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지난 12월 11일 서울 아침 기온은 영하 10℃. 예년보다 빨리 찾아온 동장군이 매섭게 몰아치던 날 충남 아산을 향했다. 차에서 내리기만 해도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와 바람에 몸이 저절로 떨렸다. 더군다나 이틀에 걸쳐 전국적으로 내린 눈에 세상은 온통 얼음빛이었다.

서울에서 차로 2시간 남짓 내려갔을까. 천안을 거쳐 아산 시내에서 39번 국도를 따라 남쪽 유구 방향으로 8km 정도 가면 송악면을 지나는데 외곽도로에 진입하자마자 ‘외암 민속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런데 너무 큰 기대를 해서였을까. 표지판을 따라 외곽도로를 빠져나왔는데도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눈으로 덮인 들판만 보였다. 어렵사리 마을 입구를 찾아 들어가니 비로소 자그마한 초가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영하의 기온에도 고드름이 녹는다?

봄, 가을 주말에는 수백 명이 방문하는 마을답게 입구 한편에 널찍하게 마련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니 고즈넉하면서 아늑한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왔다. 마을 뒤쪽으로 높은 산이 보이는 것 외에 이렇다 할 바람막이가 없는 들판 치고는 바람이 잔잔했다. 얼핏 보면 황량함마저 감도는 들판에 어떻게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 온 마을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을까.

외암마을은 주거지역과는 거리가 먼 지형 조건을 갖고 있다. 마을과 산 사이, 그리고 마을의 옆쪽으로 넓은 논과 밭이 자리잡고 있다. 뒤쪽의 설화산이 바람을 막아준다고는 하나 부족해 보인다. 겨울철의 북서풍에 쉽게 노출되는 입지 조건이다.

마을에 들어서니 초가지붕마다 추운 날씨에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영하의 기온에도 한낮의 따뜻한 햇빛을 받아 고드름이 녹아 지붕마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외지의 방문객을 맞았다.

“겨울에 날씨가 추우면 마을도 당연히 춥지요. 다만 보시는 것처럼 한낮에는 고드름이나 눈이 녹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눈이나 고드름이 녹은 물방울이 초가 지붕에서 떨어지는 것은 되도록 피하는 게 좋아요. 옷에 묻으면 초가지붕 짚에서 나온 누런 물이 들거든요.”

이준봉 마을보존회장의 말이다. 마을은 평탄한 평지에 조성된 일반적인 전통마을과 달리 경사도(수평거리에 대한 수직거리의 비율)가 약 25% 가량으로 비교적 급하다. 마을 뒤쪽에서 입구 쪽으로 내려다 보면 집 몸체는 거의 보이지 않고 지붕들만 보인다. 평탄한 지역이 아니라 경사도가 있는 곳에 옹기종기 모인 가옥들은 좌우로 펼쳐진 들판에서 오는 차가운 기운을 막아주는 형상이다. 위쪽 가옥이 아래쪽 가옥을 감싸는 모습이 추울 때 바람을 막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려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주위 들판에 비해 마을 안쪽에서 상대적으로 아늑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다. 마을을 둘러싼 지형조건이 최적의 주거지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경사지에 자리잡은 집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




척박한 환경 이겨내는 지혜

마을 입구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안길’이 나온다. 가운데로 나있는 길인데 안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좌우로 샛길을 뻗치고 있다. 나뭇가지에 비유해 보면 안길은 큰 나무줄기를, 샛길은 작은 가지를 연상케 만든다. 작은 가지를 따라 들어서 있는 초가집은 가지에 과일이 달려 있는 형상이다.

아무렇게나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마을이 들어선 곳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칙이 있다.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 주산인 설화산과 서남쪽에 위치한 봉수산을 잇는 긴 선이 이어지는 선에 마을이 위치해 있다. 동북쪽의 설화산 자락이 마을에 이르러 구릉을 만들면서 마을 앞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때문에 마을의 서쪽 어귀는 낮고 동쪽의 뒤로 갈수록 높아진다. 구릉을 따라 위치한 집들은 서남향으로 거의 일정한 방향이다. 가옥이 늘어선 마을 구조와 구릉의 적절한 활용, 집의 방향으로만 불리한 환경 조건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일까.

마을에서 유일하게 솟을대문이 들어서 있는 건재고택과 교수댁, 참판댁과 송화댁 안에는 연못과 녹지가 조성돼 있다. 또 설화산과 이간 선생 묘소를 잇는 능선에는 소나무숲을 조성했다. 마을의 북쪽에 조성된 이 소나무숲은 방풍림 역할을 하며 더욱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마을과 집을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어요. 지금도 연세 많으신 어른들과 마을 주민들이 큰 불편함 없이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을은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이준봉 회장의 설명이다.

실제로 외암마을이 집성촌으로 형성될 당시 예안 이씨의 누가, 왜 이런 형태로 가옥을 배치하고 마을을 만들었는지 알기는 어렵다. 현재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도 정확한 연유를 알 길이 없다고 한다. 다만 지형 조건 등 열악한 환경을 자연 친화적인 방법으로 극복한 지혜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돌로 담을 쌓고 집터와 농지를 확보하다

마을 안길과 샛길을 걷다 보면 제주도에서나 볼 법한 돌담이 어디에나 이어져 있다. 정확하게는 돌 사이의 빈 공간을 흙으로 메우지 않으면서 쌓아올린 ‘돌각담’이다. 마을 주민들이 실제로 수백 년 간 직접 쌓은 담으로 돌 하나하나는 주민들의 손때가 묻은 역사가 되고 있다.

외암마을이 있는 지역은 예로부터 삼다(三多) 마을로 알려졌다. 돌(石)과 말(言), 양반이 많은 지역이라는 얘기다. 마을의 지질구조는 지표면에서 일정한 지층에 이르기까지 호박돌로 이뤄져 있다. 호박돌은 지름이 20~30cm 크기로 화강암이나 변성암 등 경도가 높은 암석이 개울이나 하천에 의해 깎여진 잡석을 말한다. 조약돌보다는 커서 예로부터 기둥이나 처마를 받치는 데나 바닥콘크리트를 만드는 데 쓰인다.




마을에 정착하기로 한 예안 이씨 일가는 예상보다 척박한 토양 환경을 맞닥뜨리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집을 지을 터와 농지가 부족했던 이 지역에 가득한 호박돌로 담을 쌓기 시작하며 집터와 농터를 확보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외암마을 돌각담은 전체 길이만 약 5~6km에 이른다. 마을 입구에서 안길 제일 안쪽까지 기껏해야 200m도 채 되지 않는 마을 규모로 짐작해 볼 때 어마어마한 길이다.

특이한 점은 이 돌각담의 폭이다. 2000년대 초 문화재청이 전통 민속마을로 지정하기 전 돌각담의 폭은 사람 키만큼 두터웠다. 이 폭은 마을이 정비되면서 갈수록 줄어들었다. 지금도 맨 윗부분이 80~90cm에 달할 정도로 두껍다. 이 지역에 얼마나 많은 돌이 있었는지 보여준다. 돌각담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지만 사람 눈높이보다 약간 아래다. 완벽하게 개방되지는 않으면서도 집끼리 배타적이지 않게 쌓아올렸다.

이 회장은 주민들의 돌담 쌓는 기술은 최고라고 말한다. “지금도 담이 무너지면 마을 주민들이 직접 담을 정비해요. 이렇게 아무렇게나 생긴 돌을 흔들리지 않고 탄탄하게 쌓는 노하우로는 이 마을 주민들을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겁니다.”

돌각담은 돌 사이사이에 흙과 같은 이음새를 넣지 않기 때문에 배수가 잘 되고 동결에도 잘 무너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방범이
나 구획을 나누는 역할을 돌각담이 맡고 있지만 이러한 역할은 외암마을 돌담에게는 그다지 의미없어 보인다. 돌이 많은 지질학적 악조건을 폭이 넓은 돌각담으로 극복하는 동시에 현재 마을의 촘촘하고 아늑한 구조를 완성한 데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선조와 주민들만의 노하우가 담겨있다.












물길을 집안에 들이다

돌각담과 함께 마을에서 가장 특이하게 눈에 띄는 것은 집 내부까지 연결돼 있는 수로다. 길들을 따라서 연결된 수로는 돌담 밑을 통
해 집 안뜰까지 연결된다. 집 안뜰에서 다시 바깥으로 돌아나가 다른 집으로 수로가 연결되는 식이다. 마을 주민들은 물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수로의 물은 설화산 계곡에서 내려온 개천물을 마을로 끌어들이는 유입구를 통해 들어온다. 이렇게 마을로 들어온 물길은 거의 모든 집을 거친 후 마을 앞 개울로 연결된다. 왜, 무슨 생각으로 이런 특이한 물길을 만들었을까. 이 회장의 설명에는 오랜 세월 동안 내려오는 이 마을만의 신념이 깃들어 있다.



“마을의 주산인 설화산 이름에 불 화(火) 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화(火)기가 많아 이를 풍수지리적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지요. 화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물을 마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가가호호 휘돌아 나가게 한 것입니다.”

풍수지리적으로 과한 것을 억제하는 방법을 ‘염승(싫어하는 것을 극복하다)’이라 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을 ‘비보’라 한다. 외암마을 주민들은 염승의 한 방법으로 물길을 집안까지 들였던 것이다.

특히 양반댁 몇 채를 제외하고 대부분 초가집인 마을에 화재가 났을 때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물길을 고안했다.

상류층 가옥에선 물길의 물을 연못으로 조성해 정원을 가꾸는 데 활용했다. 물길과 연못, 정원이 어우러진 상류층 주택이 여름에 시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비가 많이 왔을 때는 마을 전체의 배수로 역할을 물길이 해냈다.

풍수지리적인 방법이 반드시 효과가 있고 과학적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그러나 외암마을을 들여다보면 주변 환경과 가옥 건축 자재, 수로와 정원 등이 조화롭게 삶터를 구성하고 있다. 현재 도시설계와 거주공간을 설계하는 데도 시사하는 점이 크다.

정동섭 호서대 건축학과 교수는 2010년 한국도시설계학회지에 발표한 ‘외암마을의 공간구조에 따른 수공간 이용 특성 연구’에서 “외암마을에서 물길로 만들어진 수공간은 경계를 구분짓는 기능, 배수 기능, 상징성, 빨래터와 같은 커뮤니티 기능, 휴식 기능 등 다양한 역할을 하는 생활공간”이라며 “현대 주거지역을 계획하거나 가옥 구조를 설계할 때 참고할 만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메주가 영글고 딱따구리가 반기는 마을

마을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조용한 가운데 ‘따닥따닥’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일까 궁금해 하며 살펴보던 순간, 한 가옥 안에 있는 나무 등줄기에 빨간 색 배를 드러낸 ‘오색딱따구리’ 한 마리가 연신 나무를 쪼아대고 있었다. 주로 농경지 주변의 나무나 촌락의 숲, 마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색딱따구리는 가까이 접근하는 외지인을 본 체 만 체 열심히 나무를 쪼아대고 있었다.

“그것 참 희한한 일이네요. 가끔 볼 수는 있지만 보통 행운이 아니고서는 처음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이 오색딱따구리를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신기하네요.” 동행한 마을 해설사의 덕담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위협을 느꼈는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날아갔다.

마을 입구의 어른들은 초가지붕을 교체하기 위해 짚을 엮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나락을 털어내고 탈곡을 한 후 남은 볏짚을 엮어 ‘이엉’으로 만든 후 이를 지붕에 올리는 이른바 ‘해이기’를 준비중이었다. 원래는 일일이 사람 손으로 이엉을 엮었으니 최근에는 기계로 이엉을 엮는다.

원래 건조한 겨울철에 해이기를 집집마다 돌아가며 진행한다. 그런데 주민들은 해이기를 서두르고 있었다. 12월 초에 예상치 못하게 많이 내린 이른 눈이 재촉하게 만든 것이다.

오후 4시를 향해 가는 시간에도 따뜻한 햇살이 마을 전체를 감도는 기분좋은 기운을 느끼며 마을을 나섰다. 불리한 지리 조건과 지형, 지질을 이겨내고 수백 년 동안 마을을 지킨 선조들과 주민들에게는 현대 과학까지는 아니더라도 환경을 읽어내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삶의 기술이 있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13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김민수 기자

🎓️ 진로 추천

  • 역사·고고학
  • 도시·지역·지리학
  • 문화인류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