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종로의 명물을 꼽으라면? 물론 전통이 살아 숨쉬는 인사동이나 덕수궁도 대표적인 명소이지만, 가슴 한 복판이 뻥 뚫린 채 종로에 우뚝 서 있는 국세청 빌딩을 가리키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곳의 스카이라운지는 데이트 명소로, 전망 좋은 창가 자리에 앉으려면 예약을 해야 할 정도다.
혁신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이 건물을 바라보노라면 설계자의 상상력에 경탄하면서도 내심 기둥 세개에 얹혀 있는 거대한 가슴 윗 부분이 혹시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의 충격이 아직까지도 우리들의 가슴에 하나의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의 대외 이미지에도 치명타였던 이들 사건이후 국내 건설업계의 관행에 대한 반성과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국민 여론이 들끓었다. 그 결과 최근 들어 대형 건축물이나 구조물의 안정성을 예측, 평가하는 분야가 각광받고 있다.
다도해 잇는 교량 설계
건설 및 환경공학과 곽효경 교수의 구조설계연구실은 이런 분위기 탓인지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 박사과정 및 석사과정 각각 6명씩 총 12명의 학생들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상의 구조물을 수없이 만들고 부수며 이상적인 구조를 찾고 있다. 곽 교수가 최근 관심을 갖고 진행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장대교량, 즉 길이가 긴 다리의 합리적인 설계를 위한 시뮬레이션 연구다. 특히 교각이 없이 주탑 한두개가 교량을 떠받치고 있는 현수교나 사장교는 현대 건설기술의 백미다.
현재 우리나라는 남해안의 다도해를 40여개의 다리로 잇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계획이 완성되면 육지에서 차를 타고 다도해를 돌아볼 수 있다. 그 출발점에 위치한 부산의 광안대교가 작년에 완공됐다. 광안대교는 주탑사이의 거리가 5백m로 현재 국내 최장의 현수교다.
곽 교수는“다리를 놓을 지점이 정해지면 그 지형에 가장 적합한 다리의 형태와 재료, 비용 등을 찾아주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우선 과제”라며“시뮬레이션의 결과를 토대로 설계가 완성되면 그 뒤 실제 구조물을 짓는 과정, 즉 시공은 시간문제” 라고 말한다. 이때 시뮬레이션이 잘못되면 나중에 낭패를 보게 된다. 제조업과는 달리 건설분야는 설계를 시험해볼 수 있는 견본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의 천막이 태풍에 찢어진 것도 순간 최대 풍속을 잘못 예측한 시뮬레이션이 원인이었다. 따라서 실제 상황을 최대한 가까이 예측할수 있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많은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가 필요하다.
LNG 저장뱅크, 설계비만 1백억원
초고층 빌딩이나 장대교량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현대사회를 지탱하는데 꼭 필요한 거대 구조물들도 있다. 이제는 도시의 모세혈관이라고 할 수 있는 액화천연가스(LNG)의 저장탱크가 그 예. 우리가 밸브만 열면 언제나 가스를 쓸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 LNG가 저장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하 LNG 저장탱크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지름 73m, 높이53m의 크기로 용적이 20만kL나 된다. 물이라면 수영장 2백곳을 채울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게다가 천연가스를 액체상태로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탱크내부의 온도는 영하 1백62℃를 유지해야 한다.
곽교수팀은 현재 지하LNG 저장탱크를 국내기술로 설계하는 시스템 개발프로젝트에 참여하고있다. 저장탱크 한기를 짓는 비용은 1천억원 정도인데, 현재는 유일하게 설계기술을 갖고 있는 일본 회사에 대당 1백억원씩 설계비를 지불하고 있다. 곽 교수는“저장탱크가 온도를유지하면서, 지진이나 사고 등 최악의 상황에서도 안전하도록 구조물을 설계하는데 필요한 통합 해석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며“앞으로 수십기를 더지어야 하므로 설계 국산화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이밖에도 곽 교수의 연구실에서는 현재 건물마다 들어서는 주차장 구조물의 설계 표준화 연구도 진행중이다. 또 실제 구조물을 지을 때 일어나는 현장의 시공성을 고려한 구조물의 설계방안도 연구되고 있다. 곽교수는 국내 건설회사에 4년간 근무했던 경력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곽 교수 연구실에는 여학생이 세명이나 된다. 건설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고유 영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좀 뜻밖이다. 이에 대해 곽 교수는“실용성을 추구하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아름다움이 구조물을 설계하는데 가장 먼저 고려하는 사항”이라며“멋을 부리려면 이를 받쳐줄 수 있는 복잡한 기술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미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선진국의 예를 보더라도 이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