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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비슷한 날이었습니다. 장거리 연애 중이었던 소년은 주말을 맞아 여자친구를 찾아가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제 둘은 서로 피곤한 연애는 안 하기로 합의가 된 상태였지요. 맛있는 밥을 먹고 함께 TV에서 연예인들이 나와 신변잡담과 농담따먹기를 하며 웃고 떠드는 프로그램을 보며 편히 쉬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 여자연예인이 요즘 살이 쪄서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하자 여자친구가 입을 삐죽이면서 투덜거렸습니다.

“흥. 삐쩍 마른 주제에 오버하구 있네. 안 그래, 오빠?”

따지고 보면 소년이 여기서 대답을 잘못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글쎄, 난 적당해 보이는데….”

“뭐? 저게 적당하다고? 오빠도 50kg 넘으면 여자도 아니다 뭐 그런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런데 살 빼는 게 뭐 어려워? 그냥 좀 덜 먹고 운동 좀 하면 금방 빠지잖아. 쉽던데.”

“그러니까 내가 살찐 건 게을러서 그런 거다 그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다고!”

“오빤 평소에 툭하면 나보고 운동 좀 하라고 잔소리했잖아!”

“그거야 건강을 위해서….”

그렇게 시작된 말다툼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걸까?


화기애애했던 시작과 달리 둘은 결국 어색한 분위기에서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지만, 마음은 영 불편했습니다. 그때 소년의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여자친구에게 온 문자였습니다.

“난 오빠에게 있어서 뭘까?”

‘아놔,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왜 이래….’

소년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문자가 하나 더 왔습니다.

“오빠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제야 소년은 허겁지겁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말이 잘 나올 리가 있나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짐짓 별일 아니라는 듯이 최대한 간드러진 목소리로 애교를 떨어보았지만, 여자친구의 반응은 시원찮았습니다.

“오빤 좀 그런 게 있어….”

소년은 답답했습니다. 이전에도 종종 이런 표현을 들었거든요.

“뭔데? 뭔지 말을 해야 알지~.”

“됐어! 집에나 가.”

여자친구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습니다. 소년이 다시 전화했지만 받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은 전화를 해도 소용없음을 깨달은 소년은 일단 잠시 내버려두기로 했습니다.


 

민감한 주제 건들지 마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일단 화제가 여자친구의 몸매 얘기로 번진 것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살찌는 것에 민감한 여자친구는 평소에도 운동이나 다이어트에 대한 이야기가 거슬렸던 모양이었습니다.

멍하니 인터넷을 뒤지던 소년은 1985년 ‘사회적&개인적 관계’라는 학술지에 실린 ‘가까운 관계에서 금기인 주제’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견했습니다. 오래된 논문이었지만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연구팀은 여러 쌍의 남녀를 순수한 친구, 잠재적 연인, 연인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한 뒤 면담을 통해 어떤 주제가 대화할 때 불편한지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크게 7가지 주제가 금기로 뽑혔습니다. 연애의 상태, 상대방의 개인적인 인간 관계, 행동 규범, 과거 연애, 둘의 생각 차이가 많은 주제, 이야기하기 불쾌한 주제, 기타였지요. 소년이 평소 여자친구에게 운동 좀 하라며 잔소리했던 건 행동 규범에 속하는 셈이었습니다.

소년에게는 연애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가 금기라는 점이 가장 뜻밖이었습니다. ‘우린 지금 어떤 사이지?’, ‘우리 관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와 같은 질문은 소년도 꺼리는게 사실이었지만, 그건 그냥 소년이 소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다른 주제는 친구냐 연인이냐에 따라 꺼리는 정도가 별 차이가 없었는데, 이 주제만큼은 잠재적 연인에 속하는 사람 88%가 꺼린다고 대답했습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해나가는 사이일수록 이런 대화가 금기라는 것입니다.

설문조사 참가자들은 일단 그런 대화가 관계를 망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면 무력한 기분을 느껴 상처받기 쉽다는 건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진행하는 게 낫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자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소년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제 본격적인 연인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 때, 전화가 울렸습니다.

“오빠, 아까 한 얘긴 잊어버려. 내가 좀 기분이 그랬었나 봐.”

소년은 알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2012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고호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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