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에서 기포가 발생하는 모습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현상이다. 맥주나 탄산음료를 마실 때 그 안에서 기포가 발생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포는 지금도 풀리지 않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미스터리한 존재다. 최근 과학자들이 밝혀낸 기포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무엇을 얻으려고 할까.
한해의 마지막 12월. 친구와 가족들이 망년회에서 만나 뜨거웠던 올해의 일에 대한 얘기꽃을 피우는 자리에서 술은 빠지지 않는다. 여기에 등장하는 단골메뉴는 맥주. 사람들은 서로의 잔에 거품이 넘치지 않도록 따른 후 이를 높이 쳐들고 ‘브라보’를 외친다.
‘맥주’하면 위에 생기는 거품과 그 안에서 몽글몽글 올라오는 기포가 머리에 떠오를 정도로 맥주에서 기포는 매우 중요한 존재다. 누구나 한번쯤 맥주를 처음 대하면 이 기포에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맥주 속 기포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왔다. 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맥주 속 기포에서 흥미로운 문제를 발견하곤 했다.
기네스 흑맥주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
●● 잔에 따른 맥주의 기포를 살펴보자. 기포는 당연히 컵의 윗부분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기네스북의 후원사인 기네스사의 흑맥주에서 사람들이 기포가 아래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기네스 흑맥주에서 기포가 아래로 이동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지난 2백여년 간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물리학 법칙에 따르면, 기포는 분명 액체보다 가볍다. 따라서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부력에 의해 기포는 컵의 윗부분으로 상승해야 한다. 그렇다면 기네스 흑맥주는 물리학의 이 보편적인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일까.
19세기 영국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조지 스토크스는 기네스 맥주의 기포 문제를 해결하고자 주의깊은 관찰을 시도했다. 술집에서 기네스 맥주를 시키면 그 회사가 개발한 잔에 담겨나온다. 그래서 그는 기네스 맥주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알아보기 위해 기네스 잔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기포는 확실히 아래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 까닭을 밝히지는 못했다. 이후 과학자들은 아르키메데스의 법칙과 스토크스의 관찰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를 해결하고자 노력해 왔다.
이 의문이 풀린 것은 1999년의 일이다. 당시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 컴퓨터사이언스학과의 클라이브 플렛처 교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 미스터리를 풀었다. 결과는 기포가 겉보기와 달리 위·아래 두방향 모두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아르키메데스의 법칙과 스토크스의 관찰이 모두 맞은 셈이었다.
플랫처 교수의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우선 기네스 맥주잔 안에서 생긴 기포는 크기에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위로 이동한다. 이때 기포는 맥주도 함께 끌고 올라간다. 그리고 기포는 잔의 가운데일수록 상승속도가 빠르다. 그 결과, 가운데 부분의 맥주가 위로 상승하게 된다. 이 점이 바로 기포가 아랫방향으로 이동하는 단서가 된다.
물리학의 기본법칙에 따르면 사람이 마시거나 맥주가 기화되지 않은 한, 잔 속의 맥주 양은 보존돼야 한다. 따라서 잔의 가운데 부분에서 상승한 맥주는 그 자리로 되돌아와야 한다. 상승한 맥주는 잔의 벽을 타고 바닥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후 맥주는 잔의 바닥에서 발생하는 기포에 이끌려 또다시 상승하는 순환 운동을 한다(그림1).
기네스 맥주의 이같은 순환 운동은 기포의 기묘한 움직임에 대한 결정적인 답을 제시한다. 잔의 벽 가까이에서 기포의 운동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은 위로 상승하려는 부력과 내려오는 맥주에 의해 아랫방향으로 끌어내리는 힘, 이 두가지다.
그런데 기포의 크기에 따라 이 두힘이 기포에 미치는 값이 달랐다. 기포가 클수록 부력이 아래로 끌어내리는 힘보다 커진다. 따라서 큰 기포는 잔의 벽면 가까이에서도 상승운동을 한다. 그러나 기포의 지름이 0.05mm보다 작으면 부력이 약해져 기포는 아랫방향으로 끌리는 힘을 더이상 이겨내지 못하고 하강한다. 이같은 기포의 움직임은 잔의 벽면에서 매우 가까울 때 나타난다. 흑맥주의 검은 빛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는 바로 이 기포만이 보였던 것이다.
맥주캔에 장착된 기포발생장치
●● 기네스 맥주는 크림 같은 거품으로 유명하다. 이 거품의 맛이 고소해 거품채로 마시면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세계 애주가로부터 기네스 맥주가 사랑받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1980년대 말 기네스사는 생맥주로만 즐길 수 있는 자사 흑맥주의 크리미한 거품을 캔용기로도 맛볼 수 있도록 독특한 장치인 위드젯을 개발했다. 기네스 캔맥주를 마셔본 사람은 아마도 캔 속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둥근 공의 이 장치를 한번쯤 궁금해했을 것이다.
위드젯의 원리를 따져보기 전에 먼저 맥주에서 기포가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맥주는 이산화탄소 기체를 포함하고 있다. 캔에서 이산화탄소는 일부가 맥주에 녹아있고, 일부는 캔의 윗부분에 기체상태로 남아있다. 녹아있는 이산화탄소가 바로 맥주에서 기포를 형성하는 것이다. 맥주캔 내부는 대기압보다 높은 압력상태로 유지되기 때문에 캔 뚜껑을 따면 갑자기 압력이 떨어지면서 녹아있던 이산화탄소가 기포를 형성한다. 이 기포가 위로 올라가 맥주의 거품층을 이룬다.
그런데 기네스 맥주는 이산화탄소 외에도 질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다른 맥주에 비해 기네스 맥주는 이산화탄소를 적게 포함하고 있다. 또한 질소는 이산화탄소에 비해 맥주에 잘 용해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다른 제품에 비해 기포가 덜 생긴다. 따라서 위드젯이 들어있지 않으면 기네스 캔맥주에서 발생하는 거품층은 매우 얇다. 애주가들이 원하는 크리미한 거품을 제대로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위드젯은 바로 기네스 캔맥주의 풍부한 거품층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플라스틱 공인 위드젯은 안에 질소가 채워져 있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공은 캔이 봉해지기 전에 그 안으로 넣어진다. 이와 함께 캔이 봉해지기 전에 액체질소 소량이 맥주에 주입된다. 이 액체질소는 나중에 기화해서 캔에 높은 압력을 가한다. 캔의 내부 압력이 높아지면서 소량의 맥주가 플라스틱 공에 난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안에 채워져 있던 질소를 압축시킨다. 결국 공 바깥의 압력과 내부의 압력이 같아질 때까지 맥주가 들어간다. 보통 공 안에는 맥주의 1%가 들어간다고 한다.
이제 기네스 캔맥주의 뚜껑을 따보자. 갑자기 내부의 압력이 떨어지면서 공 안에 압축돼 있던 질소가스가 작은 구멍을 통해 맥주 밖으로 빠르게 새어나온다. 그러면서 공은 맥주 내부를 마치 흔들어주는 것처럼 동요를 일으킨다. 이런 흔들림은 탄산음료를 흔들어 따는 경우와 비슷하게 좀더 많은 기포가 형성되도록 한다. 결국 발생한 기포는 위로 떠올라 풍부한 거품층을 만드는 것이다(그림2).
올해 이그 노벨상은 맥주 거품
●● 올해의 물리학 분야 이그 노벨상이 수여된 연구주제가 맥주 거품이었다. 독일 루뒤그 막시밀리안스대의 물리학자 아른트 라이케는 2002년 물리학 분야 이그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의 연구는 시간에 따라 맥주 거품이 어떻게 감소하는지에 대해서다.
라이케 박사가 이 연구를 수행한 배경이 재미있다. 그는 학생들에게 실험 데이터를 분석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맥주 연구에 착수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그 노벨상 수상감이 된 것이다. 그는 “맥주는 저렴할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친근한 소재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얘기했다. 라이케 박사의 연구 결과는 ‘유럽 물리학 저널’(European Journal of Physics)에 게재됐다.
라이케 박사는 실험에서 세가지 종류의 맥주를 이용했다. 뚜껑을 갓 딴 맥주를 컵에 따르고 6분 동안 거품의 높이 변화를 15차례 측정했다. 이 측정값을 통해 시간에 따른 맥주 거품의 감소가 수학적으로 지수함수를 따른다는 결과를 얻었다. 맥주 거품이 처음으로 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린 시간(반감기)이 그 다음 반으로(초기의 1/4) 줄어드는데 걸린 시간, 또 그 다음 반, 그 다음 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과 같다는 말이다.
맥주의 종류에 따른 차이는 단지 반감기가 다르다는 점뿐이었다. 재미있게도 라이케 박사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의 반감기가 가장 길었다고 한다. 자신이 즐기는 맥주의 거품이 가장 천천히 줄어든다는 의미다. 반감기는 맥주의 온도와 숙성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그림 3).
지수함수를 따르는 자연현상은 맥주 거품만이 아니다. 방사성 붕괴, 충전기에서 전기가 줄어드는 현상이 바로 예가 된다.
삼페인 기포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까닭
●● 기포가 가장 폭발적으로 발생하는 음료로는 단연 샴페인이 꼽힌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과 같이 축하하는 날에 터트리는 샴페인에서 솟아오르는 거품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 오죽했으면 영국 속어로 삼페인을 ‘버블리’(bubbly, 거품이 많은)라고 할 정도다.
샴페인이 맥주나 다른 음료에 비해 기포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질문이 시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세상의 여러 술집에서 심각하게 논의돼온 주제다. 최근 유럽의 공동연구팀이 이 논의를 종식시켰다. 2000년 프랑스 모와샨돈 연구소의 베르트란드 로빌라드와 라임대 제라드 라저-벨라이어는 공동으로 샴페인의 기포에 대한 비밀을 벗겨 그 연구결과를 유럽에서 발행되는 과학저널인 ‘랭뮤어’에 발표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기포는 순수한 물에서보다 샴페인에서 천천히 상승한다. 그 까닭은 샴페인이 단백질과 같은 유기분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유기분자는 계면활성제에 속한다. 즉 비누를 구성하는 분자처럼 물과 친한 부분(친수성)과 그렇지 않은 부분(소수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샴페인에서 기포가 발생하면 유기분자가 기포 주위로 모여들고 소수성 부분이 기포막에 달라붙는다. 이렇게 달라붙은 계면활성제는 기포의 성질을 변화시키고 결과적으로 기포의 상승 속도에 영향을 미친다.
계면활성제는 기포의 표면장력을 변화시킨다. 유기분자에 둘러싸이면 기포의 표면이 두꺼워지고 딱딱해진다. 그리고 기포가 위로 상승할 때 유기분자들도 같이 끌고 올라가기 때문에 기포를 둘러싼 유기분자들은 기포의 아랫부분에 주로 모여있다. 기포가 유기분자라는 짐을 매달고 올라가는 셈이다. 이 때문에 샴페인 속 기포가 물에서보다 느리게 상승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포의 상승속도는 계면활성제의 양에 따라 달라진다. 짐을 많이 매달수록 기포는 천천히 상승할 수밖에 없다. 연구자들은 바로 이 점을 통해 샴페인이 맥주보다 기포가 폭발적으로 상승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맥주에도 샴페인처럼 계면활성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양이 맥주의 경우 샴페인보다 무려 30배나 더 많다. 때문에 맥주 기포는 샴페인의 기포보다 느리게 상승하는 것이다.
이처럼 맥주나 샴페인 속 기포가 갖는 미스터리들 중에는 최근에야 풀린 것이 많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점이 있다. 과학자들이 기포를 연구하는 까닭이 뭘까. 단지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기포의 문제를 소일거리 삼아 연구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포는 단지 즐겨 마시는 맥주 속에서나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기포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여러 비밀을 담고 있다.
우주실험의 가장 큰 골칫덩어리
●● 무중력상태의 우주공간에서 기포가 발생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지상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우주공간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래서 무중력상태의 우주공간에서는 비행사가 맥주를 즐길 수 없다. 콜라와 같은 탄산음료도 새지 않는 특수용기에 빨대를 꼽고 마셔야 한다. 이때 지상에서처럼 용기를 흔들어서는 안된다. 기포가 생기기 때문이다. 무중력상태에서 기포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뭘까.
맥주를 잔에 따르면 그 안에 녹아있던 기체들이 기포를 형성하고, 이 기포들은 액체 위로 떠올라 거품층을 만든다. 그런데 중력이 없다면 액체 안에 생긴 기포가 위로 떠오를까. 그렇지 않다. 기포는 생긴 곳에 그대로 머무른다. 때문에 기포들이 합쳐져 무려 축구공 크기만큼 계속 켜진다. 결국 맥주가 밀려 올라가 잔에서 넘치고 만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주공간에서 주전자에 물을 끊이는 일은 위험하다. 주전자의 물이 끓어 생기는 기포들은 중력이 없기 때문에 물 위로 솟아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물을 밀어올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공간에서 뜨거운 물을 얻으려면 물의 양에 비해 상당히 큰 통에 물을 담아 끓여야 한다.
무중력상태에서 기포의 문제가 이 정도라면 그리 심각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보다 기포는 매우 심각한 존재다. 비행사의 생명유지시스템에서 기포가 발생하면 그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생명유지시스템을 구성하는 튜브를 떠올려보자. 그 튜브에는 액체가 지나다닌다. 이곳에 기포가 생기면 액체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앙열공급 시스템에서 기포가 액체가 이동하는 관을 막는다면 어떻게 될까.
기포의 횡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주실험에서 가장 큰 골칫덩어리이기도 하다. 항공우주연구원의 최기혁 박사는 DNA의 전기영동실험을 예로 들어 기포의 심각성을 설명했다. 전기영동실험에서 DNA를 장치의 한쪽 끝에 놓고, 그 양쪽 끝에 전기를 건다. 그러면 분석하고자 하는 DNA의 질량에 따라 이동하는 거리가 달라진다. 이를 통해 DNA의 질량을 알아낼 수 있다. 이 전기영동실험을 우주공간에서 하면 중력의 효과가 사라지기 때문에 실험결과가 더 좋다. 그런데 전기영동장치에 포함된 액체성분에서 기포가 생기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실험결과에 방해가 된다. 따라서 이 연구를 수행할 때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우주공간에서 생겨난 기포를 효과적으로 제거하거나 이동시키는 방법이 세계적으로 한창 연구중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의 물리학자 안드리아 프로스러페티 박사는 우주공간에서 액체 안의 기포를 이동시키기 위해 음파를 이용하려고 한다. 그는 뜨거운 표면 가까이 액체 안에 음파를 쏘아준다. 이 음파를 통해 액체에 흐름이 생기게 하고 이 흐름을 따라 기포를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게 프로스러페티 박사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 자신도 이 방법이 과연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이처럼 우주공간에서 기포를 제거하는 확실한 방법은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확실한 방법을 구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최근 기포의 운동을 좀더 이해하려고 한다. 실제로 기포의 운동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슈퍼컴퓨터를 동원하고 있다.
기포의 운동을 기술하려면 열원이 되는 고체나, 액체 또는 기체와의 상호작용을 포함시켜야 하는데 이것은 무척 복잡한 시스템이다. 또한 부력, 열흐름, 그리고 표면장력과 같은 요소가 기포의 운동에 관여하는 일부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요소가 개입되기 때문에 실제로 기포의 운동을 시뮬레이션하는데는 상당한 계산능력을 가진 슈퍼컴퓨터가 필요하다.
파도소리 비밀 간직한 기포
●● 지난 여름 시원한 바다에서 들었던 파도소리는 우리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찰싹거리는 파도소리에 대한 비밀이 기포로 설명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2002년 8월 22일자 ‘네이처’에 발표됐다.
미 스크립스해양연구소의 물리학자인 그랜트 딘과 데일 스토크스는 실험실의 물탱크와 캘리포니아 바다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찍은 사진 수천장을 분석했다. 이들은 우선 기포의 크기가 어떻게 분포하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연구팀은 기포의 크기와 개수의 분포가 ‘멱함수 법칙’(power law)을 따른다는 점을 밝혀냈다. 즉 기포의 크기가 클수록 발생하는 수가 적다. 이같은 멱함수 법칙은 자연현상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데, 지진 강도나 산사태의 규모가 그렇다.
이와 함께 연구팀은 기포가 지름 1mm를 기준으로 기포의 크기와 개수의 상관관계가 다르다는 점을 알아냈다. 지름 1mm를 기준으로 기포가 클수록 개수가 줄어드는 비율이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연구팀은 1mm를 기준으로 기포의 생성 과정이 다르다는 점을 유추했다.
연구팀은 파도가 부서지는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기포의 크기를 조사했다. 그 결과, 큰 기포는 파도타기 선수들이 사랑하는, 마치 곱슬머리처럼 굽어질 때 만들어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때 파도 안쪽으로 생긴 긴 터널모양의 공기와 바닷물이 만나 1mm-수cm 크기의 기포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연구팀은 그 다음으로 일어나는, 즉 파도 꼭대기가 바닥을 칠 때에는 작은 기포들이 생성된다는 점을 밝혔다. 이때 물이 튀면서 공기가 물 속으로 들어가 기포가 생성된다. 이를 통해 연구팀은 기포의 크기에 따라 기포가 터지면서 발생하는 소리를 알아내고자 했다. 그 결과 작은 기포들이 큰 기포보다 높은 소리를 낸다는 것을 밝혀냈다.
연구팀이 파도소리의 비밀을 벗기고자 기포의 크기를 연구한 것은 아니다. 기포는 전지구적 기후, 가스 교환, 그리고 생물학적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과학자들이 부서지는 파도 사진 하나하나에서 기포를 세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포는 바로 바닷물과 공기가 만나 섞이면서 생성된다. 대기 중의 기체는 기포에 포함돼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바다의 식물 성장은 용해된 이산화탄소에 달려있다. 따라서 기포의 크기는 결과적으로 대기 중으로부터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중요한 기체인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바다의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바다 표면에서 기포가 터질 때 물방울이 공기 중으로 뿌려진다. 이 물방울들이 구름의 씨앗이 되는 에어로졸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파도가 부서지는 현상을 이해함으로써 기후 모델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같은 기포연구를 통해 과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이해를 높일 뿐 아니라 기포를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장치를 개발한다. 지금까지 기포를 이용해서 개발된 장치로는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
버블젯 프린터를 마이크로 엔진에 적용
●●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인간의 발명품 중에서 기포를 이용한 대표적인 예를 꼽으라면? 20여년간 기포에 대해 연구해온 중앙대 기계공학과 곽호영 교수는 버블젯 프린터를 얘기한다.
버블젯 프린터는 1980년대 캐논사가 발명했다. 잉크를 뿜어내는 노즐의 지름이 수μm(1μm=${10}^{6}$m)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프린터 헤드에 2백개 가량의 노즐들이 수μ초마다 미세한 잉크 방울을 뿜어내면서 사진과 같은 고해상도로 프린트해낸다. 그러면서도 버블젯 프린터는 레이저 프린터에 비해 가격이 훨씬 싸다.
노즐에서 짧은 시간만에 미세한 잉크방울을 뿜어낼 수 있는데는 기포를 제어하는 기술 덕분이다. 각각의 노즐에는 가로 세로가 모두 65μm인 네모난 히터가 장착돼 있다. 그리고 히터와 노즐 사이에는 잉크가 채워져 있다. 히터는 전류를 흘려줌으로써 뜨거워진다. 그러면 이 히터 위로 한개의 기포가 만들어지고 어느 정도 커지면 노즐 안의 잉크를 밀어내 미세한 잉크방울을 노즐 밖으로 뿜어낸다. 이때 잉크를 뿜어낼 정도로 기포가 커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5μ초에 불과하다. 따라서 전류가 흐르는 시간을 수μ초 간격으로 조절하면 히터가 데워졌다 식었다를 반복하면서 기포의 크기가 제어된다. 이를 통해 수μ초마다 미세한 잉크방울이 노즐로부터 뿜어져나온다(그림 4).
버블젯 프린터에서 기포가 이용되는 방법을 응용해서 곽호영 교수는 마이크로 시스템에서 구동되는 초소형 엔진을 개발중이다. 그의 아이디어를 들어보자.
상자 안에 액체를 채우고 그 바닥면에 전기적으로 작동되는 히터를 설치한다. 그리고 어느 한쪽 벽에는 피스톤이 움직이는 관을 연결한다. 이 상태에서 전류를 흘려주고 히터를 데우면 그 위로 기포가 형성된다. 그러면 내부 공간이 줄어들어 피스톤을 밖으로 밀어낼 것이다. 그런 후 히터를 식히면 피스톤은 다시 되돌아온다. 이와 같이 히터를 데웠다 식혔다를 반복하면 피스톤은 밀렸다 들어왔다를 반복한다. 이같은 왕복운동으로 초소형 엔진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 곽호영 교수의 생각이다.
마이크로 시스템에서는 자동차처럼 석유와 같은 연료를 태워 작동하는 엔진이 실제로 이용될 수 없다. 때문에 버블젯 프린터처럼 기포가 초소형 엔진을 작동시키는데 적합하다. 마이크로 시스템에서 기포는 밸브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 지름이 고작 수μm인 관에 히터를 장착한다. 그리고 이 히터를 데우면 그 관에 기포가 형성돼 액체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 또한 기포의 크기를 제어함으로써 액체의 흐르는 양도 조절 가능하다. 기포가 수도꼭지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처럼 기포는 마이크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욱 관심을 받고 있다.
숫자가 기포로 표시되는 시계
●● 좀 엉뚱해보이기는 하지만 기포를 이용한 참신한 아이디어도 나오고 있다. 1995년 미국 버지니아 공과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프레드릭 롬버그는 소다가 채워진 잔에서 기포의 움직임을 관찰하다 머리 속에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만약 기포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다면 기포로 글자, 숫자, 그리고 다른 어떤 형태를 표현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곧이어 캘리포니아 공과대 대학원을 진학한 롬버그는 이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학원 수업의 일환으로 이 아이디어를 실제 상품으로 구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실제로 2000년에 롬버그는 기포 시계의 실험적인 모델, BIT를 개발했다. BIT 장치는 유리로 만든 두께가 얇은 네모난 통으로, 그 안에 투명한 베이비 오일이 채워져 있다. 그리고 통의 바닥에 한줄로 여러개의 소형 밸브가 장치돼 있다. 이 밸브는 투명한 오일 안으로 색깔 있는 기포를 발생시킨다. 즉 기포를 만드는데 투명한 오일과 섞이지 않도록 점성과 밀도가 다른, 그리고 색깔 있는 액체가 쓰인다. 기포가 가장 위로 상승하면 이 액체는 다시 모아져 재사용된다.
투명한 오일 안에서 기포가 숫자나 글자를 나타내도록 밸브들은 마이크로칩으로 정교하게 작동된다. 마이크로칩으로 각 밸브에서 기포가 발생하는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다. 롬버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형태로 시간을 보여주는 기포 발생장치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는 현재 기포로 3차원 디스플레이 장치를 개발할 포부를 갖고 있다. 과연 그의 아이디어는 성공할 수 있을까.
|이그(Ig) 노벨상|
이그 노벨상은 '다시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될' 기발한 연구나 업적을 수상하는 상이다. 노벨상 시상식이 이뤄지는 10월에 시상된다. 과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미국 과학기술계의 '딴지일보' 격인 '있을 법하지 않은 연구 연보'(Annals of Improbable Research)가 1991년 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