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기자는 앨런 튜링 100주년 기념 기사 취재차 영국 런던에 간 기회를 이용해 그리니치 천문대를 방문했다. 경도의 기준인 본초자오선이 지나는 곳이다. 이 선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갈수록 동경 몇 도, 서쪽으로 갈수록 서경 몇 도 하는 식으로 위치를 정한 것이다. 남들처럼 본초 자오선 양쪽에 각각 한 발씩 딛고 서서 사진도 찍으며 즐거워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여기가 기준이 된 거지?’
자전축에 수직인 적도와 달리 본초자오선은 정하기 나름이다. 그리니치 자오선은 1851년 영국의 천문학자인 조지 에어리 경이 만들었고, 점차 기준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자오선이 됐다. 결국 1884년 25개국 대표단이 미국 워싱턴에 모여 당시 가장 유명했던 그리니치 자오선을 본초자오선으로 결정했다. 우리나라는 이런 합의 과정에 끼어들지도 못한 채 지금 자연스럽게 이 기준을 따르고 있다. 물론 저항이나 반발이 없었을 리는 없다. 영국의 앙숙이었던 프랑스는 그리니치 자오선이 표준이 된 뒤에도 오랫동안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쓰기도 했다.
이런 일은 지금 우주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과학저널 ‘네이처’는 소행성 베스타와화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도 논란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1997년 국제천문연맹(IAU)은 허블우주망원경으로 관측한 자료를 바탕으로 베스타의 좌표를 결정했다. 이에 따르면, ‘올버스’라는 이름의 어두운 지역의 중심을 지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경도를 잰다. 올버스는 베스타를 처음 발견한 천문학자의 이름이다.
그런데 지난해 7월 베스타에 도착한 탐사선 던은 당시 허블우주망원경이 관측한 자전축이 실제보다 10° 정도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구팀은 이를 바탕으로 자전축을 수정한 새 좌표체계를 만들었는데, 이때 본초자오선까지 바꿔 버렸다. 이들이 삼은 새 기준은 클라우디아라는 지름 500m짜리 충돌구였다. IAU의 기준과 거의 반 바퀴나 차이가 난다. 이들은 클라우디아가 본 초자오선의 위치를 더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데다가, 새 좌표체계가 더 합리적인 지도를 만드는 데 좋다고 주장했다.
IAU는 한번 정한 좌표체계는 자오선의 기준이 되는 지형이 사라지거나 크게 변하지 않는 이상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을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정 용도로 직접 좌표체계를 만들어 쓰는 건 상관없지만, 표준을 바꿀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던 연구팀은 앞으로도 클라우디아를 기준으로 한 새 좌표체계로 논문을 발표 할 계획이다.
태양계 행성은 모두 북극 방향이 같다
지구 밖 행성의 지도를 만드는 일은 언제부터시작됐을까. 첫 대상은 물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달이었다. 달은 맨눈으로도 어렴풋이 지형을 파악할 수 있다. 400여 년 전 망원경으로 달을 본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달의 모습을 그렸다.
지구 밖 천체의 지도를 만드는 순서는 지구 지도를 만들 때와 정반대였다. 지구의 지도는 주변의 가까운 지형을 자세히 그리는 것부터 시작해 점차 지역을 넓히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20세기 들어서야 비행기나 인공위성을 이용해 높은 곳에서 한눈에 지형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반면, 달이나 화성 같은 천체는 망원경으로 전체 모습을 바라본 게 먼저였다. 망원경의 발달은 지형을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만들었고, 요즘에는 탐사선이 행성 주변을 스쳐 지나가거나 돌면서 사진을 찍는다. 달이나 화성에는 직접 착륙해 지형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도 한다.
정확한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좌표가 필요하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경도와 위도를 정해야 한다. 이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자전축이다. 그러면 자전축에 수직이면서 중심을 지나는 적도면을 정할 수 있다. 위도도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하지만 북극과 남극을 정하는 데는 두 가지 규칙이 있다. 먼저 지구의 북극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극을 북극으로 정하는 방법이다. 흔히 태양계를 그림으로 그릴 때 편의상 지구의 북극이 위를 향하도록 그리므로 위쪽이 북극이 된다. 다른 방법은 ‘오른손 법칙’이다. 엄지손가락을 세워서 자전축이라고 생각한 뒤 회전하는 방향으로 나머지 손가락을 감싸 쥐었을 때 엄지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이 북극이 된다.
태양계의 행성은 첫 번째 규칙으로 북극과 남극을 정한다. 대부분 자전축이 지구와 비슷하기 때문에 모두 위쪽이 북쪽이 된다. 자전축이 수평에 가까울 정도로 누워 있는 천왕성도 살짝이나마 위를 향하고 있는 쪽이 북쪽이다. 자전축이 제 멋대로인 왜행성과 소행성은 오른손 법칙으로 정한다. 만약 오른손 법칙으로 행성의 북극, 남극을정한다면 금성과 천왕성의 북극과 남극이 바뀐다. 이 둘은 자전 방향이 다른 행성과 달라 북극이 지구의 남극과 같은 방향이 되기 때문이다. 자전축이 일정하지 않은 작은 소행성은 극점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정할 수 없다.
경도는 합의로 정해야 해
자전축과 적도, 극점, 위도가 해결됐으니 이제는 경도를 정해야 한다. 경도는 물리적인 기준이따로 없기 때문에 임의로 정한다. 지구와 달리 건물이나 도로가 없는 행성에서는 지형이 유일한 기준점이 되는데, 보통 충돌구가 많이 쓰인다. 예를 들어, 화성의 본초자오선은 에어리(Airy)-0이라는 충돌구 위를 지난다. 금성의 본초자오선은 아리아드네라는 충돌구의 중앙 봉우리를 지나간다.
달은 좀 다르다. 달은 항상 같은 면이 지구를 향한다. 달의 본초자오선은 지구를 향한 면의 정 가운데를 지나는 선이다. 이런 예가 또 있다.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 역시 항상 같은 면이 토성을 향하는데, 타이탄의 본초자오선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했다.
경도까지 정해졌으니 정확한 위치를 표현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다. 높이를 알아야 제대로 된 지도를 만들 수 있다. 높이를 재는 기준은 뭘까. 지구에서는 해수면을 기준으로 높이를 측정한다. 바다가 평온한 상태일 때의 평균 해수면을 기준으로 높이를 재고 ‘해발 OOm’로 표시한다.
바다가 없는 곳에서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국내에서는 드물게 행성지리학을 전공한 이차복 서울대 국토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중력의 등포텐셜면을 기준으로 삼는 게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중력이 어떤 일정한 값을 지니는 점을 이으면 가상의 구를 만들 수 있는데, 이 구의 표면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지구의 해수면도 중력 등 포텐셜면과 거의 비슷하다. 화성의 경우 이 면은 중심으로부터 대략 3396km 떨어져 있다.
때로는 기준에 따라 높이가 크게 바뀔 수도 있다. 화성의 거대 화산인 올림푸스 몬즈는 보통 높이가 26km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건 화산이 놓여 있는 평원으로부터 쟀을 때의 높이다. 화성의 중력 등포텐셜면을 기준으로 재면 높이가 21km다. 무려 5km나 차이가 난다. 만약 지구에도 바다가 없다면 사람이 지금의 해저에 발을 딛고 다녔을 테니, 우리가 보는 산의 높이는 훨씬 더 높아졌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투영법을 생각해보자. 투영법이란 3차원 공간에 있는 지형을 평면 위에 나타내는 도법이다. 이 연구원은 “다른 행성의 지도에 쓰는 도법도 지구에서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구에 가까운 행성은 메르카토르도법, 극평사 도법과 같은 여러 도법을 특성에 맞게 골라 쓰면 된다. 모양이 불규칙한 소행성의 지도를 만들 때는 더 신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메르카토르 투영법은 극지방으로 갈수록 면적이 실제보다 넓어지는 왜곡이 생긴다. 그런데 자전축 방향으로 길쭉하게 생긴 소행성에 이 투영법을 쓰면 극지방의 왜곡이 훨씬 더 커진다.
한 지형 두 이름
지도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지명이다. 현재 행성이나 위성, 소행성의 지명을 결정하는 권한은 IAU에 있다. 먼저 새로운 곳의 영상을 얻으면 IAU의 명명법위원회가 영상을 보고 주요 지형에 이름을 붙인다. 그 뒤, 좀 더 정밀한 연구가 이뤄지면서 각 연구팀이 작은 지형에 붙일 이름을 제안하면 IAU가 심사한다. 여기서 승인을 얻으면 지도에 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관장하는 기관이 있고 또 지구와 달리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문제는 생긴다. 지난해 네이처 보도에 따르면 화성탐사선 큐리오시티 연구팀은 목표로 삼은 산의 이름을 행성지질학자인 로버트 샤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교수의 이름을 딴 ‘샤프 산’으로 짓겠다고 IAU에 신청했다. 그러나 IAU는 그 정도 규모의 산은 라틴어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아에올리스 몬즈’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거기서 왼쪽으로 150km 떨어져 있는 충돌구에 샤프의 이름을 붙였다. 규정에 따르면 충돌구에는 사람 이름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큐리오시티 연구팀은 보도자료나 공개된 자리에서 계속 샤프 산이라는 이름을 썼다. 비공식적인 이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고 집을 꺾지 않았던 것이다. 큐리오시티 착륙에 대한 61쪽짜리 보도자료 어디에도 아에올리스 몬즈라는 이름은 없다. 샤프 산만 있을 뿐이다. 근처에 있는 두 지형에 한 사람의 이름이 붙는 어색한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이처럼 과학자들이 IAU의 규정을 지키지 않고 임의로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처음이 아니다. 2004년에는 화성탐사로버 스피릿이 탐사한 언덕에 NASA가 ‘컬럼비아 언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 해 전 사고로 폭발한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지형은 아직 아무도 정식으로 이름을 제안하지 않아 IAU도 이름을 붙이지 않은 곳이다. 앞으로 IAU가 규정에 따라 공식 이름을 붙이려 한다면 또다시 논란이 생길 수 있다.
화성에 낙동강이?
IAU의 명명법위원회는 다른 행성에 지명을 붙일 때 여러 나라의 문화를 반영한다. 우리나라 지명도 붙어 있다. 우리나라 지명이 붙은 천체는 모두 5개다. 화성에는 각각 진주, 나주, 태진, 장성이라는 우리나라 지명이 붙은 충돌구가 있다. 낙동강 이름이 붙은 낙동 협곡도 있다. 소행성 아이다에는 각각 제주도의 빌레못동굴과 만장굴 이름이 붙은 충돌구가 하나씩 있다.
수성에는 조선 시대의 문인 정철과 윤선도의 이름이 붙은 충돌구가 있다. 금성에는 9개나 있는데, 황진이, 금성, 제주 설화의 마고할미, 사임당, 삼신할매, 세오녀, 제주 설화의 설문대할망, 연옥, 연숙이다. 연옥과 연숙은 한국식 이름이라고만 돼 있어 의미를 알 수 없지만, 다른 이름은 대부분 신화에서 따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토성의 위성인 레아에 있는 충돌구에는 무려 하느님, 단군, 환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물론 이렇게 세계 각지의 문화를 반영해 지명을 붙인다고 해도 반발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앞으로 더 많은 나라가 우주개발에 참여한다면 IAU의 지도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도를 만들겠다는 나라가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구 밖 다른 세계의 지도는 사람이 발을 딛기 전에 먼저 만들어지고 있다. 분쟁이 생긴다고 해도 미리 해결할 수 있다. 미지의 장소를 직접 탐사하며 자국 깃발을 꽂고 지도를 그리던 과거와 달리 앞으로는 지도를 갖고 다른 세계에 착륙할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다른 행성에 도착해 한국식 이름이 붙은 장소를 찾아다니며 재미있어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