는 “개인편차가 크지만 꾸준히 지속하면 평균 1년에 2~3cm 정도 더 크는 걸로 보인다”면서도, “단순히 키가 작은 경우에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어린 나이에 시작할수록 효과가 좋으며, 키가 걱정이 된다면 초등학교 저학년 이전에 검사를 받는 게 좋다”고 남 교수는 설명했다.
부작용은 없을까. 성장호르몬 주사는 성장판이 열려 있을 때만 키 크는 효과를 준다. 성장판이 이미 닫혔는데 성장호르몬 주사를 고집한다면 손, 발, 턱 등 인체의 말단 부위가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말단비대증’이 일어날 수 있다. 남 교수는 “흔하지 않지만 혈당이 올라가거나 갑상선기능이 떨어지고, 척추측만증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주기적인 혈액검사를 통해 혈당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을 경우 성장호르몬 투여를 중단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3000만 원이면 키 8cm 커진다
키로 인한 콤플렉스가 심각하고, 이미 성장판이 닫혀 성장호르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면 최후의 수단이 남아있다. 사지연장 수술은 단기간에 키를 키울 수 있는 가장 파격적인 방법이다. 구소련의 정형외과 의사 가브릴 일리자로프가 1951년 고안한 ‘일리자로프 수술법’이 현재 널리 쓰인다. 수술에 대한 거부감이나 고통, 수술 후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다면 키를 ‘확실하게’ 키울 수 있다.
수술 원리는 간단하다. 우선 종아리뼈를 자르고 틈새를 벌린다. 그 다음 ‘일리자로프 링’이라는 특수한 원통형 기구를 채운다. 일리자로프 링이 하는 역할은 2가지다. 첫 번째는 벌어진 뼈의 틈새를 계속해서 늘려주는 역할이다. 부러진 뼈는 틈새를 메우기 위해 자라나는데 그 틈새를 계속 늘려 뼈가 더 길게 자라게끔 한다. 이 때문에 키가 커진다. 뼈를 연장하는 동안 다리를 지탱해주는 역할 또한 이 의료기기의 몫이다. 오늘날엔 일리자로프 링 외에도 뼈의 중심부(골수강)에 금속 기둥(내고정기)을 넣어 환자가 좀 더 빨리 걷고, 링을 좀 더 일찍 제거할 수 있는 ‘속성 연장술’이 흔히 쓰인다. 금속 기둥은 수술로부터 1년 6개월 후 뼈가 완전히 단단해진 다음에 제거한다. 박광원 교수는 “모든 치료가 끝나면 뼈의 강도는 수술 전과 같으며 축구나 격투기 등 모든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본래 이 수술은 성장판을 다치거나 소아마비로 사지의 길이가 달라진 경우, O형 다리 등을 교정하기 위한 수술이었다. 그런데 큰 키를 선호하게 되면서 오늘날엔 성형 용도로도 쓰이게 됐다. 김경섭 선정형외과 원무부장은 “속성연장술을 받으려는 남녀 비율은 7:3으로 남자가 더 많다”며 “165~170cm 사이 남자들이 수술 후 만족도가 가장 높다”고 덧붙였다. 효과는 어떨까. 송해룡 고려대 구로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종아리뼈만 늘릴 경우 보통 7~8cm까지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수술비용은 3000만 원 정도가 든다.
뼈를 늘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늘리는 뼈의 길이에 비례한다. 박광원 교수는 “하루에 보통 1mm씩 늘리며, 1cm에 한 달 정도 걸린다”고 설명했다. 하루에 1mm씩 밖에 연장하지 못하는 까닭은 혈관과 신경, 근육도 함께 늘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뼈의 속도를 근육이 따라가지 못하면 ‘첨족(까치발) 변형’이 생길 수 있다.
가장 빈번한 부작용은 염증이다. 몸 바깥의 링이 피부를 관통하는 핀으로 고정되기 때문에 핀 주위는 물론 뼈에서도 염증이 생길 수 있다. 다리가 휘는 부작용도 주의가 필요하다. 다리 가운데 뼈를 중심으로 안과 밖, 앞과 뒤의 근육 양이 다르기 때문에 뼈가 형성되는 사이에 다리가 휠 수 있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환자일수록 잘 발생한다. 또 뼈를 늘리는 과정에서 피부가 조금씩 찢어지기 때문에 흉터가 남을 수 있다. 성형외과나 피부과에서 치료하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흔적을 지우기는 힘들다.
이 수술을 받으면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성장판이 닫히지 않은 아동·청소년에게는 금물이다. 비록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 끝났더라도 성장 때문에 체형 비율이 망가지면 다른 수술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수술로 늘린 종아리에 비해 허벅지가 지나치게 짧아져 허벅지도 연장수술을 해야 한다거나, 다리에 비해 팔이 짧아 팔도 함께 수술을 해야 하는 식이다.
수술 없이 키 크는 최후 비밀
본인이나 자녀가 또래 보다 키가 작아 고민이라면 성장호르몬 주사나 사지연장수술을 고려하기 전에 먼저 적정량의 수면을 취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자. 남효경 교수는 “7~8시간은 성장을 위해 꼭 숙면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야간자율학습 등으로 청소년의 취침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끝으로 과학동아에서 숨은 키를 찾는 비결 하나를 더 공개한다. 숙면을 취하는 동안 키가 부쩍부쩍 크고 싶다면 한 번 야식을 멀리해보자. 야식을 자제하는 건 성장의 적인 비만을 피하는 첫걸음이다. 또 성장호르몬은 혈당을 높이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배 부른 상태가 아닐 때 더 잘 분비된다. 단, 굶는 것으로 오해하진 말자! 골고루 잘 먹는 건 키가 크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