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열중성자속이 5×1014 n/cm2/sec으로 세계 10위권이지만, 이렇게 다양한 일을 하는 원자로는 찾기 어렵습니다.”
정환성 하나로운영부장은 하나로의 위상을 이렇게 자평했다. 중성자속은 단위 시간당 단위 면적을 지나는 중성자의 수로, 연구로의 성능을 평가할 때 중요한 기준이다. 중성자속이 높아야 활용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로는 비슷한 성능의 다른 연구로 보다 더 많은 목적으로 쓰여 다목적성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다.
내비게이션에도 안 나오는 원자력연구소
하나로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연구용 원자로가 3대 있었다. 각각 1962년과 1972년에 미국 기술로 건설한 트리가 마크II와 트리가 마크III, 1982년 미국으로부터 무상으로 기증받은 교육용 연구로다. 트리가 마크II와 III는 중성자빔 연구와 동위원소 생산, 교육에 쓰였다. 그러나 이들은 열출력이 모두 2MW 이하로 낮았고, 용도에도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트리가 마크II와 III는 1995년 가동을 중단했다.
1985년부터 개발을 시작해 1995년 가동을 시작한 하나로는 처음부터 다양한 목적을 갖고 태어났다. 원자력 기술 개발 인프라 구축, 핵연료 개발, 원자력 시설의 재료 검증, 동위원소 공급, 반도체 생산, 방사화 분석 등 산업부터 기초과학 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열출력은 국제 수준에 맞는 30MW다.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설계하고 건설한 최초의 연구로다.
원리나 시설은 발전용 원자로와 대동소이하다. 열출력은 대형 상용 원자로의 수십 분의 1 정도지만, 핵연료의 우라늄235 함량은 19.75%로 2~5%인 상용 원자로보다 높다. 그래서 중성자가 많이 나와 실험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하나로를 보기 위해서는 출입 절차를 두 번이나 거쳐야 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에도 원자력연 내부 지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국가의 중요 시설이라는 뜻이다. 하나로142는 다목적 연구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원자로 아랫부분에는 연구 장치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정 부장은 “처음 하나로를 만들었을 때는 연구 장치 없이 원자로만 달랑 있었지만, 이후 연구 장치를 하나씩 늘려나가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됐다”고 말했다.
원자로 위로 올라가자 뚜껑 없이 그대로 노출된 수조가 보였다. 원자로가 있는 수조 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원자로에서 나오는 파란 불빛이 보였다. 고에너지 입자가 물속에서 광속보다 빨리 움직일 때 나오는 체렌코프 빛이다.
푸르게 빛나는 원자로를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진귀한 경험이었다. 노출된 수조에 담가 놓아도 괜찮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원자로에서 나오는 중성자는 대부분 물에 흡수된다. 오히려 개방형 수조이기 때문에 사고가 나도 물을 보충하기 쉽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처럼 물을 공급하지 못해 상황이 나빠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중성자빔 연구의 산실
하단에는 중성자빔을 이용하는 연구 시설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국내외 산업·학교·연구소가 자유롭게 신청해 이용할 수 있다. 중성자를 이용한 측정분석실험은 주로 물질의 구조를 밝히는 데 쓰인다. 중성자가 물질에 부딪치면 회절, 산란, 투과의 세 가지 특성이 나타난다. 회절 현상으로는 물질의 3차원 구조, 산란 현상으로는 원자의 열적 동요를 알아내고, 투과 현상으로는 내부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비파괴검사를 할 수 있다. 이같은 중성자빔 연구는 기초과학기술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활용분야도 다양하다. 리튬이차전지를 만드는 데는 중성자 회절을 이용해 격자 구조를 분석하는 기술이 쓰인다. 자동차에 쓰일 수소연료전지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수소연료전지는 수소가 산소와 결합해 생기는 물의 미세한 흐름에 따라 효율이 정해지는데, 중성자로 이 흐름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자동차가 바로 하나로를 이용해 수소연료전지를 연구하고 있다.
중성자 비파괴 검사는 엑스선보다 훨씬 더 깊이 침투할 수 있고 분해능도 뛰어나다. 터빈 블레이드 같은 기존의 비파괴 검사법으로 보기 어려운 항공기 부품의 균열이나 이물질 유입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원자력연은 지난 2007년 우리 공군과 기술교류 협정을 맺고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의 결함을 탐지하는 데 하나로를 이용하고 있다.
2010년에는 하나로에 냉중성자 연구시설도 구축했다. 중성자가 처음 원자로에서 핵분열로 생겼을 때는 에너지가 평균 2MeV(메가전자볼트) 정도다. 이들이 하나로의 원자로를 둘러싼 물에 충돌하면서 에너지가 25meV(밀리전자 볼트)로 떨어지는데, 이때를 열중성자라고 한다. 이를 다시 액체 수소에 통과시켜 에너지를 4~5meV로 떨어뜨린 게 냉중성자다.
열중성자는 속도가 빠르고 파장이 짧아 원자 단위의 물질 구조를 알아내는 데 적합하다. 반면 파장이 0.4~2nm(나노미터, 10억 분의 1m)인 냉중성자는 좀 더 큰 나노 단위의 구조를 측정하는 데 적합하다. 하나로가 생산하는 냉중성자의 품질은 프랑스의 ILL, 독일의 FRM-2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으로 나노와 바이오 분야의 기술 개발과 새로운 산업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
냉중성자 연구시설은 원자로실에 붙어 있는 다른 건물에 있다. 냉중성자는 유도관을 타고 실험동으로 움직인다. 여기서 하나로를 처음 설계한 과학자들의 혜안이 돋보인다. 가동 중인 원자로에 냉중성자 시설을 설치하는 게 위험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정 부장은 “하나로를 설계할 때부터 미래에 냉중성자를 이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나중에 확장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고 설명했다. 무려 20여 년 전부터 준비를 해 둔 것이다.
이어서 2012년 11월에는 냉중성자시험동에 중성자극소각산란측정창치를 설치해 가동에 들어갔다. 나노보다 큰 마이크론(1000나노)과 서브마이크론(100나노) 단위의 물질 구조를 분석하는 장치다. 나노 단위의 입자로 존재하기 어려운 물질의 구조도 측정이 가능해진 것이다.
전기자동차, 반도체 만들고 암도 치료하고
상단에서는 수직으로 나 있는 조사공을 통해 재료에 중성자를 쪼일 수 있다. 중성자를 맞은 재료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하는 일이 대표적으로 반도체와 동위원소 생산이다. 고순도의 실리콘 단결정에 중성자를 쪼이면 실리콘 원자 중극히 일부를 인으로 핵변환시켜 반도체로 만들 수 있다. 연구용 원자로에서 나오는 높은 밀도의 중성자를 효과적으로 제어해 실리콘과 중성자가 균일하게 반응하게 하는 기술이 핵심이다.
이렇게 만든 반도체는 중성자핵변환도핑(NTD) 반도체라고 부른다. 실리콘에 가스 상태의 인을 주입해서 만든 것보다 인의 분포가 더욱 균일하다. 인의 분포가 고를수록 더 높은 전압과 전류에서 사용할 수 있다. 고속전철이나 전기자동차, 발전소 설비처럼 대용량의 전력을 사용하는 장치에는 이런 고품질 반도체가 필요하다. 하나로는 전 세계 NTD 반도체 수요의 약 15%를 공급하고 있다. 지난 2009년에는 세계 3번째로 지름 8인치 NTD 반도체 생산 기술을 확보했다.
실리콘 대신에 안정동위원소를 넣은 뒤 중성자를 쪼이면 방사성 동위원소가 된다. 동위원소란 양성자의 수는 같지만, 중성자의 수가 달라 질량이 차이 나는 원소를 말한다. 방사성 동위원소는 자연에도 약 50종류가 있지만, 대부분은 인공적으로 핵반응을 일으켜 만든다. 정 부장은 “하나로는 120가지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생산할 능력이 있으며, 이들은 산업과 의료용으로 폭넓게 쓰인다”고 설명했다.
하나로에서 생산하는 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로는 갑상샘암 치료제로 쓰이는 요오드-131, 국내신약 제3호인 간암 치료제 홀뮴-166키토산, 테크니슘-99m 등이 있다. 산업용은 재료의 결함을 알아내는 비파괴검사나 공정진단, 식품보존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쓰인다.
하나로의 또다른 용도는 원자력 시설의 재료 검증과 시험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만드는 데 쓰는 재료는 오랜 시간에 걸쳐 중성자의 영향을 받아 성질이 변한다. 하나로를 이용하면 이런 재료의 변화를 미리 시험할 수 있다. 2010년 완공된 핵연료 노내조사시험설비가 이 역할을 한다.
이 설비는 원자력 발전소와 똑같은 환경에서 핵연료와 재료의 성능과 안전성을 검증한다. 새로운 핵연료나 재료를 개발하면 실제로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연구용 원자로를 이용한 시험을 거쳐야 한다.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 이런 설비가 없어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기술의 해외 유출이나 비용 같은 문제가 생겼지만, 하나로에 이 설비가 들어서면서 해결됐다.
원자력 강국으로 나가는 힘
하나로로 얻은 노하우는 그대로 연구로 사업으로도 이어졌다. 2009년 원자력연은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 연구로 건설 사업을 수주했다. 열출력 5MW의 연구 및 교육용 원자로를 포함한 원자력 시스템 전체를 요르단에 수출하는 계약이다. 설계부터 건설, 제작, 시운전까지 일체의 과정을 이행한 뒤 2015년에 요르단에 인도하게 된다. 이 성과가 고무적인 것은 현재 전 세계에서 작동 중인 연구용 원자로 240여 기 중에서 65%가 30년 이상 된 노후 기종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이를 계기로 노후 원자로를 대체하기 위한 수요가 늘어나는 시장에 주요 공급자로 자리매김한다는 계획이다.
원자력연은 수출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국내에 부족한 방사성 동위원소 공급을 위해 하나로의 뒤를 이은 신형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할 계획이다. 2016년 부산 기장군에 들어설 신형 연구로는 20MW급으로 최신 기술을 적용해 만든다. 사용하는 핵연료의 우라늄-235 비율을 유지한 채 밀도를 높여 더 효율적이고, 제어봉을 아래에 설치해 위쪽의 작업 공간이 더 넓다.
계획대로 된다면 우리나라는 앞으로 50년간 20여 기의 연구로를 수주할 수 있다. 원자력 기술 강국의 길로 들어서는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로가 가동된 지 50년 만에 이 정도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최초로 자력 개발한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